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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그 동안 국민들께서 오히려 나라 걱정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는 국민들이 나라 걱정할 필요없는 시대를 열겠습니다."

 

이명박 당선인이 지난 1월 14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노무현 정권 5년을 "국민들이 오히려 나라를 걱정한 시대"로 규정하면서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시대를 열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지금 국민들이 다시 나라 걱정을 안 할 수 없게 됐다. 이명박 정부가 국무위원들을 임명하지 못한 채 '파행출범' 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20일 손학규 통합민주당 대표의 전격적인 '해수부 존치 양보' 선언으로 여야간 새로운 협상의 돌파구가 마련될 것으로 보이지만, 인사청문회에 걸리는 시간 등을 감안할 때 상당 기간 '국정혼돈'은 불가피하다.

 

벌써 일선 공무원들은 일손을 놓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휘체계가 흔들리는데 무슨 일이 되겠는가. 이런 행정공백의 와중에 언제 '제2의 숭례문 화재'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국민들은 그야말로 나라 걱정에 잠이 오지 않을 지경이다.

 

'국정혼돈'에 대한 책임까지 야당에 떠넘길 수는 없다

 

이런 상황을 놓고 여야간 책임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한나라당은 "통합민주당이 (의도적으로) 발목을 잡고 뒷다리를 걸었다"(강재섭 대표)고 비난했다. 그러나 민주당은 이 당선인이 조각 발표를 일방적으로 강행하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됐다는 입장이다. 손학규 대표는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라고 지적했다.

 

양쪽의 주장에는 다 나름의 근거가 있다. 어느 쪽 책임이 더 큰 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견해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이 당선인이 오해하고 있는 점이 하나 있다. 협상결렬의 책임은 '야당 탓'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국정혼돈'에 대한 책임까지 야당에 떠넘길 수는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대통령직은 영광의 자리가 아니라 고난의 자리입니다. 권력투쟁의 승리가 가져다 주는 오만한 자리가 아니라 국민들의 신뢰가 가져다 주는 겸손한 자리입니다.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해도 좋은 자유로운 자리가 아니라 어떤 일에나 무한 책임을 지는 고통스러운 자리입니다."

 

이는 이번 대선에서 이 당선인을 도운 한나라당 정몽준 최고위원이 2002년 대통령선거 출마를 표명하면서 한 말이다.

 

"대통령은 무한책임을 지는 자리로, 어떤 변명도 통할 수 없습니다"

 

이건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굳이 이런 말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국정에 무한책임을 진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나라당 스스로 지난 5년 내내 이런 논리로 노 대통령을 몰아붙이지 않았는가.

 

"야당이 협조해주면 잘할 수 있다"라는 말은 하나마나다. 노 대통령인들 왜 국민들이 나라걱정 안 해도 되는 정치를 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한나라당만 협조해 줬다면…." 그런 말을 들었다면 한나라당이 먼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반대하는 야당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민주주의가 성립한다. 그런 야당을 국정파트너로 삼아 설득할 것은 설득하고, 타협할 것은 타협해서 국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바로 정치력이고, 리더십이다.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당연히 현행법 지켜야

 

처음부터 되짚어 보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스스로 '건국 이후 최대규모'라고 한 정부조직개편안을 단 한달 만에 국회에서 통과시켜 달라는 것은 애당초 무리한 요구였다. 당선인으로서는 당연히 야당의 반대에 부딪힐 경우에 대비해 '국정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해뒀어야 했다.

 

이런 방대한 정부조직 개편을 공청회 한번 거치지 않고 밀어붙이려 했던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이 문제를 시종일관 "새 정부 출범의 발목잡기냐, 아니냐"라는 식의 이분법으로 끌고 가려 했지만, 이는 '허구의 논리'이며 정략적 접근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진정으로 '작은 정부'를 지향하려 한다면 5년 집권기간 동안 차근차근 그런 정부를 만들어가면 된다. '정부조직 개편은 정권출범 전이 아니면 못 한다'는 주장은 이미 김영삼·김대중 정권을 거치면서 파산선고를 받은 논리다.

 

정부 출범 전에 예비 야당과 협의해서 최소한의 손댈 부분을 정비하고, 나머지는 정권출범 이후 과제로 남겨놓는 것이 순리적 접근이었다. 원안 통과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빨리 판단해서 정부 출범에 차질이 없도록 대비하는 것이 당선인과 인수위가 할 일이었다.

 

국회에서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당연히 현행법을 지켜야 한다. 법에 따라 내각을 인선하고 청문회를 준비했다면 정부가 파행 출범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그런 판단을 책임지는 게 바로 대통령이다. 그런 판단이 어긋났다면 또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

 

처음부터 야당과 협상할 생각 있었나?

 

이 당선인이 정말 야당과 협상할 생각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 당선인은 여야 협상이 개시되기도 전에 "만약 야당이 인수위 정부조직개편안을 받지 않으면 새 정부가 절름발이 출범을 할 수 있다"고 '협박'부터 했다. 야당 대표에게 연락도 하기 전에 일방적으로 면담을 추진 중이라고 발표해버렸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본격협상을 앞두고 '대국민담화'로 야당을 자극했다.

 

협상의 원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이 얼마나 어이없는 행동인지를 알 것이다. 이 당선인은 지난 12일 손학규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대화가 잘 안 되면 우리의 원안을 그대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다"고 사실상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나 그리고서도 협상은 1주일을 더 끌었다. 도대체 무슨 의도였는지 아리송하다.

 

협상을 하면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손학규 대표는 빠지라"고 요구했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협상 상대방의 최종 결정권을 가진 대표에게 빠지라니? 그럼 도대체 누구와 협상하겠다는 말인가?

 

이동관 인수위 대변인은 협상결렬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던 18일 오후 '조각 발표 강행' 방침 공개를 "단순한 대 언론 서비스 차원이었다"고 나중에 해명했다. 그러나 이 역시 솔직하지 못한 태도다.

 

이 대변인이 인수위 기자실을 찾아온 것은 여야의 최종협상을 앞둔 오후 5시 30분경. 그는 "협상이 타결되든, 결렬되든 오후 8시에 새 정부 내각명단을 발표하겠다"고 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베스트 오브 베스트'인 이 대변인이 몰랐을 리 없다.

 

이명박 당선인의 결정적 계산착오

 

이 당선인은 지난 16일 청와대 수석 내정자 등과의 워크숍에서 무심결에 속내를 내보인 것 같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이런 정치권의 여러 모습들이 국민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초이스(선택)을 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시종일관 머리 속에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정부를 운용할까" 보다 "어떻게 하면 총선에서 승리할까"라는 생각만 가득한 것이다.

 

이 당선인과 한나라당은 "야당이 다수이기 때문에 효율적 국정운용을 할 수 없으니 오는 4월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과반수 의석을 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하고 싶을 것이다. 이런 메시지를 국민들 피부에 와닿게 전달하기 위해 처음부터 내심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정적 계산착오가 있었다. '국정혼돈'에 대한 대통령의 '무한책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오만하고 무책임한 정권에 과반수 의석까지 안겨줬다가는 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 정부의 파행 출범을 보면서 국민은 오히려 그런 생각을 갖게 됐다.


태그:#정부조직개편, #인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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