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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포 바다(1)
경포 바다(1) ⓒ 박도

경포 호수

여태 강원 산골 산비탈 그늘에는 겨우내 내린 눈이 쌓여 있다. 하지만 우수(雨水)가 지나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절기를 지난 탓일까? 어제 오늘 볕이 유난히 좋다. 뜰로 나가자 바람도 한결 부드럽다. 봄의 여신이 유혹한 때문일까? 나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해 카메라를 메고 불쑥 집을 나섰다.

갑자기 바다가 그립다. 동네에서 가까운 영동선 횡성 휴게소에서 강릉행 버스를 탔다.

 영동고속도로 언저리 산비탈에 쌓인 눈
영동고속도로 언저리 산비탈에 쌓인 눈 ⓒ 박도

차창 밖 풍경이 펼쳐졌다. 산비탈 양지쪽에 쌓인 눈은 거의 다 녹았지만 음지쪽 눈은 아직 한겨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계절의 순환에 어찌 음지의 눈인들 버틸 수 있으랴. 둔내 장평 진부 횡계 대관령을 지나자 영동으로 멀리 쪽빛 동해 바다가 보인다. 강릉버스 정류장에 내린 뒤 곧장 경포로 갔다.

우리나라 동해안처럼 맑고 경치 좋은 곳은 세계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 나는 이 해안선이 좋아서 어느 해 겨울, 최북단 거진항에서부터 바다를 바라보며 부산까지 달려본 적도 있었다. 쪽빛 동해바다를 바라보면 우울했던 내 마음이 활짝 트이고, 교만했던 내가 마치 모래톱의 모래알처럼 갑자기 작아지고 겸손해 진다.  

경포의 매력은 바다와 호수, 그리고 소나무숲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경포에 이른 다음 호숫가를 산책했다. 일찍이 송강 정철도 이곳을 지나면서 경포의 바다와 호수의 빼어난 경치를 읊었다.

 잔잔한 경포 호수
잔잔한 경포 호수 ⓒ 박도

저녁 햇살 비추는 현산의 철쭉꽃을 잇달아 밟으며
신선을 태운 수레가 경포로 내려가니
십 리의 얼음같이 넓고 깨끗한 비단을 다리고 다시 다려
큰 소나무가 둘러싼 속에 한껏 펼쳐져 있으니
물결도 잔잔하기도 잔잔하다. 물속 모래까지 헤아릴 만하구나. 
-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현대어로 바꿈)

경포 호는 그새 녹아 물결은 잔잔했지만 옛날처럼 모래를 헤아릴 만큼 맑지는 않았다. 호수 곳곳에는 겨울 철새들이 긴 여행을 앞둔 휴식을 한가로이 즐기고 있었다. 마침 망원 렌즈를 집에 두고 왔기에 더 가까운 곳에서 철새를 앵글에 담으려 수초를 헤치고 접근하자 그들은 용케도 그 기미를 알고서 후드덕 날아가 버린다.

조용하구나 경포의 기상이여,
넓고 아득하구나 저 바다의 경계여.
여기보다 더 갖추어진 곳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경포 바다 모래톱에 그리운 이의 이름을 쓰는 여인.
경포 바다 모래톱에 그리운 이의 이름을 쓰는 여인. ⓒ 박도
옛 글 <관동별곡> 그대로다. 텅 비다시피 인적이 드문 모래톱에는 날렵한 보트 선장들이 양철통에다 모닥불을 지피고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 바다를 찾은 나그네들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리운 이의 이름을 새기면 곧 파도가 밀려와 덮쳤다.

경포 바다

나는 이 경포 바다를 열 번은 더 찾은 것 같다. 이 경포 바다가 좋아서 내 작품의 배경으로 삼기도 하였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 주인공 한명훈과 비전향 장기수 아버지를 교도소에 둔 간호사 여 주인공 나선미는 어느 해 겨울 강릉행 버스를 탔다. 한명훈은 신문기자로 신년호에 실을 동해 해돋이를 취재하고자 강릉행 버스를 탔고 나선미는 강릉 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기 위해 강릉행 버스를 탔다. 그들을 태운 버스가 폭설로 대관령을 넘지 못하자 두 사람은 같이 월정사를 찾아 같이 하룻밤을 보낸 뒤, 이튿날 열차로 강릉에 도착하여 만리장성을 쌓게 된다.

20년 전 나는 그 작품을 쓰기 위해 이곳에 두 번이나 답사 와서 무리를 하며 경포관광호텔에 묵기도 하였는데, 그 자리에는 호텔을 새로 짓는다고 가림막이 둘러쳐 있었다.

 경포 바다(2)
경포 바다(2) ⓒ 박도

“피는 물보다 진한 탓이겠지요.”
 “사상범은 한 달에 한 번씩 면회가 허용되는데 대전교도소에서 강릉교도소로 이감된 후부터 이따금 엄마 대신 제가 온답니다. “
 “그랬군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애인이나 약혼자를 만나러 강릉에 오는 줄 알았습니다.”
 “네! 핀트가 어긋나 실망이 크신가 보죠?”
  그네가 가볍게 웃었다.

  “아닙니다. 무척 다행입니다. 애인이나 약혼자를 만났다면 저를 찾았을 리 없죠.”
  나도 멋쩍게 따라 웃었다. 전등은 껐지만 푸른 달빛이 방안을 어슴푸레 비췄다.
  “저, 여기서 이렇게 자겠어요.”
  그네는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담요로 몸을 덮었다.

  “간밤에도, 열차 안에서 새우잠을 잤잖아요, 침대에서 편히 주무세요.”
  “됐어요. 탁자 위에 다리를 뻗으면 편할 거예요.”
   나는 그네를 번쩍 안아다가 침대 위에 눕혔다. 그네가 피라미처럼 발버둥을 쳤지만 곧 잦아졌다. 나도 그네 곁에 나란히 누웠다. 달빛이 그네의 얼굴을 비쳤다. 파도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네는 달빛도 부끄러운 양 창문의 커튼을 닫았다.

“안 믿으실지 모르지만, 저 이런 밤 처음이에요.”
  “믿습니다. 모든 게 선미씨 눈에 씌어 있어요.”
  그네가 살포시 내 품에 파고들었다. 나는 그런 그네를 꼭 끌어안았다.
 - 졸작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 중에서

 경포 바다(3)
경포 바다(3) ⓒ 박도

작가는 작품을 쓸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 작품을 쓸 때 낮에는 근무하고, 주로 주말과 밤에만 썼던, 그래서 탈고 뒤 팔에 무리가 와서 몇 달 된통 고생했던 기억이 뚜렷했다. 다행히 작품 속에 나오는 횟집은 그대로 있기에 들어가 지난날 먹었던 생선회 대신에 전복죽을 시켜 맛있게 들고는 막 백두대간을 넘으려는 저녁 해를 안고서 집으로 오는 차에 올랐다.

봄이 성큼 다가온 산뜻하고 기분 좋은 하루였다.

 저녁놀이 물드는 경포 호수
저녁놀이 물드는 경포 호수 ⓒ 박도


#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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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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