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쌩쌩거리는 동장군도 그 기세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옷깃에 스며드는 기운으로 알 수 있다. 이제 두꺼운 옷들을 벗고 활기를 띠며 거리를 활보할 절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자꾸 찾아오는 이별이란 단어 때문에 허공처럼 비어오는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다.

변산바람꽃이 있는 마을의 보리밭  이제 막 파랗게 새싹을 올리고 있는 보리밭 풍경
변산바람꽃이 있는 마을의 보리밭 이제 막 파랗게 새싹을 올리고 있는 보리밭 풍경 ⓒ 이연옥

며칠 전 딸아이가 시집을 갔다. 그렇다고 그동안 엄마 옆에 꼭 붙어서 살다가 집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엄마에게 온정을 다 주어 늘 나를 행복하게 했던 일도 그리 많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늘 부족하고 걱정되고 의견이 충돌되는 것도 모자라, 툭하면 큰소리 내고 서로 얼굴 붉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아이였는데 그 아이가 제 짝을 찾아서 결혼식을 올리고 훌쩍 신혼길에 올랐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하얀 드레스에 아빠 손을 잡고 평생 동행할 사람에게 간 딸 아이 때문인지, 아님 며칠 있으면 갑자기 먼나라로 아주 떠나는 동료와의 이별 소식 때문인지…. 헤어짐이란 단어들이 며칠 내내 속을 괴롭히는 건 도대체 왜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변산바람꽃 가랑잎 속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변산 바람꽃
변산바람꽃가랑잎 속에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변산 바람꽃 ⓒ 이연옥

자식이건, 가까운 친지이건, 같은 정신의 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함께 하고 지내던 사람이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살면서 겪어야 하는 일이거늘. 일상의 제자리를 무심히 지켜야하는 일이 힘들어 지는 것은 내면의 나약함에서 오는 일이라 생각이 든다.

늘 같은 생각으로 주기적으로 함께 하던 사람들이 변산바람꽃을 만나러 가자고 한다. 화요일이면 어딘가 꽃을 찾아 떠나는 팀이긴 해도 먼길은 언제나 주저하고 마다하던 내가 다섯시간이나 달려야하는 변산으로 바람꽃을 찾으러 갔다. 그리 하지 않고는 내마음 그 어두운 늪을 헤어 나올 길이 없을 것만 같았다.

변산바람꽃 정답게 피어있는 변산바람꽃에 푹 빠져본다.
변산바람꽃정답게 피어있는 변산바람꽃에 푹 빠져본다. ⓒ 이연옥

변산바람꽃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꽃사신이라해도 될 만큼 다른 어떤 꽃들보다 먼저 세상에 얼굴을 내미는 아주 고운꽃이다. 인터넷 소문에 의하면 이 꽃은 변산 어느 골짜기에서 춥고 어둡고 을씨년스런 긴 겨울을 이기고 어느 가랑잎 아래서 삐죽이 얼굴 내밀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 녀석들을 만나 내 안의 아주 작고 여린 마음들을 다 불러내 무언의 애정을 퍼붓다 보면 닫혀 있는 내마음의 휘장을 활짝 열고 뛰어 나올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산봉우리  아직도 하얀 눈이 남아있는 산봉우리들.
산봉우리 아직도 하얀 눈이 남아있는 산봉우리들. ⓒ 이연옥

무작정 달린다. 멀리 차창 밖으로 굽이굽이 능선들이 그림처럼 휙휙 지나간다. 산봉우리의 검고 어둡던 빛들이 이젠 제법 엷은 회색빛을 띄우고 있었다. 멀리 지나치는 보리밭이며 나뭇가지에 푸른빛이 어리기 시작하는 듯했다. 분명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는 것이다.

변산 어딘가 찻길이 끝나고 오솔길도 끝나는 곳에서 차를 돌려 세워놓고 차에서 내려 산비탈 양지바른 외딴집을 향해 걸었다. 오른쪽 산을 올려다 보았다. 아직도 봉우리마다 하얀 눈이 남아 있었고, 계곡을 따라서도 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길 옆 보리밭에선 보리싹이 겨울을 이기고 파랗게 제 색깔을 띠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 얼마 있으면 보리물결이 이 산골짜기에서 파도 칠 것임이 분명하다. 보리밭을 옆에 끼고 외딴집을 향해 걸었다.

장독대   할머니집 마당 옆엔 장독대와 가마솥이 걸린 화덕이 옛시절을 그립게 한다.
장독대 할머니집 마당 옆엔 장독대와 가마솥이 걸린 화덕이 옛시절을 그립게 한다. ⓒ 이연옥

"저 외딴집에 변산바람꽃 사진이 벽에 걸려있으면 우리는 제대로 찾아 온거야"하며 찾아간 외딴집엔 팔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튓마루에 앉아 먼저 간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어디서들 왔수?"

"네. 서울 근처에서 왔어요."
"에이. 여기 오는 사람들은 모두들 서울에서 왔다고 하지?"
"하하하. 네. 서울과 인천 사이 시흥시라는 곳이 있어요."
할머니는 집 앞에 심어놓은 오가피나무를 조그맣게 잘라 봉투에 담고 계셨다.
할머니 이거 뭐 하시는 거예요?"
"응. 이따가 갈 때 하나씩들 사가지고 가우."
"네, 할머니."

변산바람꽃   선바털애서 처음 만난 변산바람꽃
변산바람꽃 선바털애서 처음 만난 변산바람꽃 ⓒ 이연옥

우린 외딴집을 지키는 할머니와 사진 한 장씩을 찍었다. 할머니는 부끄러운 모습으로 "그만 찍으라"고 하시며 "어제도 열다섯 번은 찍었을 거유"한다.

"어제도 사람들이 많이 왔었나요?"
"그럼. 얼른 저 밭을 따라서 끝으로 가보우. 거기 가면 꽃들이 있어."
할머니가 앉아 있는 튓마루에는 누군가 사진을 찍어서 걸어 놓았는지 변산바람꽃이 화사하게 걸려있었다.

변산바람?꽃   서로 몸비비며 피어있는 변산바람꽃
변산바람?꽃 서로 몸비비며 피어있는 변산바람꽃 ⓒ 이연옥

산비탈 가장자리를 걸어 올랐다. 아무 기척도 없는 가랑잎 속에 그 여린 꽃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산비탈이 거의 다 끝날 무렵에서 하얗고 여린 무엇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꽃이다.

제 꽃술을 하나도 숨김없이 내보이는 변산바람꽃을 막상 발견하자 감히 먼저 달려들 수가 없어서 일행들을 먼저 불렀다. 그러고 주위를 살펴보니 아주 작고 해사한 꽃들이 여기저기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디 함부로 들어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었다. 행여 저 여린 꽃들을 잘못하여 밟기라도 할까봐 조심에 조심을 하였다.

변산바람꽃 돌틈에서서도 해사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다.
변산바람꽃돌틈에서서도 해사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다. ⓒ 이연옥

겨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오롯이 피어나 작은 꽃술 하나까지 열어 젖히고 이 산골짜기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것을 뽐내고 있었다. 눈 오고 바람 부는 매운 추위를 이겨내고, 한여름 우거진 풀숲에 자지러져 있다가, 아무도 일어서지 못하는 산비탈 양지에서 누구보다 먼저 홀연히 해사한 웃음을 보이며 일어난다.

가만히 몸을 낮추어 하얗고 여린 꽃송이 아래 앉아 카메라를 들이대다 문득 내 자신을 돌아본다. 언제나 조급하고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해서 발을 동동거렸던 순간들이 한순간에 지나는 물거품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여리지만, 제 꽃술 하나도 다 숨김없이 세상 앞에 열고 있는 꽃들 앞에 부끄러워지는 건 떠나는 동료에게 하고 싶은 말을 꽃술처럼 올리지 못하는 것 때문일까도 생각해 본다..

변산바람꽃    추위에도 제 곷술을 다 내보이며 세상 앞에 고고하다.
변산바람꽃 추위에도 제 곷술을 다 내보이며 세상 앞에 고고하다. ⓒ 이연옥

이 추위에도 속속들이 꽃술들 다 열고 세상을 바라보는 변산 바람꽃. 작아도 큰 여인처럼 꿋꿋하게 그 변산을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 작아도 큰 거인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진동시키고 훌쩍 떠나가는 동료처럼 변함없는 웃음으로 내마음을 진동시켜 주는 변산바람꽃을 향해 수없는 사랑의 표현을 했다. 그러고 나서야 지금의 나를 바로 보기 시작했다. .

'그래. 언제나 변함없는 그 마음으로 언제 어느 곳에서도 오늘 만나는 변산바람꽃처럼 피어 있어서 서로가 그리울 때,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작은 마음을 꺼내어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의 마음을 씻어주며 바라보는거야.'

내가 이곳을 다시 떠나도 아주 떠나지 않듯이 서로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꽃들이 그리운 날엔 무작정 달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서로를 보듬으면 되는 것이다.

변산바람꽃   변산에만 있어서 변산 바람꽃이라 한다. 아직 꽃소식이 없는 이 때에 산비알에서 소리없이 곱게 피어잇다.
변산바람꽃 변산에만 있어서 변산 바람꽃이라 한다. 아직 꽃소식이 없는 이 때에 산비알에서 소리없이 곱게 피어잇다. ⓒ 이연옥

하얀 드레스를 밟고 떠난 딸아이가 그 순결한 마음의 꽃을 가슴에 늘 지니고 있듯이 나도 변산 어느 산비탈에서 팔순의 외딴집 할머니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떠난 이들을 기다리다 환하게 맞아줄 것이다.

우수의 그 봄볕이 가슴으로 가득 차 오는 것을 변산바람꽃과 함께 느끼며 그 골짜기를 유유히 걸어서 나왔다. 더욱 굳건하게  씩씩하게. 봄볕들이 다 나를 따라 내고장으로 상경했다.

덧붙이는 글 | 딸의 결혼식. 동료와의 헤어짐에서 오는 허탈함을 변산바람꽃을 찾아서 달래어본다.



#변산바람꽃# 딸결혼식#동료와의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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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민뉴스에 기사를 20 건 올리고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오마이 뉴스에도 올리고 싶습니다. 그동안 올렸던 기사는 사진과 함께 했던 아이들의 체험학습이야기와 사는 이야기. 문학란에 올리는 시 등입니다. 이런 것 외에도 올해는 농촌의 사계절 변화하는 이야기를 사진을 통해서 써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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