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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타임즈> 21일자는 공화당의 사실상 후보로 결정된 매케인의 도덕성을 의문시하는 여성 로비스트와의 염문설 및 매수의혹에 대해 심층 보도하였다. 미국의 신문과 방송이 연일 이 문제를 보도하고 매케인 측은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매케인은 공화당 후보로 사실상 확정되었으며, 민주당에서 로비윤리의 강화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오바마 후보와 자질 검증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유력신문인 뉴욕타임즈의 기사 제목은 '공화당 매케인 후보, 그간 내세워온 도덕적 우위와 자신감, 부메랑으로 작용할 위기에 처하다'로 되어 있으며, 장장 4쪽 짜리 심층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뉴욕타임즈는 이번 미국대선 특집으로 공화, 민주 양당의 당내경선 후보들에 대한 인생역정과 경력에 대한 발굴기사를 '명예와 힘'이라는 시리즈를 연재해 오고 있다. 이번 기사는 '매케인편'인 셈이다. 이번 기사는 짐 루텐버그, 마릴린 톰슨, 데이빗 커크패트릭, 스테판 라바톤 등 4명의 기자를 투입하여 두 달 동안에 걸쳐 심층취재하여 기사화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사에는 현재 3천 명의 독자 댓글이 달렸다.

 

8년 전 여성로비스트 아이스만과 염문설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8년 전 최초 대선 출마 당시 매케인(현재 나이 71) 선거본부는 아이스만이라는 여성로비스트 문제로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다. 당시 여성 로비스트 비키 아이스만(현재 나이 40)이 로비를 벌이려는 당사자인 정치자금 기부자와 함께, 매케인 사무실을 여러 차례 직접 방문하여 매케인을 만났다.

 

마침내 당시 이 여성로비스트는 매케인과 로맨스에 빠지게 된 것을 알게 된 선거대책 간부들은 매케인 후보를 지키기 위하여, 수행원 등 실무자들에게 이 여성 로비스트의 접근과 만남을 저지하도록 지시하고 매케인 후보에게도 이 문제로 여러 차례 강력 경고해야만 했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당시 매케인은 로비스트 요청대로 연방통신위원회에게 규제를 풀어주도록 서한을 보냈다고 당시 언론보도가 나왔을 때, 매케인 선거대책 간부들은 아이스만 문제 때문에 극도로 노심초사했다.

 

이에 대해 매케인과 아이스만 측은 로맨스 관계는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여성 로비스트가 매케인의 소속 상원위원회에 직접 여러 차례 일을 보러 오가며 강한 유착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케인의 정직이라는 정치적 트레이드 마크는 치명적인 손상을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반부패 십자군 전사 자임

 

8년 전 당시 대선 시점은 매케인이 '키팅부패 5인방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생명이 거의 끝장 났다가 겨우 헤어나온 지 10년이 지난 때였다. 키팅 부패사건은 1980년대 1천 여 개의 예금대출 금융기관이 파산한 사건으로서, 링컨 금융사 회장인 키팅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불리고 있다.

 

당시 매케인을 비롯한 5명의 의원들 연루되어 상원윤리위에 회부된 바 있다. 이 사건에서 빠져나온 후 매케인은 특정 이해관계자와 로비스트 등에 대해 극도로 비난하면서, 자신을 엄격한 선거자금과 윤리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며, 수치스러움을 털어낸 십자군 전사, 명예의 사나이로 자임해왔다.

 

이를 위해 매케인은 워싱턴에서 고향인 피닉스에 갈 때마다 직항노선을 이용하지 않았다. 자신이 추진하던 직항노선에 이해관계에 연루되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의원들과 함께, 이해관계가 걸려 있던 루퍼드 머독, 마이클 블룸버그, 여성로비스트 아이스만의 고객사인 로웰 팩슨 등이 소유한 항공기들을 이용해왔다(매케인은 2007년 직항노선 금지 규정 철폐안에 찬성 투표함).

 

이번 공화당 경선 과정에서 매케인은 보다 엄격한 정치자금 규제라는 자신의 지론이 공화당에서 호응을 얻지 못하자, 정치에 관여하는 부패한 금력에 대한 공세를 더 이상 내세우진 않고 있다. 작년 상원에서 로비윤리를 정밀 검토하는 과정에서도 매케인은 전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키팅부패 5인방 사건 연루

 

매케인은 다른 정치인들과 마찬가지로 부와 권력을 좇는 것으로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월남전 참전용사인 그는 1980년 애리조나 맥주회사 상속녀인 신디 헨즐리와 재혼한 후 재빨리 상하원 의원 출마지역을 물색했다.

 

당시 키팅은 피닉스 출신 재벌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인 키팅은 매케인 정치입문 초창기 후원자이자 친구였다. 매케인이 4년간 하원의원으로 있는 동안 키팅과 가족 및 키팅의 회사들은 매케인에게 거액을 기부하였다.

 

그런데 금융업자가 정치자금을 대는 건 당시에도 의원윤리규정 위반이었다. 키팅과 매케인은 바하마 휴양지 등을 함께 다니기도 했다. 매케인이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1986년 부인은 키팅과 함께 애리조나 쇼핑몰에 공동투자했다.

 

키팅은 링컨금융사를 인수하여 리스크가 큰 부동산 등의 투자에 연방은행이 보증하는 대출을 사용하였다. 이를 위해 매케인 등에게 압력을 가하여 연방은행 규제를 철회하도록 만들었다. 여러 해 동안 매케인은 여기에 동조하였다.

 

매케인은 키팅의 측근이 연방금융규제위원으로 선정되도록 여러 차례 서한을 써보냈다. 그러나 1987년 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매케인은 문제의 5명 의원들이 연방규제당국에 대해 규제를 완화하도록 촉구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사적인 회의에 참석하였다.

 

나중에 이 회의 참석에 대해 후회 막급해 하기는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링컨금융사는 1989년 파산하고 5명의 의원들은 치욕을 감수해야 했다. 키팅은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5명중 3명의 상원의원은 정치생명이 끝장났고, 매케인은 상원윤리위 측의‘부실조사와 부실재판’ 덕분에 견책 징계에 그치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선될 수 있었다.

 

지금도 당시 금융규제당국자들은 매케인이 그때 너무 가벼운 처벌을 받는데 그쳤다고 보고 있다. 그들은 메케인의 부인의 키팅 측 투자는 남편의 이해관계 충돌 회피규정을 어긴 것이었다는 지적하고 있다.

 

매케인은 2002년, “난 매수되는 사람이 전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젊어서부터 매수 당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키팅사건 연루는 내 일생 일대 치욕”이라고 쓴 바 있다. 그래서 워싱턴 정치를 깨끗하게 하는 일에 정열을 불태워 왔다.

 

정치자금 개혁운동

 

1994년 상원에서 공화당이 다수당이 된 후, 매케인은 부패사건 연루경험을 바탕으로 부패자금을 금지하기 위한 법제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그는 각종 지출법안에 대해 의원들이 익명으로 슬쩍 끼워 넣곤 하는 군소사업비 예산 등을 공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러니 그는 재빨리 가장 악명 높은 정치자금 모금 이슈로 전환하였다.

 

매케인의 정치자금 규제론은 보수파로부터 언론의 자유를 유린하는 것이라며 줄곧 반감을 불러일으켜 왔으며, 많은 상원의원들은 매케인이 자신이 연루되었던 키팅부패 5인방 사건 때문에 자신들에게 설교조로 나온다며 적대감을 표시하였다. 해당 의안 토론회에서 공화당 상원 지도자들은 매케인이 말하는 부패한 상원의원이란 매케인 밖에 없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2000년 대선에서 조지 부시 후보는 매케인에 대해 매캐인이 직전 상원상업위원장 당시 이해관계가 있는 회사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모금한다며, 매케인에 대해 정직한 척하는‘이중적 모습’이라고 비난하였다. 당시 매케인 선거본부 측은 워싱턴 윌라드 호텔에서 수십 명의 로비스트들을 초청하여 모금행사를 가진 바 있다.

 

하지만 행사장 바깥에서는 부시후보 지지자들이 이를 항의하며 조롱하는 시위를 벌였다. 매케인 측은 로비스트들에게 ‘메케인은 우리 법안들에 대해 반대투표하였다’는 유인물들을 나눠주었으며, 매케인 자신은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비겁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소프트머니 금지와 매케인의 자기모순

 

2002년 매케인은 소프트머니를 금지한 매케인-페인골드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한다. 소프트머니란 그 이전의 법규에서 보면, 공화 민주 양당의 돈줄로 되어 있던 주식회사, 노조 등이 액수 상한 제약 없이 기부하던 돈을 가리킨다.

 

하지만 메케인은 자기모순을 범하였다. 2001년 비영리 시민단체인 ‘개혁연구소’가 뜻을 함께 하는 것을 보고 매케인은 대표직을 수락하였다. 이 단체는 매케인이 속해 있는 상원상무위원회에 로비를 담당하는 회사측으로부터 수백 만 달러를 기부 받았다. 매케인은 문제가 없다고 버티다가 2005년 비로소 여론이 좋지 않다며 이 단체와 결별하게 된다.

 

이번 대선을 치르는 데에도 다른 후보처럼 로비스트에 의존하였다. 선거대책위원 릭 데이비스가 대표적이다. 데이비스는 매케인의 상원 소속 위원회에 로비를 담당하는 회사 대표이다. 그리고 최근 몇 주 전 매케인은 상원의원직 수행을 위해 로비스트인 마크 뷰즈를 고용하였다. 뷰즈는 매케인의 상원위원회 직원을 7년간 부하로 둔 적이 있으며 2001년 그만 두고 텔레콤 회사 로비를 맡은 인물이다.

 

매케인 선거본부 우려

 

매케인은 사적 우정과 공적인 업무를 구별한다고 하지만 아이스만의 경우는 그와 정면 배치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 아이스만의 고객인 텔레콤 업계는 수십 만 달러를 매케인에게 기부하였다.

 

매케인 측은 아이스만이 단지 친구일 뿐이었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1999년 아이스만은 매우 빈번하게 매케인 사무실과 각종 행사에 드나들었다. 당시 한 직원은 왜 시도 때도 없이 매케인 옆엔 늘상 아이스만이 있어야 하는가 의아했다고 밝혔다.

 

그해 2월 둘은 마이애미 크루즈 선박회사 측의 조그만 정치자금 만찬 모금 행사에 참석한 다음,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때 아이스만의 고객인 팩슨 커뮤니케이션즈 회사 항공기를 이용했다. 당시 선거본부는 매케인 측근들에게 두 사람이 로맨스에 빠져 뜯어말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가 되었으니, 공개행사장마다 매케인과 아이스만을 떼어놓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려두었다.

 

당시 선거본부 측은 매케인에 대해서는 선거와 정치생명을 망칠 것이라며 경고하기도 했다. 매케인은 당시 자기 처신이 부적절한 점을 인정하고 아이스만과 거리를 두겠다고 약속하였다. 측근들은 매케인에게 환멸을 느꼈으며 다른 사람들까지도 둘 사이에 대해 눈치 채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스만과 위버의 담판

 

 

매케인의 최측근 위버는 당시 워싱턴 유니온역에서 아이스만을 만나 매케인과 헤어지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뉴욕타임즈>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당시 선거대책회의 결론에 따라 그녀를 만났다고 밝혔다. 당시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한 특수 이익집단보다 국익을 우선해야 한다는 담론이 제기된 선거상황에서 아이스만 문제의 돌출은, 매케인의 입지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위버는 자세히 밝히길 거부했지만 당시 아이스만이 주변 사람들에게 매케인과 사귄다고 떠들었으며, 이를 들은 친구들이 선거본부에 알려왔다고 한다. 당시 이 문제에 대한 경고조치들이 어떻게 실행되었는가는 분명하진 않으나, 선거가 뜨거워지면서 이 문제도 사라졌다. 아이스만은 당시 위버와 만난 건 인정하면서도 위버의 설명에는 반박하였다.

 

아이스만은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자신은 위버에게서 자신이 매케인과의 관계를 친구들에게 ‘말하거나’ 그들이 그 사실을 매케인에게 ‘알려주거나’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며, 당시 매케인 측으로부터 어떠한 특별 처우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매케인, 뉴욕타임즈 인터뷰 거절

 

매케인은 <뉴욕타임즈> 심층취재 내용에 대한 불만을 접수하는 빌 켈러 편집 상무에게, 둘은 로맨스에 빠졌던 건 아니었으며, 아이스만이나 그녀의 고객에게 결코 매수되지 않았고 공익을 저버린 적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였다. 

 

매케인은 작년 12월부터 <뉴욕타임즈> 측의 거듭된 정식 인터뷰를 거부해오고 있다. 매케인 선거본부 측은 과거 매케인 측근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아이스만 문제를 논의한 적이 없으며, 매케인과 아이스만 둘은 직업적인 관계였을 따름이라고 주장하였다.

 

매케인 선거본부 측은 매케인이 오히려 아이스만과 그녀의 고객 측의 요청을 자주 거부했다고 주장하였다. 예컨대 케이블 방송 패키지 영업 허용방안을 거부했으며, 매케인은 역시 아이스만의 고객들이 반대하는 지역 TV 프로그램의 위성방송 허용방안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원칙대로 의정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연방통신위원회 로비 공방

 

매케인이 1998년과 1999년 연방통신위원회 측에 한 도시에서 두 개의 TV 방송을 허용하도록 하는 규제완화 서한을 보낸 바 있다. 이는 아이스만의 고객사인 글렌케언사 측의 핵심 요구사항이었다. 매케인은 방송사 소액주주에 대한 세금감면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이 역시 아이스만의 여러 고객들이 요구하는 사항이었다. 매케인은 한 회사가 시장이 중복되는 두 개의 TV 방송국을 장악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두 차례나 제출하려 했다. 이 역시 팩슨 측에게 중요한 요구사항이었다.

 

1999년 말 아이스만은 매캐인 사무실 직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팩슨사(지금의 아이온 미디어 네트워크사)의 요구사항을 들어달라고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당시 팩슨은 연방통신위원회가 동의해주지 않는데 대해 안절부절 하였다. 아이스만은 <뉴욕타임즈>에 보낸 이메일에서 신속처리를 요청하는 서한을 매케인 직원에게 보낸 사실은 시인하였다.

 

매케인은 아이스만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즉 그는 연방통신위원회에 두 차례 서한을 보냈다. 이로 인해 연방통신위원회 위원장은 이례적으로 이의를 제기하였다. 당시 선거가 당혹스럽게 돌아가자 언론은 다시 키팅부패사건을 들먹이고 있었다. 당시 매케인 측은 모든 서신들을 연방통신위원회 측에게 공개함으로써 매수 당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팩슨측 항공기를 네차례 이용한 것도 해명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항공기에 매케인과 아이스만과 동승한 점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은 문제점이 있었다. 매케인 측은 항공기 탑승문제에 대해서는 공개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의원윤리 담당자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하고 있다.

 

매케인은 팩슨건에 대해 공무원들이 너무 느리게 진행하는 문제점에 대해서만 이의를 제기했었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 수요일 밤 매케인 선거본부 측은 뉴욕타임즈 측이 치고 빠지기 식의 야비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며 반박성명을 발표하였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매캐인은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부부가 함께 CNN 등 카메라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뉴욕타임즈>의 보도내용을 반박하였다. 지금 미국의 신문과 방송은 이 문제를 연일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문성호 / 힌국자치경찰연구소장


태그:#미국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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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호 기자는 성균관대 정치학박사로서, 전국대학강사노조 사무처장, 국회 경찰정책 보좌관, 한국경찰발전연구학회 초대회장, 런던정치경제대학 법학과 연구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경찰정치학>, <경찰도 파업할 수 있다>, <경찰대학 무엇이 문제인가?>, <삼과 사람> 상하권, <옴부즈맨과 인권> 상하권 등의 저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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