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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 아주머니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꽤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21일) 헌혈을 했습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헌혈이었습니다. 사실 헌혈을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한동안 블로거들 사이에서 헌혈과 관련한 논쟁이 오갔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적십사의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고치 위해서 헌혈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과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하지만 당장 피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적십자 모습이 못 마땅하다 하더라도 헌혈을 꼭 해야 한다는 논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적십자사에 압력을 가하자는 얘기가 그리 탐탁치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피가 많이 모자른 상황이라 해서 무턱대고 헌혈하는 대열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잊을 만하면 언론에서 보도되는 적십자사의 바람직하지 못했던 모습들 말입니다. 특히 지난 해 10월 말 언론에서 보도했던 '적십자 검사오류 알고도 혈액유통·은폐' 등에 관한 보도를 보면서 그야말로 경악했습니다.

그 외에도 적십자에서 피가 부족하다며 헌혈해달라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그 아래 적십자에 관한 수많은 불만을 털어놓은 누리꾼들의 이야기를 살피다 보면 ‘내가 과연 헌혈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곤 했습니다.

헌혈을 결심하다

헌혈증서
▲ 헌혈증서 헌혈증서
ⓒ 양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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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으로 어이없게도 이런 제 고민은 엉뚱한 방향으로 풀렸습니다.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날 서점에 갔습니다. 필요한 책들을 미리 사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 권을 사고 싶었지만 한 권 한 권 가격이 꽤 비싸 결국 두 권 밖에 구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서점 밖으로 나오는 순간 제 눈길을 확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영화 티켓· 문화상품권 지급'

책을 한 권 더 사야 했는데 제가 처음 갔던 서점에서는 ‘품절’되었다고 해 다른 서점으로 가려던 길이었습니다. 사실 더 사려고 했던 책은 살까 말까 조금 고민하고 있던 순간이었습니다. 도서 구입비가 예상보다 많이 든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문화상품권 지급’이라는 글자를 보니 제가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 문구를 들고 계신 분 옷차림을 보니 헌혈의 집에서 나오신 분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성큼성큼 다가가 바로 물어보았습니다.

“헌혈하면 문화 상품권 줘요?”
“예. 아, 예.”

그 아주머니는 처음에는 헌혈이라는 소리에 좋아하시다가 문화 상품권 주냐는 물음에 다소 떨떠름한 표정과 목소리로 바뀌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물어놓고도 다소 민망하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문화 상품권을 주지 않는다면 헌혈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화상품권을 위해 헌혈을 한다는 생각, 분명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닐테니 그 아주머니 반응에 제가 다소 민망할 수 밖에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민망함도 잠시 헌혈을 하면 문화상품권을 준다는 말을 들으니 마치 로또에 맞은 것 같았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뒤 편에 있는 헌혈의 집에 올라가 헌혈을 했습니다.

'적십자사 직원들이 불친절하다'는 누리꾼들의 글을 많이 봐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제가 간 곳 직원들은 모두 친절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주사기를 앞에 두니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왜 요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의학 드라마 <뉴하트>에서 보면 인턴인 의사가 선배 의사에게 피 뽑는 연습을 하는 장면이 있지 않습니까. 그 때 그 선배 의사가 아파하는 표정을 생각하니, 아 정말 저절로 울음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저기요,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피를 뽑는 분이

“저는 늘 아프지 않게 해드리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주사를 맞는데 어떻게 안 아플 수가 있겠어요?”

라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아프지 않게 해준다’고만 말하셔도 될 것을 ‘어떻게 안 아플 수가 있냐’고 말하시니 더욱더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드디어 주사를 꼽는 순간이 왔습니다 .

“으윽.”

생각보다 따가웠습니다.

“아팠어요? 안 아프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다시 생글생글 웃는 분께 <뉴 하트>의 그 선배 의사가 인턴에게 이를 꾹 깨물고 웃어주는 것처럼 저 역시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전해드렸습니다. 그 후에는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날 때쯤이 되자 주사를 놓아주신 분이 다시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3000원짜리 헌혈

“영화 티켓 드릴까요? 문화 상품권 드릴까요?”
“문화상품권이요!”

드디어 제가 그토록 받고 싶었던 문화상품권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봉투에 든 문화 상품권을 꺼내 보는 순간 ‘3000’이라는 숫자가 저를 강렬히 잡아 당겼습니다.

“3000?”

3000이라는 숫자를 보고 나서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3000원짜리 문화 상품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저기요, 이거 혹시 3000원짜리인가요?”
“예.”

이번에도 생글생글 웃으시며 대답하는 저 아리따운 여성분을 보니 갑자기 아까 맞았던 주사의 아픔으로 인해 생겼던 분노 수치가 상승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분도 그것을 살짝 느끼셨는지 친절히 보완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양중모님께서 하신 헌혈은 00헌혈이라서 5000원짜리가 아니고 3000원짜리 문화상품권을 드린 것입니다.”(3000원짜리 문화 상품권이라는 말에 온 정신이 집중되어 무슨 헌혈을 했다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못 들었습니다. 그래서 00 헌혈이라고 처리했습니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진작 말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아니, 저는 왜 그러면 3000원짜리 헌혈을 한 거죠?”

분명 처음에는 중국으로 가기 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헌혈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는데, 정작 헌혈을 하는 순간에는 내 피에 돈을 매기고 있었습니다.

“말라리아 위험 지역에 계신 분이라서요.”

말라리아, 군대에서도 걸리지 않았던 말라리아인데 단지 말라리아 위험 지역에서 거주했다는 이유로 내가 원했던 헌혈을 할 수 없다니! 짜증이 파도처럼 밀려왔으나 안전한 혈액 공급을 위해서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 맞았으니 제 앞에 놓인 문화상품권만 보고 가슴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헌혈 후 멍든 팔뚝
▲ 헌혈 후 멍든 팔뚝 헌혈 후 멍든 팔뚝
ⓒ 양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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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이 끝나고 나서 과자를 먹고 녹차 한 잔을 마시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몇 십분 동안 헌혈을 한 후 제게 생긴 것은 헌혈증서 한 장, 과자 몇 개, 녹차 한 잔, 문화상품권 3000원권 그리고 주사 자국으로 시퍼렇게 멍든 팔뚝 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고작 3000원짜리 문화 상품권을 준다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게 이득이 없고서는 남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줄줄 모르는 의외로 사악한 마음을 지닌 저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몇 번이고 주사 자국으로 시퍼렇게 멍든 팔뚝을 바라봅니다. 만약 제가 3000원짜리 문화 상품권과 제 피를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정말 3000원 정도의 값어치가 있는 일을 한 것이고, 만약 지금 절실하게 피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헌혈을 했던 것이라면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일을 하게 된 것이겠죠?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한국에 다시 돌아가게 되면 그 때는 그런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일을 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기억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헌혈을 하고 계신가요?


태그:#헌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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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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