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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에서 아이들이 웃는다.
▲ '돈화문' 앞의 아이들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에서 아이들이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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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버스를 타고 스치듯 지나쳤던, 꽤 오래 전 기억의 상(象)이 안개처럼 희미하게 다가온다. 창가에 앉아, 길가 도로 옆에 담을 두르고 서 있던 돈화문, 아니 창덕궁을 별 관심 없는 시선으로 스쳐 보내며 멋모를 어린시절 나와의 인연이 아닌 것처럼 흘려버린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마지막 잔 추위를 뿌리는 2월의 바람과 냉기를 오늘(25일) 새로이 맞으며 돈화문 앞에 가라앉듯이 내리 깔린 월대와 기단위에, 과거 일제의 몰상식적인 변형과 파괴의 흔적 위에, 긁히는 가슴으로 섰다.

멀찌감치 뒤로 물러나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과 인사를 하고서, 담장 위를 넘어 하늘을 향해 체면과 구속을 털어버리려 자유로움을 발산하고 있는 정승목 ‘회화나무’(훼나무) 몇 그루를 바라본다. 아~~ 하늘이 스산하다. 여느 궁궐과는 사뭇 다른 감정으로 입궐에 대한 느낌이 내게 다가온다.

창덕궁의 서쪽으로 흐르는 비단같이 흐르는 내 - '금천교'의 북쪽을 지키며 수호하고 있는 돌거북상의 모습
▲ 금천교를 지키는 돌거북 창덕궁의 서쪽으로 흐르는 비단같이 흐르는 내 - '금천교'의 북쪽을 지키며 수호하고 있는 돌거북상의 모습
ⓒ 이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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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석조물인 ‘금천교’를 밟고 서 난간에 손을 짚어 아래를 보니 아쉽게도 ‘비단 같은 냇물’은 휑하니 말라 바닥이 건조하다. 궁을 지키고 “마(魔)”를 물리치려 수백 년 같은 자리에 한결같이 버티고 앉아 ‘고독한 불침번’을 서고 있는 거북형상(?)과 해태형상(?)의 충성스런 헌신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

다리를 건너 실질적으로 궁궐의 안으로 진입했음을 실감하며, 수더분하게 지키고 선 ‘진선문’을 지났다. 앞에 펼쳐진 은은하고 절제된 왕의 길(어도)이 좌우의 협도를 통해 보위 받으며 비례를 맞추어 날카롭지 않은 직선으로 시원스레 나타난다. 어도를 밟고 중간쯤 걸어가니 왼쪽에 신하와 사신을 맞는 것 같은, 예의바른 모습의 정전 출입문 ‘인정문’이 조용히 서 있다. '어서들 오시지요!'하고 반기는 듯한 환영이다.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
▲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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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인정문의 턱을 넘어서는 순간 갑자기 다가오는 위엄과 절제, 세련의 모습. 우아한 정전 ‘인정전’이다. 은은한 조화와 깊이 있는 격조의 한국적 미를 무겁지 않지만, 가볍지 않은 자태로 표정 짓고 있다. 마치 곱게 단장하여 자애와 인자함으로 미소 짓고 있는 ‘중전마마의 단아함’ 같은 참으로 경외스런 느낌이 아닐 수 없다.

널찍하고 네모 반뜻하게 다듬어져 인정전의 앞마당을 깔아 덮고 있는 까칠한 표면의 박석들, 그리고 그 위에 벼슬의 위계와 관직서열을 의미하는 품계석의 질서 있는 도열을 보니 마치 시대를 거슬러 조선시대의 한 중앙에, 그것도 조정의 신하들과 궁인들이 줄지어선 곳에서 임금이 주재하는 조회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고 서 있는 듯하다. 그 엄숙함과 순간의 긴장감이 으스스하지만 신비롭게 잠시 지나쳐 가 생경스럽다.

창덕궁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로 지붕을 초록 단장하고 있는 '선정전' 다른 건물들과도 별로 조화롭지 못한 것 같고, 어딘지 모르게 튀어보이는 느낌이다.
▲ 선정전 청기와 지붕 창덕궁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로 지붕을 초록 단장하고 있는 '선정전' 다른 건물들과도 별로 조화롭지 못한 것 같고, 어딘지 모르게 튀어보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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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문으로 조각된 계단으로 오르는 곳 중앙에는 임금님만 밟고 오를 수 있다는 ‘답도’가 있다.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흐릿하게 무뎌진 봉황을 돋을새김 한 네모진 석조물은 지나간 시절 임금님의 자취를 회상하게 만들고 있다. 2층의 팔작지붕으로 지어진 인정전의 날렵한 네 귀 추녀마루의 솟아 오를듯한 비상의 날갯짓은 그야말로 감탄, 감탄스러울 뿐이다.

추녀마루에 서있는 듯, 앉아있는 듯 나래비 서서 각각 사방으로 시선을 나누어 잡귀의 범접을 불허하고, 화마, 수마, 병마 등을 막아내고 있는 ‘잡상’들은 어찌 보면 귀엽고(?) 기특한 모습이다(그 상징적 의미는 별도로 하고). 이것이 아마도 지나친 엄숙함과 절제된 근엄함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정전의 장중한 권위를 조금은 친근하고 발랄한(?) 느낌으로 조화시켜주는 장식용 소품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회색빛으로 덧발라 놓은 용마루의 시멘트 질감은 복원의 어려움을 십분 이해하더라도 정말 부조화스럽기 짝이 없다. 더욱이 조선을 ‘이조, 이씨조선’으로 격하시키고자 하는 간교한 의도로 용마루에 박혀있는 ‘오얏꽃’ 문양의 구리 장식은 우리 역사의 정통성과 독립된 나라로써의 자존감을 훼손하는 흉물스러운 아픔이다.

정전의 최고봉, 국가나 왕의 권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높은 곳의 용마루에 박혀 우리의 역사의식을 조롱하듯 비웃고 있는 일제의 흔적이 치욕스럽고,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채 곳곳에 남아있는 친일의 잔영을 방치하고 있는 이 나라 백성들의 무능과 무기력이 한탄스러울 따름이다.

'선평문' 열린 사이로 중전의 침전인 '대조전'의 편액과 용마루 없는 지붕이 보인다.
▲ 대조전 '선평문' 열린 사이로 중전의 침전인 '대조전'의 편액과 용마루 없는 지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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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한 후궁이나 왕의 할머니 등이 기거하며 생활했다고 하는 '낙선재'의 모습 - 단청도 칠하지 않고 조금은 초라하고 옹색하게 보인다.
▲ 낙선제 퇴임한 후궁이나 왕의 할머니 등이 기거하며 생활했다고 하는 '낙선재'의 모습 - 단청도 칠하지 않고 조금은 초라하고 옹색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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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 안쪽 내부 공간으로 시선을 몰아 오래전 임금이 앉았던 용상을 보고 있노라니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세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워 진다”는 말의 의미가 침침하고 탁한 무채색감의 느낌과 함께 실망으로 마루바닥에 떨어진다.

단 위에 용상이 놓여있다. 하지만 어쩐지 밖에서 인정전을 바라볼 때 느꼈던, 엄숙한 권위와 절제된 ‘정숙미’보단 애처로움이 섬칫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무엇인가 편안하게 어울려 보이지 않는 너절한 서양식(일본식) 전등과 커튼, 샹들리에, 그리고 서양식 실내장식과 가구들의 억지스런 부조화가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다스리는 공간인 인정전의 단을 내려와 오른쪽 회랑 옆구리에 난 작은 문을 지나 주무시는 공간인 내전으로 들어서게 되고, 마치 시골 다방 중년마담의 번쩍거리는 입술 루즈처럼 다소 경박스러워 보이는 궐내 유일한 청기와 지붕 건물 ‘선정전’과의 어색한 만남을 하게 된다. 그러나 왠지 모를 선정전의 선정적인(?) 화장발의 지붕 얼굴색은 입궐하여 지금까지 천천히 걸어 밟아오며 가슴속에 차곡차곡 담아 챙겨왔던 우리 궁궐의 은은한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을 퇴색하게 만드는 듯하다.

얼어붙은 연못 '애련지'와 그 한 귀퉁이 '애련정'의 모습이 외롭고 고독하게 보인다.
▲ 애련지와 애련정 얼어붙은 연못 '애련지'와 그 한 귀퉁이 '애련정'의 모습이 외롭고 고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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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전의 남쪽을 보니 저 만치에 자그마한 규모로 자리 잡은 ‘어차고’가 눈에 들어온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건물 내부에는 일제 강점기에 임금이 타고 다니던 가마, 마차, 자동차 따위가 어느 고수집상의 보관창고처럼 보이는 쇼윈도(?)안에서 옹색한 행색을 하고 앉아있다. 영국제 다임러, 미제 캐딜락 자동차 그리고 주정소와 키가 높은 가마들….

고위 관원들이 궁궐에 들어왔을 때 사용하던 공간으로 격이 높았던 ‘빈청’을 전시장 같은 어차고(임금님의 차고)로 만든 일제시기의 간교한 잔재를 생각해 본다. 조선 궁궐과 정치문화를 능멸하고 부정하려는 치밀한 계산이 깔린 그 곳을 아직도 ‘어차고’라고 설명하고 있다니. 안내판에는 여전히 일제시대가 연장되고 있는 것인가?

‘어차고’와 ‘선정전’, ‘희정당’의 가운데 공간에 조성된 궁궐의 나무와 조경을 바라보며 크게 숨을 한 번 내쉬니 한 결 상쾌해진다. 다시 발길을 돌려 선정전 근처로 향하며 오른쪽에 자리한 임금의 접견공간인 ‘희정당’의 전면을 접하게 된다.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의 위엄있는 단아한 자태를 바라보니 아~!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 아~! "인정전"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의 위엄있는 단아한 자태를 바라보니 아~! 감동의 물결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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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연못 부용지의 '부용정'에서 마치 왕이 되어 깊은 사색을 하는 듯한 순간의 착각을 느꼈다.
▲ 부용정 얼어붙은 연못 부용지의 '부용정'에서 마치 왕이 되어 깊은 사색을 하는 듯한 순간의 착각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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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형태의 건물전면 중앙에 누각처럼 돌출되어 기다랗고 늘씬한 다리를 세워 자동차의 진입과 정차를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 편의적 개량이자 훼손을 목도하니 그 또한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선정전과 희정당의 사잇길로 접어들어 희정당의 안쪽 공간으로 향하는 길의 왼편에서 기가 막히게 구성되어 기하학적 문양과 형식으로 ‘나를 우습게 깔보지 말라’고 하듯이 꽃담과 선정전 지붕 측면의 절묘한 조화를 커다란 캔버스처럼 펼쳐놓은 장면은 일품이었다.

‘희정당’의 안쪽으로 접어들어 그 내부를 살펴보니 부옇게 먼지가 앉고 색이 바랜 응접용 가구가 중앙에 가지런히 놓여있다. 역시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전등과 샹들리에 그리고 썰렁함이 덩그러니 자리 잡고 있는 이곳은 1920년경 경복궁의 ‘강녕전’을 헐어다가 그 자재를 써서 복원하여 지었다 하는데, 응접용 의자에 앉아 한 숨 짓고 있는 구한말 임금의 무력한 모습이 아련하게 떠오르는 듯하다.

희정당 북쪽의 가파른 계단위에 있는 ‘선평문’을 들어서니 왕비의 침소이자 공식적인 활동 공간인 ‘대조전’이다. 그런데, 희정당과 대조전 사이의 공간이 너무나 협소하고 좁아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정면 9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으로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평지붕이다. 용마루가 없는 이유는 용이 임금을 상징하므로 임금(용)과 용마루가 같이 있음은 두 마리의 용이 다투게 되는 의미가 있어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 한다. 대조전의 정면 왼편에는 왕비의 침소가 오른편에는 임금의 침소가 구별되어 있는데, 함께 간 딸아이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부부(왕과 왕비)의 침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해 하고, 그렇지만 당시 궁궐에 있는 모든 여인네는 왕의 여자였음을 설명하니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힐끗 쳐다본다.

금천교를 지나 첫번째로 들어서게 되는 '진선문'
▲ 진선문 금천교를 지나 첫번째로 들어서게 되는 '진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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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전의 서쪽으로 돌아 나오다 보니 내부의 벽면을 타일로 마감한 건물이 나오는데, 이 곳이 바로 대장금의 추억이 아직도 진한 ‘수라간’이다. 아궁이에서 올라오는 불의 그을음을 닦아내기 위한 위생적인 고려와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타일벽면을 택한 모양이다. 똑똑하고 야무지며 예쁘게 생긴 ‘생각시’ 장금이가 잠시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지었다는, 사방이 답답하게 가록 막혀 있는 느낌은 주는 대조전은 한편으로 왕비의 고독과 외로움을 떠 올리게 한다. 대조전 안에 그려진 대표적 친일화가 이당-‘김은호’의 ‘군학도’는 바로잡지 못한 친일잔재의 부끄러운 흔적으로 아직도 버티고 있다.

대조전 뒤 서북쪽으로 돌아 나오니 ‘경훈각’으로 이어지고 임금님의 ‘화장실’이라 할 수 있는 아궁이 같은 공간이 보인다. 이곳에서 임금님의 똥 매우(매화)를 통해 건강을 점검하고 챙기려 했다니 보장되지 않는 임금님의 사생활이 불쌍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변비에 걸리셨다면(?) 끔찍한 일이 아닌가? 실없는 웃음이 바람으로 피식 빠진다.

주무실 때도 정사각형의 침소에 누워 사방에서 24시간 불철주야 교대로 침소를 지키는 상궁들의 감시 아닌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 했을 임금님의 스트레스는 가히 수명을 단축시키는 요인이 아니었을까? 임금에게는 인간답게 살 권리(인권)도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국가 인권위원회’에 그 유권해석을 의뢰하는 짓은 넌센스 코미디일 테지….

이 문을 지나가면 오래도록 늙지 않는다고 하는데,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오래 살고싶은 마음은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인가 보다.
▲ 불로문 이 문을 지나가면 오래도록 늙지 않는다고 하는데,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오래 살고싶은 마음은 인간들의 간절한 소망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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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당 동남쪽의 ‘성정각’을 지나쳐 후원으로 넘어가는 시멘트 길을 따라 오르려니 언덕의 양 옆에 가지와 가지가 서로 맞붙어 연결되어 자라는 ‘연리지’ 나무가 있었다. 그야말로 자연의 지형을 원형대로 살린 평화로운 숲이다. 조금은 헐떡이는 숨을 달래고서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부용지와 부용정 그리고 건너편의 어수문과 주합루(규장각)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정적에 휩싸인 듯한 고요가 깔려있다. 규모에 비해 그 지붕이 화려하고 무게감이 듬뿍 느껴지는 부용정은 두 다리를 부용지 연못에 담그고 고고한 풍류를 즐기고 있는 듯하다. 부용지와 어수문 그리고 주합루를 관통하는 일맥은 연못의 한 가운데 둥글게 놓인 섬과 함께 작은 우주를 이루고 있으면서 사색과 휴식을 위한 철학적 명상의 공간을 만들어 놓고 있는 모양이다.

조금씩 몸의 피곤이 밀려오는 육체의 허실이 싫다. 그렇지만 얼마 남지 않은 오늘의 궁궐여행을 끝까지 야무지게 마무리하고 싶다. 북동쪽으로 걸어 내려가다 보니 돌을 깎아서 만든 ‘불로문’이 작은 입구를 열어놓고 들어오라는 듯하다. 모처럼 따뜻한 햇볕을 여유롭게 안는다. 돌을 다듬어 사각 막대처럼 네모난 문을 만들어 놓은 오래전 석공의 노력이 베어 있는 느낌이다. 이 문을 통과하면 늙지 않는다는 ‘설’ 이 있다고 하는데, 오래 전이나 지금이나 왜 인간은 이다지도 늙지도 죽지도 않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생로병사의 자연적 순환을 거역하려고 하는지. 나 역시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미련을 못 버리고 주술적(?) 상징으로라도 위로받고 싶은 것이 인간의 약한 마음이란 말인가?

낙엽이 물위에 그림처럼 깔려있는 작은 못 ‘애련지’와 그 옆의 ‘애련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어쩐지 마음이 맑아지는 것 같다. 주위를 평화롭게 감싸고 보위하는 듯이 갈참나무 무리가 진경산수의 병풍처럼 조용하게 서서 나를 바라본다. 어디선가 몇 번은 들어본 것 같은 이름모를 궁궐의 새가 암수(?)의 짝으로 날아와 애련(愛蓮)-‘연꽃을 사랑한다’는 뜻을 아는 것처럼 노래하며 지저귀고 있다. 북쪽에 임금의 민가체험 마을인 ‘연경당’과 그 부속 전각들이 뒤편의 낮은 산을 든든히 배경삼아 멀찍이 품안에 안겨 쉬고 있는 모습이 친근하다.

일제는 조선을 이씨조선, 조선의 왕을 이왕 이라 부르며 우리 조선의 역사와 정통성을 폄하하려는 간교한 의도로 오얏꽃 구리장식을 용마루에 박아 놓았다.
▲ '인정문' 용마루 위의 오얏꽃 구리장식 일제는 조선을 이씨조선, 조선의 왕을 이왕 이라 부르며 우리 조선의 역사와 정통성을 폄하하려는 간교한 의도로 오얏꽃 구리장식을 용마루에 박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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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창덕궁의 일명 ‘깔딱 고개’를 넘어 궁궐여행의 막바지를 향해서 걷고 있다. 옛날에는 초가지붕으로 지어져 ‘기우제’ 나 ‘지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했다는 ‘희우정’을 슬쩍 봐주고서, 내리막길로 향하고 있다. 내려오는 길 왼편에 줄지어선 멋진 꽃담의 도열이 마라톤을 힘겹게 완주하고서 결승점을 통과하는 주자를 환영하고 축하해주는 모습처럼 밝고 화사하다. 복원중이라 아직 공개되지 않는다는 ‘선원전’의 바깥 외모만을 짧은 시선으로 흩어보고서 750년 된 천연기념물 향나무가 서 있는 곳을 지나쳐 다시 진선문이 바로 보이는 곳으로 귀환하였으니 이 곳이 오늘 궁궐여행의 종착점이다.

태어나서 창덕궁엔 처음이었다. 어릴 땐 ‘비원’이란 명칭을 사용했었다. 창덕궁이라고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일제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총독부 대신들의 연회장소로 이곳을 이용하고, 일반인들에게도 유원지로 개방했다. 그러면서 조선 중후기 사실상의 ‘법궁’이었던 ‘창덕궁’의 명칭을 ‘비원’으로 왜곡하고, 비하하고, 능멸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비원 한정식, 비원 사진관, 비원 이발소 등으로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업소들이 꽤나 남아있다고 한다. 해방된 지 60년이 넘었건만, 의식은 변하지 않고 아직 일제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인가 보다.

수백 년의 세월을 머금은 조선 왕조의 궁궐 ‘창덕궁’을 여행하며 많은 느낌과 감흥, 때론 치욕과 분노의 역사를 가슴으로 체험한 것은 잊을 수 없는 내 삶의 귀한 경험이자 자산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아름다운 우리 궁궐의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로써의 뛰어난 미학적 의미가 지금의 우리들에게 교훈이 되고, 자랑이 되고,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2월달에 창덕궁 답사 다녀와서 쓴 글입니다.



태그:#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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