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바라보면서는 내 눈을 맑게 씻네 삼정산 자락 마지막 암자인 영원사를 향해간다. 길고 멀다는 뜻을 가진 영원이 아니다. 영묘할 靈(영) 자에 근원 源(원) 자를 써서 영원사다. 이름을 마주 대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절집이다. 그러니까 영원사로 가는 길은 영혼의 본향을 찾아가는 길이다. 길은 아주 평탄하고 편안하다. 영혼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이 이리도 쉬워서 될까. 길 양 옆에 돋아난 산죽들은 제 스스로 단련한 영혼의 깊이를 보여준다. 얼마나 자신을 단련시켜야 저렇게 푸른 몸과 영혼을 가질 수 있을까. 천왕봉으로부터 이어지는 능선들이 비티재까지 동행해준다. 산 골짜기엔 아직 눈이 하얗게 쌓여 있다.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이자 수선사(당시의 송광사) 제2대 사주였던 진각국사 무의자(無衣子) 혜심(1178~1234)은 많은 우리나라 최초의 선시 작가로 꼽힌다. 한때 상무주암에서 수도했으니 이 산길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쓴 선시 '유산(遊山)'은 이 산자락에서 태어났을는지 모른다. 臨溪濯我足(임계탁아족) 시내에 이르러선 내 발을 씻고 看山淸我目(간산청아목) 산을 바라보면서는 내 눈을 맑게 씻네 不夢閑榮辱(불몽한영욕) 한가하게 영욕을 꿈꾸지 않으니 此畏更無求(차외갱무구) 이밖에 다시 구할 것이 없구나 - 진각국사 혜심의 선시 '유산(遊山)' 겨울산은 제 몸을 눈으로 덮는 고행을 통해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씻겨낸다. 눈을 맑게 씻어내고 오래도록 걸쳐 누더기가 된 마음을 홀연히 벗어던지게 한다. 마침내 비티재에 닿는다. 벽소령으로 갈 수 있고, 영원사로도 갈 수 있는 갈림길. 영원사로 가지 말고 그냥 벽소령으로 갈까. 그러나 겨울 산길은 충동만으로는 갈 수 없는 길이다. 여기서부터 영원사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다. 내려가는 길은 슬프다. 많은 것을 등진 채 가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산 능선이 주는 장쾌함도, 그 속에 깃든 암자가 주는 정신적 자양분까지도 모두 내려놓고 가야 한다. 사람들은 노인이 문수보살의 화신일 거라고 믿지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앞에 싸리나무로 엮은 사립문이 나타난다. 사립문을 가만히 밀치고 영원사 경내로 들어간다. '두류선림'이라 쓰인 법당 마당에 서서 지리산 능선과 눈을 맞춘다. 병풍처럼 펼쳐진 산줄기. 벽소령(해발1426m)이 마치 지척인 듯 다가온다. 벽소령에 가고 싶다. 영원사가 터잡은 곳은 해발 920m 높이. 그러니까 여기서 바라보는 내 그리움의 높이는 500m이다. 영원사는 통일신라시대 영원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후 사명대사 등 숱한 고승들이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 영원사가 보관하고 있는 <조실안록>은 고려시대 지눌과 구곡 각운을 비롯해 조선 중기의 부휴, 사명, 청매 스님 등이 이곳의 조실을 지냈다는 걸 알게 해준다. 영원사 경내는 지리산내 분지라 할 만큼 아주 넓다. 그러나 전각이라곤 '두류선림'이라는 편액이 붙은 인법당과 산신각인 산령각밖에 없다. 그리고 서너 채의 요사가 있을 뿐이다. 한때는 너와지붕으로 이은 전각이 100칸이 넘었다고 하는데, 여순사건과 6·25 전란이 휩쓸고 지나면서 가람이 완전히 소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절을 창건한 영원조사의 영원사 창건 설화만은 여전히 파란 이끼를 머금은 채 고색창연한 빛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입산 초짜 시절 영원 스님은 이 영원사 부근에다 토굴을 짓고 수행에 정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인내심의 한계는 8년까지였다. 그때까지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그는 수행처를 옮기려고 길을 나섰다. 터덕터덕 산길을 내려가던 그는 희한한 풍경을 목격한다. 한 노인이 물도 없는 산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고기 낚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노인에게 다가간 영원 스님은 그 까닭을 묻는다. "여기서 8년을 살면서 낚시질을 했는데 2년만 더 있으면 큰 고기가 낚일 것이다"라고 대꾸하더니 노인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 대목에서 영원 스님은 힌트를 얻는다. 그 길로 다시 토굴로 돌아간 영원 스님은 2년을 더 수도한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그 노인이 문수보살의 화신일 거라고 믿고 싶어하는 눈치다. 그러나 문수보살은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서 수시로 현신할 만큼 한가한 분이 아니다. 문수보살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계신다. 그리고 이따금 속삭이듯이 법문을 들려준다. 그걸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소리라고 치부하지만. 나도 오늘 산행이 힘들어서 그만 포기하고 싶어졌던 순간, 잠시 문수보살을 만났었다. "포기하지 말라. 기회는 늘 오지 않는 법이어니"라는 마음 속 소리를. 단 한 번만이라도 울어다오, 풍경이여
영원사에는 법당이 따로 없다. '두류선림'이란 편액을 단 전각이 법당 구실까지 한다. 두류선림은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단청조차 칠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이다. 정면 3칸만 법당이며, 나머지 2칸은 살림 공간으로 쓰고 있다. 두류선림 왼쪽에 있는 맞배지붕 건물은 주지 스님이 거처하는 승방이라고 한다. 전화에 완전히 불타버린 영원사가 이만큼이라도 도량으로서의 모습을 갖춘 것은 대일 스님의 공덕이라고 한다. 1973년부터 불사를 시작해서 오늘의 모습을 이뤘다. 대일 스님은 인곡 스님의 제자라고 하니,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과 법 형제이다. 법당 안에는 한 스님이 좌선 삼매에 들어 있다. 인기척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저 스님의 모습이 없었다면 난 이곳의 어디에서도 절집다운 맛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건물이란 사람이 들어앉아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꿰차고 들어앉은 사람의 격(格)이 건물의 품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두류선원 뒤로 몇 걸음 올라가면 나무들에 둘러싸인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에는 산령각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산신까지 포괄하는 넓은 개념인가? 산령각은 가분수 형 건물이다. 배흘림 기둥 위에 올려진 지붕이 유난히 크게 보인다. 커다란 지붕이 문짝 위에 커다란 그림자를 그려낸다. 그림자야말로 이 전각을 장엄하는 가장 아름다운 장식이다. 문살에 새겨진 국화 무늬가 탐스럽다. 산령각을 내려오면서 두류선원의 뒤태에 시선이 미친다. 마당에선 산 따로, 건물 따로 바라봐야 하지만, 이곳에선 두 사물을 한눈에 볼 수가 있다. 건물과 지리산 줄기가 하나가 돼 있기 때문이다. 산을 자신의 앞태로 끌어들인 두류선림의 풍경이 무척 정갈하고 곱다. 두류선원 처마 아래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을 올려다본다. 풍경이여, 이 영혼이 빈약한 나그네를 위해 단 한 번이라도 울어주면 안 될까. 그러나 풍경은 끝내 대꾸하지 않고 난 하릴없이 발길을 돌린다. 법당 앞으로 와 다시 안을 들여다보니, 아까 그 스님은 여전히 가부좌를 풀지 않고 있다. 풍경이 울지 않은 것은 이 스님의 삼매를 방해하기 싫어서였나. 모든 이념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적만이 홀로 깊은 영원사를 나선다.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오다가 영원사 옛길로 접어든다. 홀로 사색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인 오솔길이다. 길 옆으로는 계곡이 흘러가고 있다. 계곡의 바위들은 고드름을 주렁주렁 달려 있다. 옛날 빨치산들이 몸을 숨긴 비트가 나타난다. 산죽 비트·굴 비트 등. 아마도 산죽 비트는 홀로 몸을 숨길 때 쓰고, 굴 비트는 여럿이 몸을 숨길 때 썼을 것이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산죽 숲은 비트를 만들기엔 너무 엉성해 보인다. 지난 시대의 모든 이념이 깡그리 죄악시되는 탈이념의 시대에 처절한 이념의 공간이었던 빨치산 루트를 걸어가는 기분이 조금 야릇하다. 그래도 모든 이념이 다 부질없는 것은 아니었어. 어떤 이념은 내 삶의 나침반 구실을 하기도 했었으니까. 여정을 끝낼 시간이 다가온다. 양정마을에 다다른 것이다. 벽소령과 형제봉 쪽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마을 앞을 굽이치며 흘러간다. 여름 장마철에 보면 더욱 장관이리라. 이곳에선 어느 곳에 눈길을 주든지 다 절경이다.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 내가 지나온 골짜기를 돌아본다. 무정한 영원사는 봉우리 뒤로 몸을 숨기고 있다. 지리산이여, 잘 있거라. 시간이 나는 대로 다시 오마. 내 그 약속의 증표로 내 빈약한 영혼을 계속 이 산자락에 남겨두고 가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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