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비로 변한다는 우수(雨水)가 지난 지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통이 마비되고 대설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렸다는군요. 겨울도 아쉬운 게 많은지 조금 더 머물다 갈 모양입니다. 입춘(立春)에서 경칩(驚蟄) 사이 한 달은 졸업시즌이자 입학 철이기도 하지요. 졸업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으니, 꿈과 희망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육열이 높은 부모님들에게는 고민이 될 수도 있겠네요. 입학은 등록금 인상으로 졸업은 취직난으로 고민이 많겠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씩은 간직하게 만듭니다. 해서 누가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입학식이나 졸업식을 말하라면, 마음의 고향인 '주일학교'를 떠올리게 됩니다. 당시 주일학교는 입학과 졸업식이 하루 사이로 진행됐습니다. 졸업식이 가까워지면 만국기가 달린 줄을 천정에 쳐놓았고, 색종이로 만든 예쁜 장식과 금박지와 은박지로 만든 크고 작은 별들을 매달아 놓기도 했습니다. 공중에서 반짝거리는 별들을 볼 때마다 하늘나라에 있는 것 같았지요. 네 살 위인 막내 누님과 함께 다녔던 주일학교는, 사랑의 소중함과 친구 간의 우정, 자율의 중요성을 깨우쳐주었던 것 같습니다. 어른들 예배가 끝나고 반별로 옹기종기 모여 선생님에게 듣는 동화는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게 했지요. 짧은 시간이지만 정이 들어서인지 주일학교 졸업 때도 우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매달 음력 초사흘이면 고사를 지내고 해마다 정월이면 독경을 하던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는 것을 말리지 않은 점입니다. 훗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여러 곳에서 복을 받고 싶은 욕심이었느냐”라고 물었더니 빙긋이 웃기만 하시더라고요. 사각모를 쓰고 졸업하는 지금의 유치원은 성장과정의 통과의례로 생각하지만,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던 시절에는 특별한 가정의 자녀가 아니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가난한 동네였으니 학용품과 떡도 나눠주는 따뜻한 주일학교가 인기였지요. 대부분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의자가 아닌 마루에서 예배를 보기 때문에 신발이 바뀌거나 잃어버리는 친구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무신에 구멍을 뚫어 표시하거나 신주머니를 만들어 돈주머니처럼 허리에 차고 다녔지요. 지금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끼니 걱정 없이 사는 집이 드물었던 가난한 동네라서 웃지 못할 일도 일어났습니다. 우유나 옷을 배급할 때면 다툼이 벌어졌고, 술에 취하면 교회 앞에서 고함을 지르는가 하면, 제사도 못 지내게 하냐며 목사님에게 욕하는 아저씨도 계셨거든요.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얼굴들 너무 오래되어 모두를 기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민들레 반’, ‘채송화 반’, ‘봉숭아 반’ 등의 이름과 사범학교 학생이었던 반사 선생님, 그리고 가장 친하게 지냈던 상열이와 성완이는 지금 만나도 금방 알아볼 것 같습니다. 시장 입구의 포목점 아들이었던 상열이와 어머니가 해망동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성완이는 저와 동갑이었는데 학교는 먼저 입학했습니다. 결국, 1년 선배가 되었고, 중학교에 들어가니까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더니 결국 연락이 끊기더군요. 그래도 지금 만나면 반갑게 이름을 부를 것 같습니다. "예비당에 갔드니, 눈감으라 혀노코, 잠자리채 각과서, 돈달라고 허드라" (헌금 걷는 것을 빗대어 한말)라며 놀리는 아이들에게, 교회에 가면 선생님이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고, 연필과 공책, 책받침도 준다며 주일학교를 홍보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나옵니다. 미끄럼틀과 그네가 있던 교회 앞마당은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는데, 축구와 ‘도둑놈 잡기’(술래잡기)를 하며 놀았습니다. 우리 팀의 주장이자 ‘깽바리’(꼬마)대장이었던 운봉이 형은 훗날 청소년 국가대표가 되었고 지금은 미국에서 잘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중학생 시절 이야기인데, 아버지와 교대로 종지기를 했던 금룡이와, 말썽을 자주 피워 목사님을 골치 아프게 했던 원식이 얘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금룡이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예배당 앞에서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해댔는데, 목사님의 전도로 교회 관사에서 살면서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던 금룡이는 아버지 몸이 불편할 때는 청소도 하고 종지기가 되기도 했지요. 금룡이의 아버지 섬김에 하느님도 감동하셨던 모양입니다. 훗날 아버지는 안수집사가 되셨고 금룡이는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입사했거든요. 아마 지금은 정년퇴직하고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면서 조용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겠네요. 앞집에 살던 원식이는 키가 크고 말썽을 자주 피웠는데, 교회 종을 치는 바람에 동네가 떠들썩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원식이가 종을 치자 교인들이 교회로 달려오고 동네 사람들도 어리둥절해했습니다. 원식이 어머니를 찾아와 손목을 잡으며 당부하시던 온화하신 목사님 모습이 떠오르네요.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가 주일학교 부흥기였기 때문에 훗날 한국 교단이 확장될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자녀가 적게는 셋에서 일곱이 넘는 가정도 있던 시절이었으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선물 포대를 둘러맨 산타할아버지가 어떻게 방구들 사이로 드나들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고 주일학교에 다녔던 저는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 인성, 감성 등 어린 시절의 기초교육을 받았던 곳으로 주일학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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