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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어느 카페에서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한다. 사람들이 죽었고 남은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으며 또한 절규했다. 카페의 옆집에 살던 이스라엘 소녀 탈은 이러한 상황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탈은 글을 쓴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있는 친구에게 쓰는 것이 아니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미지의 친구를 향해 쓰는 편지였다. 탈은 편지의 끝에 답장 받을 수 있는 이메일 주소를 남긴다.

 

탈은 군복무를 떠나는 오빠에게 유리병에 넣은 편지를 부탁한다. 오빠는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하지만 탈의 부탁을 못내 들어준다. 그리하여 그 편지는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청년 나임의 손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의 소녀와 팔레스타인의 청년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곳들은 언론에서 자주 나오는 지명이다. 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보복’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자살테러’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횡행하는, 절대적인 증오가 팽배한 곳으로 알려지곤 한다. <가자에 띄운 편지>의 ‘그곳’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르지 않다.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을 싫어한다. 또한 두려워한다. 그들이 언제 공격해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다. 탈과 같은 이스라엘의 시민들은 외출하기가 두렵다. 그들이 언제 공격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이곳에서 탈과 나임은 말과 생각을 주고받는다. 비록 소설일지라도,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탈과 달리, 편지를 받은 나임은 이스라엘에서 온 편지에 한껏 조롱이 담긴 메일을 보낸다. 웬만한 아이였으면 받고 나서 당장 삭제했을지도 모를 내용이다. 하지만 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탈은 계속해서 말을 건다. 답장이 오지 않더라도 메일을 보냈고 마침내 나임의 답장을 받기에 이른다. 비록 그것 또한 한껏 시니컬한 내용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나임이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고 해서 둘의 편지가 쉽게 오고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탈도 그렇지만 나임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임은 PC방에 가서 메일을 읽고 써야 하는데 혹시라도 그 대상이 이스라엘인이라는 것이 걸리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누군가 안다면?, 이라는 두려움을 참아가며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둘은 메일을 쓴다. 답장이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혹시라도 테러를 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해야 하면서도 그 끈을 놓지 않는다. 증오로 얼룩진 곳에서, 복수심이 불타는 곳에서 평화를 이야기하고 우정을 알려주는 감동이 생겨난다. 비록 소설일지라도 ‘기적’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가자에 띄운 편지>는 이러한 감동스러운 순간을 맞이하게 해주는 것이 압권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도 훌륭하다. 학교를 다니면서 연예인을 생각하고 친구와의 우정 때문에 속상해 하고 장래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기에 <가자에 띄운 편지>는 정치적인 색채 없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보여주고 있다. 발레리 제나티가 ‘개인’에 주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생생하게 그렸고 또한 그곳을 침착하게 알려주고 있다. 소설이지만 그것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다. 더군다나 황량한 그곳에서 평화의 빛을 만들어내는 것은 또 어떤가. 실제를 배경으로 했기에 감동의 폭은 상상 이상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있는 <가자에 띄운 편지>, 그 편지의 정다움이 먼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흔들기에 충분하다.


가자에 띄운 편지

발레리 제나티 지음, 이선주 옮김, 낭기열라(2006)


태그:#팔레스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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