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도 몰랐다. 늦깎이 졸업생을 찾긴 했지만 10년 정도 차이를 예상했을 뿐이었다. 처음엔 64학번 졸업생이라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어림짐작해보면 기자의 할아버지 뻘 되는 나이다. 졸업을 앞둔 여느 쌀쌀한 오후, 기다리는 기자가 추울까 일찍부터 도착한 그를 만났다. 그의 얘기를 듣는 내내 그의 열정에 영하의 날씨가 하나도 춥지 않았다. # “2년 남겨두고 졸업하지 못한 게 그렇게 한이 되더라구요” - 그의 재입학 이야기 그는 한양대학교 64학번 입학생이다. 그가 입학할 당시의 법대는 지금의 인문대 위치에 있었다. 그는 아직도 빨간 벽돌로 지어진 당시 예술관을 기억한다. 그땐 법학과가 아니라 법학과ㆍ정치외교학과ㆍ행정학과가 함께 있는 법정대학이었단다. 그가 학교를 그만 둔 건 군대를 가고 난 후 결혼을 하면서다. 7남매 중 맏이인 그는 부모님과 동생, 이젠 새 식구까지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게 됐다. 더 이상 학업에 매진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가정을 위해 법학도의 꿈을 접고 교직이수를 해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그 후 73년부터 2005년까지 교직에 매진했다. 그러나 배움의 꿈을 중단할 수 없었다. 그는 학교 재입학을 ‘다시 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일’이라고 얘기한다. 중간에 건국대 야간 법학과를 졸업하기도 했지만 2년을 앞두고 본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은 한이 됐다. 결국 2005년 재입학을 결심했다. 예전에도 재입학을 문의했었지만 거절당한 경험이 있다. 이번에도 재입학 절차는 순탄치 않았다. 까다로운 심사와 규정을 통과하는데 1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1년 뒤인 2006년, 마침내 그는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 “나쁜점이요? 없어요, 없어” - 새로 시작된 학교생활 이야기 다시 시작된 학교생활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모두 소중할 뿐이다. 한번도 졸거나 지각ㆍ결석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항상 30분 전에 미리 도착해 수업을 준비한다. 학점 역시 3점대 후반의 나쁘지 않은 학점을 취득했다. 다른 학생들처럼 수업시간에 교단에 나가 발표도 하고 학생들과 함께 실습도 갔다. 총학생회 선거에도 당연히 투표권을 행사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 그에게 학교생활의 단점을 질문해봤다. 그는 단호하게 없단다. 한 번 더 질문을 해봤지만 정말 없단다. 듣고 보면 기자가 생각한 단점이 될 수 있는 상황을 그는 모두 장점으로 순화해 극복한다. 예를 들어 법대 교수 중에는 그의 후배뻘 되는 교수들이 많다. 법대 박찬운 교수의 경우가 그 예다. 그래도 그는 교수와 제자사이를 깍듯이 지킨다. 교수뿐 아니다. 같은 과 친구들에게도 존대를 하며 ‘동무’라는 호칭을 쓴다. 인터뷰 도중에도 과 학생들 얘기가 나오면 ‘동무들’이라고 칭하는 모습이 정겹다. 한번은 그가 교직에서 근무할 때 진학지도를 했던 학생을 대학교에서 만나기도 했단다. 그도, 그의 제자도 서로 깜짝 놀랐지만 사연을 듣고는 서로 웃음을 터뜨렸다고. # “한양대 변한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 44년 세월의 변화 속 한양대 중간 중간 학교를 오긴 했지만 44년 만에 학교를 다시 다니게 된 그는 변한 학교의 모습에 정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옛날엔 학교로 바로 들어오는 지하철은커녕, 지하철이란 개념도 없었기에 앞ㆍ뒤가 덜컹거리는 전차를 타고 학교에 등교했다. 그런 그에게 학교 안까지 바로 연결되는 애지문은 정말 신기하고 편리할 따름이다. 가끔 ‘학교 언덕에 엘리베이터 설치해주세요’라는 장난 반, 진담 반인 얘기들이 부끄러워진다. 왕십리 역시 마찬가지다. 왕십리 역 부근만 조금 번화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밭이었단다. 학교는 하나의 산이었고 산을 밭이 둘러싸는 형상이었다. 특히 의대 뒤쪽은 밭에 물을 부어 미나리를 재배하는 미나리깡으로 유명했다고. 학교에 생긴 많은 프랜차이즈 음식점들도 그에겐 낯설다. 예전엔 지금의 학생회관 사랑방 자리에서 자장면을 팔았었다. 자장면이 500원 했다는데 기자는 선뜻 감이 오지 않는다. 그땐 모두가 가난했기에 밥만 집에서 싸오고 자장소스를 부어 먹는 경우도 많았단다. 물론 밥을 굶는 친구들도 있었다. 건물은 가장 많이 변한 부분이다. 예전엔 본관과 공대건물(지금의 의대건물), 대학원 건물, 노천극장이 전부였다 한다. 대운동장이 없었기 때문에 노천극장에서 간단한 운동을 했다. # “진심은 모두에게 통합니다” - 후배들에게 마지막에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그는 64년 입학 당시의 한양대 학생들보다 지금의 학생들이 훨씬 훌륭하다 말한다. 로스쿨 같은 경우 충분히 더 많은 학생을 배정받아도 되는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단다. 그는 말한다. 어차피 사회는 경쟁사회ㆍ실력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지식을 갖추는 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래도 지식을 갖추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인간관계 형성이라 생각한다. 그는 어떤 인간관계라도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진심을 보여주면 상대방도 진심을 보여 준다 믿고 있다. 후배들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지식과 인간관계를 함께 겸비한 실력을 쌓길 바란다고. 그는 앞으로 사회에 봉사를 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밝혔다. 특히 노인들을 위한 봉사를 하고 싶다 한다. 기자는 오늘 그의 진심을 본 것 같다. 보통 사람이면 30여 년의 교직생활에 만족하고 편안한 노후생활을 즐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44년 전 끊어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의 열정이 오는 29일 그에게 학사모를 쓰게 한다. 이 지면을 통해 인터뷰에서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전하고자 한다. “이은상(법대ㆍ법학과 64) 선배님, 44년 만의 졸업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