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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초로 일어난 3·1운동과 선교 100주년 기념비가 군산시 구암동 세풍아파트 정문(구 영명학교 자리)에 세워져있습니다.
 호남 최초로 일어난 3·1운동과 선교 100주년 기념비가 군산시 구암동 세풍아파트 정문(구 영명학교 자리)에 세워져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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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주년 3·1절입니다. 온 나라 백성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운동은 삼천리강산 모든 지역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일제가 곡식 수탈의 전진기지로 삼고 있던 군산에서는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시민들이 하나가 되어 3월5일에 일어났습니다.

미국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를 졸업한 세브란스 의학전문 학생 김병수는 2월28일 독립선언서 200장을 가지고 군산에 내려가 영명학교 교사들에게 나눠주었고 3500장을 더 인쇄하여 인근 지방에까지 배포했습니다.

이어 조직을 갖추고 태극기를 만들며 준비하던 중 3월4일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군산경찰서 무장 경찰관들이 주모자인 박연세, 이두열 교사를 붙잡아 가는 바람에 '설애장터' 만세운동은 못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김수영, 고석주 교사와 학생들은 당장 선생님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군산경찰서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는데, 이것이 호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3·1운동입니다.

만세운동 주동자 공판 전날인 3월30일 밤에는 시민 수천명이 횃불과 태극기를 들고 시내에서 일본 경찰과 큰 충돌이 있었고, 다음날에는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원 법정에서 만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3월 초에 시작된 만세시위는 일경과 충돌을 해가며 5월까지 계속됐는데, 3개월 동안 의거 횟수는 21회였고 참가 연인원은 2만5800명이었으며 사망자가 21명이나 되었습니다. 일제는 양식을 강탈하는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았던 것입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군산 인구 중에 한국인이 6581명이고, 일본인이 6809명이었던 통계만으로도 일제의 침탈이 얼마나 기승을 부렸는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군산시청 홈페이지 참고)

대문 앞에는 가옥의 역사가 적힌 안내문과, 담벽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3호(군산 신흥동 구 히로쓰 가옥)’라고 양각된 동판이 박혀 있어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대문 앞에는 가옥의 역사가 적힌 안내문과, 담벽에는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83호(군산 신흥동 구 히로쓰 가옥)’라고 양각된 동판이 박혀 있어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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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쓰' 가옥은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 주택 형식으로 지어진 대규모 목조 건물로 언론에도 자주 소개되었고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지요. 오늘은 대문 앞에 서 있는 안내판에 적힌 내용 앞부분을 올립니다.

"군산시 영화동에서 포목상을 하던 일본인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건축한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이다. 히로쓰(廣津)는 대지주가 많았던 군산에서는 보기 드물게 상업으로 부(富)를 이루고 임피 인근에 조그마한 농장을 운영하며 부(府) 협의회 의원을 지냈던 인물이다.(이하생략)"

‘히로쓰’ 가옥과 함께 언론에 자주 소개되었던 조선은행 건물은 1923년에 신축되었고, 당시 경성(서울) 이외의 도시에서는 이렇게 크고 높은 건물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히로쓰’ 가옥과 함께 언론에 자주 소개되었던 조선은행 건물은 1923년에 신축되었고, 당시 경성(서울) 이외의 도시에서는 이렇게 크고 높은 건물을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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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도 등장하는 조선은행 건물은 해방 후 한일은행 군산 지점으로 사용되어오다 80년대 초 나이트클럽으로 전락하더니 지금은 노래방이 되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1960-70년대만 해도 은행 문턱이 높던 시절이었고, 부자들이나 은행 거래를 하는 것으로 인식됐던 때라서 은행 근처에 사는 사람들도 건물 내부를 들여다보기 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필자가 자주 다니던 은행이라서 직원들과의 잊지 못할 추억들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자세한 사연은 훗날 밝히기로 하지요.

1907년 조선에 일곱 번째로 설립된 十八은행 군산지점
 1907년 조선에 일곱 번째로 설립된 十八은행 군산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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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농민 착취의 상징이었던 十八은행은 주 업무가 무역에 따른 대부업이 주종을 이루었는데, 사업을 빙자하여 싼 이자로 대출받은 일인들이 토지를 담보로 고리대금업에 나서, 원금 상환일을 못 맞춘 농민의 농토를 갈취하는 수법으로 빼앗은 논이 부지기수였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에 진출한 일본계 은행은 모두 동일한 형태의 영업을 했고, 하루아침에 일본인에게 토지를 빼앗긴 조선인들은 1919년까지 84만 7천 명이 국외로 이주하였으며, 1930년까지는 150만 명이 만주와 러시아로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백성들의 참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일제의 착취와 해방 후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세관 건물
 일제의 착취와 해방 후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세관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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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호남의 쌀을 군량미로 빼돌리기 위한 사전작업의 하나로 세관을 설치했는데, 서양의 건축양식을 도입한 건축물이라서 근대 초기의 건축상과 세관의 발달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해방 후에는 군산세관 건물로 밀수품 단속을 주로 했기 때문에 외제 물건을 취급하는 서민들에게는 무서운 존재로 비쳐지는 건물이기도 하지요. 외제를 팔다 사법권이 있는 세관직원에게 걸리면 이곳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가게 문을 닫는 사람들도 있어 출입을 두려워했습니다.

일인들이 만주와 본국으로 가져갈 군량미를 저장하던 창고
 일인들이 만주와 본국으로 가져갈 군량미를 저장하던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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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을 기다리는 나락이나 만주와 일본으로 가져갈 군량미를 저장하던 창고인데, 부둣가나 정미소, 철도 주변에 많았습니다. 1930년대 군산에는 만 석 이상을 생산하는 정미소가 14곳이나 되었으며 그 중 5만 석 이상을 생산하는 곳이 여섯 곳이나 되었다니 일제 수탈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통계입니다.

군산에는 대형 창고가 많아서인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창고 대여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해방 후에는 쌀을 상징하는 '대한통운' 마크가 창고 벽에 붙어 있어 회사를 상징하기도 했지요.

시내 중심부에 있는 창고는 대형가구점이나 마트 등 상가로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창고로서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일제에 의한 상처를 치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주는 듯합니다.

도로가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지역의 도로 모퉁이를 길게 차지하고 있는 적산가옥. 군산에는 이와 비슷한 크기의 건물이 더 남아 있습니다.
 도로가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지역의 도로 모퉁이를 길게 차지하고 있는 적산가옥. 군산에는 이와 비슷한 크기의 건물이 더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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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는 한국전력 사무실로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ㄱ'자 모양으로 넓은 길의 모퉁이를 길게 차지하고 있어, 당시에는 대형 건물로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건물이 있는 동네 도로는 두부를 자르듯 사방으로 반듯하게 나 있어,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바둑판처럼 잘 정리된 이 지역을 사진으로 찍어 교과서에 소개된 적도 있거든요. 자유당 시절 국민학교 4학년 교과서로 기억합니다.

한국의 기와집 구조와 다른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적산가옥
 한국의 기와집 구조와 다른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적산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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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봐도 한국의 기와집 구조와 다른 것이 느껴지는 적산가옥입니다. 낡은 기와지붕과 창문 사이에 덧씌워진 붉은 함석지붕이 눈길을 끄네요. 오른쪽 유리문은 벽을 개조해서 만든 가게로 보이고, 중간의 나무창살은 전형적인 일본식 창문이며, 왼쪽 창살문은 일제 때부터 사용해오고 있는 현관인 것 같습니다.

적산가옥들이 마주보고 있는 골목. 한국식 가옥들이 마주한 골목과 분위기가 다른 점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적산가옥들이 마주보고 있는 골목. 한국식 가옥들이 마주한 골목과 분위기가 다른 점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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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인들은 도로만 크고 반듯하게 닦아 놓은 게 아니라, 보는 것처럼 골목도 반듯하게 냈습니다. 바둑판처럼 조성된 근처 주택가 골목은 거의가 반듯하게 나 있는데 한옥이 모여 있는 옆동네 골목은 꼬불꼬불 하다는 것입니다.

사진이긴 하지만 밖으로 나타나는 가옥 형식도 특이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옥의 창은 벽에 뚫려 있고 대체로 작은 반면, 일본식 가옥의 창은 하나같이 크고 밖으로 나와 있으며 비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덧지붕을 씌워놓았지요.

밖으로 나와 있는 창 아래는 베란다처럼 화분을 놓는 진열대 노릇도 하는데, 화분이 없는 집은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합니다. 말을 하다 보니 코흘리개시절 친구 집에 놀러가 창가에서 놀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태그:#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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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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