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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가르치기 삼십년 동안 무슨 인연인지 이십여 년 간을 여학교 뜨락에서 보냈습니다. 어쩜 여자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는지도 모릅니다. 뭐한 말로 여학생들 숲에서 청춘을 불사르고 젊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가장 보람되고 가슴 떨리던 시절이었으며 영원히 잊지 못할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여학교 오래 있으면 농담조로 ‘시간은 잘 가지만 남는 것이 별로 없다(?)’고들 했습니다. 남는 게 무엇을 뜻하는진 잘 몰랐지만 난 여학교가 좋았습니다. 거기엔 항상 꽃처럼 피어나는 어린 소녀들이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월의 끝자락, 학교는 새 학기 준비로 바쁘고 어수선합니다. 대체로 3·1절을 전후해 선생님들의 예비소집이 있습니다. 학급담임과 책상 배정을 받고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출석부, 교무수첩을 받아 분주히 새 학년 살림살이 마련을 합니다. 새내기들의 입학식이 끝나고 아이들을 만나러 출석부를 들고 교실을 찾아갈 때의 설렘, 돌아보면 지금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릅니다.

 

학기 초엔 꽃샘추위가 시샘을 부리고 분위기도 바뀌어 늘 어수선합니다. 이럴때 교실을 따스하게 데워주는 건 꽃이 제일입니다. 담임이 배정되고 교실이 정해지면 썰렁한 교실을 찾아가 의자와 책상을 정돈하고 꽃분을 몇 개 사다 봄볕이 스며드는 창가에 앉혀놓습니다. 막 봄물을 터뜨린 노란 수선화와 아마릴리스는 금세 교실공기를 따뜻하게 데우고 서먹한 분위기를 신선하게 되돌려놓곤 합니다.

 

 

어린 소녀들의 또랑또랑한 눈빛을 따라 가슴마다 조금씩 다른 이름표를 달아주며 상견례를 합니다. 아이들은 금세 아마릴리스처럼 얼굴이 발그레 달아오르고 샛노란 수선화 꽃물이 들기 시작합니다. ‘얘들아, 나는 자신 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남자야, 앞으로 절대 나를 좋아해선 안 된다’고 능청을 떨며 서로의 만남은 시작됩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꽃잎에 젖어오던 모습이 출석부 속으로 명멸하며 다가섭니다.

 

나르시스는 자신만을 사랑했기에 수선화로 변했답니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부심, 자신만을 사랑하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으며, 자부심이 없으면 자신감이 어떻게 생겨날까 싶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신화 속 나르시스를 쏙 빼 닮았다는 수선화, 연못에 잠긴 미소년이 자신인 줄도 모른 채 머리를 조아리고 발밑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사정없이 꽃술 속으로 봄빛이 잠겨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아이들 대신 ‘꽃 출석부’를 들고 봄이 오는 정원을 돌아봅니다. 땅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생명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겨우내 어둡고 썰렁한 계절을 건너왔으련만 들꽃들은 말이 없습니다. 말을 걸어 이름을 부를 때마다 겨우 고개를 내밀며 가녀린 몸짓으로 다가설 뿐입니다.

 

 

벌써 봄 마중을 끝내고 저만치 물러나 있는 복수초, 남쪽 해풍을 몰고 와 가던 길 멈추고 바람으로 남아있는 변산 바람꽃, 이제 막 꽃물을 열기 시작한 수선화, 아직도 꽃소식이 없는 노루귀, 민들레, 제비꽃, 할미꽃, 상사초 등등…. 100여 식구도 넘는 대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며 정원을 한바퀴 돌자면 한참이나 걸릴 듯싶습니다.

 

난, 오늘부터 불쑥불쑥 솟아나는 생명들이 작년 늦가을 헤어질 때처럼 한 명의 결석도 없이 모두 출석을 하고 있는지 안부를 묻습니다. 얼마 안 가 산동백, 산수유, 목련, 살구, 자두, 앵두꽃들도 다투어 피어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또 둥둥 부풀어 오릅니다.

 

 

비록 오막살이에 가진 것 없이 살아도 많은 꽃들을 길러낼 터전이 있다는 건 여간한 행복이 아닙니다. 하루가 다르게 저릿저릿 저려오는 봄을 이리 사치를 떨며 좋아해도 되는 건지….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전원이야기, 네오넷코리아 북집에도 함께합니다. '북한강 이야기'를 클릭하면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수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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