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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겐베리아 따리 어느 집 담모퉁이에 피어난 부겐베리아. 겨울 속의 꽃이 더 곱다.
부겐베리아따리 어느 집 담모퉁이에 피어난 부겐베리아. 겨울 속의 꽃이 더 곱다. ⓒ 최성수

밤새 바람이 뒤척이고

잠결에 거센 바람 소리가 귓전을 뒤흔든다. 옅은 잠에서 깨어나 캄캄한 어둠을 멍하니 바라본다. 불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지금은 밤일까, 새벽일까? 그렇게 한 삼십 분 남짓의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한 시간, 혹은 십여 분일지도 모른다. 도무지 시간의 분별이 되지 않을 만큼 나는 지금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리라.

이곳은 따리(大理)다. 그리고 나는 지금 게스트하우스 넘버3의 도미토리 6인실 한 귀퉁이에 누워 있다. 세 번째 따리 여행이지만, 올 때마다 늘 격절감을 느끼는 것은 이곳이 지리적으로 내 삶의 땅에서 아득히 떨어져 있기 때문이고, 공간적으로도 낯익은 이들 하나 없는 곳인 탓이리라.

나는 어둠 속에서 잠시 여행의 계획을 더듬어본다. 이제 아침이면 리우쿠(六庫)를 향해 떠나야 한다. 리우쿠, 누지앙(怒江) 천리 여행의 출발지다. 그리고 정말 아는 이 하나 없는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 편으로는 설레고 한 편으로는 두렵다. 낯선 땅을 가본다는 설렘과, 낯선 상황과 맞닥뜨려야 하는 두려움이 마음 속에서 교차되고 있는 것이다.

한동안 어두운 침대에 누워 마음의 갈피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 머리맡의 불을 켜고 시계를 본다. 새벽 네 시 조금 넘고 있다. 나는 조심조심 침대를 빠져나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선다. 하늘을 쳐다보니 휘영청 달이 밝다. 아직 캄캄한 어둠, 그리고 그 어둠을 안간힘을 써서 밀어내는 달빛이 중천에서 빛난다.

어디선가 깡통 굴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넘버3 앞 골목길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소리이리라. 달은 밝은데 바람은 거세다. 따리의 배경이 되는 창산 어디서 시작된 바람일까? 내 마음처럼 바람은 쉬지 않고 불어온다. 달빛 아래 마당의 부겐베리아 꽃이 일렁이는 것 같다.

오래도록 마당가에 서 있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방 안은 여전히 캄캄한 어둠이다. 이웃 침대에서 낮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바람 소리를 듣는다. 일곱 시가 넘어야 날이 밝는 따리이니 아직 출발하려면 멀었다. 어제 샤관(下關)에서 출발하는 오전 아홉 시 버스를 예매해 놓았으니, 여덟 시 정도에 나가면 충분할 것이다. 한 잠 더 자도 될 테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바람 부는 소리를 들으며, 그 바람결에 묻어 있는 창산의 향기와 달빛의 선연함을 생각하며 뒤척인다. 삶이란 늘 저렇게 아득하고 그리운 것이리라.

네 번째 운남 여행이고, 그 중 따리는 세 번째다.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운남은 늘 내게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일상의 삶이 피곤하고 괴로울 때마다 나는 운남에 대한 아득함, 그리움에 빠져든다.

잠시 생각 속에 잠이 든 것일까? 눈을 뜨니 벌써 여섯 시다. 그만 일어나야지 하면서도 전기담요의 따스함에 미련이 남아 미적댄다. 여전히 바람 소리가 창 밖에서 서성인다. 한참 더 바람 소리를 듣다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한다.

리우쿠 가는 길

샤관 버스 터미널 근처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요기를 한다. 시판(쌀죽)에 녹차 끓인 물에 삶은 계란이다. 소박한 아침상이지만 속은 더없이 편안하다.

터미널은 시동을 걸어놓은 차들로 소란스럽다. 중빠(中巴 : 중형 버스, 마이크로버스 정도 됨)는 금방 출발할 듯 부릉거린다. 내가 탈 차는 오전 9시에 출발하는 리우쿠행 대형 직행(直快)버스다. 요금은 71위안에 보험료 2위안. 짐칸에 짐을 싣고 버스에 오른다.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 있다.

오전 9시 5분, 드디어 버스가 터미널을 벗어난다. 차 안에는 우리 일행 세 명을 포함해 모두 23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그 중 외국인은 우리 일행 셋뿐이다. 갑자기 막막해지는 느낌이다. 낯섦, 그 녀석이 불쑥 내게로 다가온 것 같다. 괜히 주눅이 들어, 마구 떠드는 중국 사람들을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리우쿠 가는 길 염소떼가 길을 막고 있다. 오래 된 시간 속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풍경이다.
리우쿠 가는 길염소떼가 길을 막고 있다. 오래 된 시간 속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풍경이다. ⓒ 최성수

차는 샤관 시내를 벗어나 바오산(保山) 가는 고속도로로 들어서더니 속도를 높이기 시작한다.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 있고, 눈 아래로 산자락에 마을들이 숨어 있다. 저렇게 숨은 듯 살아도 삶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리라. 문득 내가 살아온 바쁜 일상들이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이것이 바로 여행자의 몽상 같은 것일까? 일상에서 벗어난 자의 여유일까?

차는 미끈하게 빠진 도로를 약 한 시간 50분가량 달려, 라오잉(老營)에서 고속도로를 버리고 구불구불 산길로 들어선다. 비로소 누지앙 여행의 첫발을 내딛는 것 같다.

길가로 폭포가 거세게 물줄기를 내던진다. 아득한 비탈에 매달린 듯 작은 집이 자리 잡은 풍경도 스쳐 지난다. 바나나 나무가 햇살에 제 몸을 말리고 있고, 산 몇 굽이를 지나자 매화꽃이 산비탈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봄 풍경이다. 어디서 본들 같은 매화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낯선 곳에서 마주치는 매화는 더 마음을 아득하게 한다. 세상의 모든 일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같은 사물도 어떤 환경에서 만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리라.

리우쿠 가는 길 공사중, 차들이 서로 마주보고 멈춰 있다. 리우쿠 가는 길에서는 예상치 못한 온갖 난관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난관이 행복하다.
리우쿠 가는 길공사중, 차들이 서로 마주보고 멈춰 있다. 리우쿠 가는 길에서는 예상치 못한 온갖 난관과 맞닥뜨린다. 그리고 그 난관이 행복하다. ⓒ 최성수

산길을 따라 얼마를 달렸을까? 갑자기 차가 멈춰선다. 내다보니 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한참 앞에서 도로 공사 중이다. 길의 중간쯤까지 공사용 돌멩이들이 놓여 있다. 교행을 안내하는 사람도 하나 없다. 그래도 아무도 화를 내지 않는다. 서로 마주친 차들이 아슬아슬하게 비켜가며 지나는 동안, 운전기사도 손님들도 모두 으레 그러려니 하고 웃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풍경이 넉넉해 보인다. 어느새 나도 일상의 쫓기는 시간들을 다 버리고 이곳 사람들의 태도를 몸에 받아들이게 된 것일까?

차는 산굽이 길을 아슬아슬하게 달린다. 곳곳에 망가져 비포장도로가 되어버린 길이 나타나고, 어떤 곳에서는 길의 주인인 양 집채만한 돌이 길 가운데 앉아 있다. 버스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런 장애물들을 용케 피해가며 달린다. 얼마나 굽이진 길인지, 몇몇 승객들이 울렁증을 견디지 못하고 비닐봉지에 토하기 시작한다.

내 앞쪽 대각선에 앉은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사내도 비닐봉지에 얼굴을 들이민다. 그는 샤관에서 출발한 내내 두어 살 되어 보이는 딸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지, 애지중지하던 아이를 옆자리 아내에게 맡기고 굽이를 돌 때마다 계속 토해댄다.

비탈 집 누지앙 사람들은 비탈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아득해 보인다.
비탈 집누지앙 사람들은 비탈에 매달려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아득해 보인다. ⓒ 최성수

어쩌면 평생 가장 오래 버스를 타보는 것이 아닐까?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모처럼 도시 구경을 하고, 볼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이 아닐까? 저 아득한 산비탈 어느 집에서 가슴 부풀며 걸어 내려왔을지도 모른다.

토하고 토해 더 이상 올릴 것이 없는지, 흰 비닐 봉지 속에 우윳빛 위액만 가득하다. 나는 그 사내를 보며 문득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전학 오던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살다 난생 처음 서울로 오던 그 해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안흥에 나와 다시 원주행 버스를 타고, 원주에서 기차로 청량리역에 도착했다.

늦은 오후, 일 년 가야 두어 번 버스를 탈 수 있었던 내게 그 하루는 정말 끔찍했다. 청량리역에 내렸을 때 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 다시 버스를 타야 했다. 승객들은 왜 또 그리 많았는지, 앉을 자리가 없던 나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차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버스 운전기사는 승객이 많으면 차를 좌우로 마구 움직여 사람들을 모으는 운전을 하곤 했다. 그러지 않아도 굴곡이 많은 노선이었는데, 차가 지그재그로 마구 흔들리자 나는 그만 속엣것을 다 올리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내가 토하는 순간, 그 복잡하던 차 안에 순식간에 널찍한 공간이 만들어지던 신비로움을. 그리고 그 버스, 시영버스를.

어쩌면 저 사내도 오랜 세월 뒤 오늘의 이 괴로운 행차를 추억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웃으며 자기 딸에게 이 순간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비닐봉지에서 얼굴을 뗀 그 사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나는 그 눈물이 시간을 거슬러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 같이 느껴진다.

갑자기 차가 멈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나는 고개를 내밀고 창 밖을 바라본다. 그때 차 문이 열리고 근엄한 표정의 공안 둘이 올라선다. 승객 모두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공안은 앞자리부터 사람들을 하나하나 검문하기 시작한다. 승객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신분증을 꺼내 들고 있다. 공안은 몇몇 사람들에게 계속 무어라고 질문을 해 댄다. 사람들은 주눅 들린 말투로 공손히 대답을 하고, 공안은 여전히 다그치듯 무언가를 묻는다. 우리에게 다가온 공안이 손을 내민다.

“우리는 한국 사람이다.”

그러면서 내가 일행 세 명의 여권을 내밀자, 공안은 아무 대답도 없이 여권을 받아들고 버스를 내려버린다. 기다리라는 말도 없다.

공안이 내려가고 나자 버스가 갑자기 움직인다. 내가 ‘우리 신분증을 받아야 한다’고 소리치자 기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를 길 옆으로 댄다. 길을 터주기 위해 차를 움직였을 뿐인데 괜히 지레짐작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 길가를 서성인다. 한동안, 여권을 가져간 공안은 보이지 않고, 길 저편 거센 물줄기소리만 요란하다. 저 물이 흘러 누지앙의 일부가 되리라. 그리고 그 물은 흘러 흘러 미얀마를 향해 국경을 넘을 것이다. 거침없이 흐르는 물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 경계를 만들고 구획을 짓고, 넘어갈 수 있는 길도 넘어갈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길 한가운데로 염소 떼를 몰고 할아버지가 지나간다. 마치 오래 전 시간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풍경이다. 말을 끌고 스적스적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 길을 자동차가 천천히 지나간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을 보는 것 같다. 누지앙 들머리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 발을 디디는 것 같은 착각에 나는 잠시 여권 생각을 잊는다.

그때, 공안이 여권을 가져다주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선다. 다시 버스가 출발한다. 중국은 검문할 때만 사회주의 국가 같다는 느낌이 든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건물들이 제법 들어서 있는 번화한 소도시가 나타난다. 리우쿠다. 따리를 출발한 지 다섯 시간만이다.

작은 도시 리우쿠, 누지앙이 흘러오며 대협곡을 이루다 마침내는 그냥 평범한 강으로 바뀌는 도시 리우쿠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흘러가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제 누지앙은 천리 협곡을 버리고 빠오산을 거쳐 미얀마로 흘러든다. 그리고 미얀마에서 이름을 바꿔 샬윈강이 된다.

누지앙 천리 여행, 차마고도(茶馬古道) 옛 길 여행이 이제 리우쿠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비지앙 마을에서 누지앙을 바라보며

리우쿠 버스 터미널에 내리니 햇살이 제법 따뜻하다. 봄 날씨다. 배낭을 메고 터미널 앞을 잠시 서성인다. 리우쿠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푸꽁(福貢)으로 갈까, 아니면 바로 푸꽁으로 갈까 망설이는데, 나이 제법 늙수그레한 사내가 말을 건넨다.

“차 빌릴 거냐?”
“그렇다.”
“그럼 내 차를 빌려라.”
“하루에 얼만데?”
“400위안.”
“너무 비싸다.”

한참을 흥정한 끝에 하루 300원에 빠오처(包車 : 차를 빌리는 것)하고 리우쿠를 떠난다. 돌아오는 길에 리우쿠는 천천히 구경하기로 하고 떠난 시간은 오후 2시 40분.

우리가 빌린 차 기사는 황구어첸(黃國全), 올해 50살이란다. 나도 50살이라니 몇 년생이냐고 묻더니 자기가 한 살 더 많단다. 나는 한국 나이로, 기사는 중국 나이로 헤아리니 그가 나보다 한 살 많기는 한 셈이다. 누지앙 길을 잘 아느냐고 물으니 그는 빙그레 웃으며, 자기는 엊그제 시상판나에 갔다 왔다며, 7일간이나 운전하고 다녔어도 멀쩡하다고, 누지앙은 자주 다니는 길이라며 자신만만하다.

비지앙 가는 길 하늘과 산이 맞닿아 있다. 지나온 길이 아슬아슬하다.
비지앙 가는 길하늘과 산이 맞닿아 있다. 지나온 길이 아슬아슬하다. ⓒ 최성수

리우쿠 시내를 벗어나자 강물이 길 왼편으로 흘러간다. 저 강이 바로 누지앙이다. 그리고 천리 누지앙 여행이 시작된다. 물빛은 누런 흙빛이다. 이름대로 물줄기는 성난 듯 거세게 흐른다. 군데군데 강물로 떨어지는 폭포가 아득한 산비탈에서 흘러내린다. 고개를 길게 빼고 보니, 그 아슬아슬한 산꼭대기에 몇 채 집이 매달려 있다. 금방이라도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저 좁은 터에 집 짓고, 손바닥만 한 텃밭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풍경이 아슬아슬하게 잡혀 온다.

그야말로 작소(鵲巢), 까치집이다. 산 위 벼랑 끝에 달랑 얹혀 있는 집은 그대로 산이며 벼랑이다. 강 가로 난 길에서 그 집까지 길이 있을 성싶지 않고, 걸어서 가면 하루 종일 걸릴 것 같다. 바라보는 내가 막막해지는 것은, 이곳의 생활인이 아닌 여행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에는 군데군데 낙석이다. 바위 벼랑이 도로의 삼분의 일쯤 뒤덮은 길도 있다. 그리고 길  옆으로는 노도의 누지앙이 흘러간다.

나는 하염없이 창 밖 풍경들을 바라본다. 거세게 흐르던 물이 어떤 곳에서는 눈부신 모래톱을 만들어놓는다. 삶이 바로 저런 것이리라.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던 시절도 어느 굽이에서는 눈부시게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는 법. 누지앙 천리를 거슬러 가는 길은 그렇게 삶의 또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 같다.

차는 강물을 왼쪽과 오른쪽에 바꾸어 매달고 두어 시간 가까이 달린다. 갑자기 눈앞에 손바닥만한 표지판이 나타난다. 표지판은 오른쪽 산비탈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고, 벽강(碧江)이라고 적혀 있다. 드디어 피허(匹河)의 비지앙(碧江) 마을이 나타난 것이다. 리우쿠에서 피허까지 약 90km를 두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것이다.

비지앙의 아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수줍게 자세를 취해준다.
비지앙의 아이카메라를 들이대자 수줍게 자세를 취해준다. ⓒ 최성수

그곳에서 차는 왔던 길을 버리고 산길로 접어든다. 비포장에 진흙 길이다. 차가 달릴 때마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급경사의 길이다. 가파른 곳에서는 창 밖으로 하늘만 보인다. 그 하늘이 어슴푸레하다. 길은 산의 앞쪽에서 뒤쪽으로, 다시 앞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한참을 올라가며 지나온 길을 내려다보니, 달려온 길이 꾸불꾸불 뱀처럼 몸을 뒤틀고 있다.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길을 얼마나 올라왔을까? 마침내 집들이 띄엄띄엄 나타난다. 집이 있다고 해서 평지도 아니다. 70도도 더 될 것 같은 경사면에 집을 걸어놓은 것 같다. 집 근처로 비탈 밭이 좁고 길게 자리 잡고 있다. 아득한 아래로 누지앙이 실개울처럼 흘러간다.

라오무떵(老姆登) 마을이다. 십 여 채 되는 집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고, 그 사이에 천막처럼 지어놓은 건물 위로 십자가가 걸려 있다. 노모등 교회다. 이 깊은 산 속에 십자가라니! 1900년대 초반 미얀마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온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전파해, 이 지역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 신자가 많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만나는 기독교 교회라 낯설고, 그들 나름의 원시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한 이곳 사람들의 마음 또한 낯설다.

라오무떵 마을 위로도 길은 계속 이어진다. 이미 누지앙은 아득한 발 아래 지렁이처럼 꾸물꾸물 흘러간다.

다시 몇 굽이를 틀며 달리고 나자 드디어 비지앙 마을이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인 셈이다. 제법 평평한 땅이 있고, 길을 따라 집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다. 그래 봤자 오십여 채 될 뿐이지만, 그래도 이 비탈 마을에서는 가장 번화한 곳인 셈이다.

번듯한 학교도 하나 있다. 즈지루오(知子罗) 소학교다. 학교 앞쪽으로 커다랗고 흰 동상이 위압적으로 서 있다. 다가가 보니 마오쩌뚱 동상이다. 아이들은 공터에서 즐겁게 뛰어놀고 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내 들고 한 아이의 사진을 찍어주자, 녀석이 수줍은 듯 배시시 웃으며 사진을 받아들고 엄마를 부르며 사라진다.

비지앙 교회당 소박한 집에 단순한 내부, 알파벳을 뒤죽박죽 써 놓은 글자들이 신기하다.
비지앙 교회당소박한 집에 단순한 내부, 알파벳을 뒤죽박죽 써 놓은 글자들이 신기하다. ⓒ 최성수

마을 끝으로 가니 역시 작은 교회가 하나 서 있다. 노모등 교회와 꼭 같이 생긴 교회다. 신애세인(神愛世人), 기독교당(基督敎堂)이라고 한자로 쓰여 있고, 그 아래에 알파벳 모양의 글자도 적혀 있다. 읽어보려 해도 읽을 수가 없다. 알파벳이 어떤 것은 똑바로, 어떤 것은 뒤집히거나 반대로 쓰여 있다.

선교사들이 이곳에 왔을 때 이곳에 사는 소수민족들에게 알파벳을 이용해 쓰는 법을 가르쳤는데, 그 흔적이라고 한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소박하고 단순하다. 딱딱한 나무 의자, 칠판, 나무로 깎아 만든 십자가, 교탁처럼 소박한 설교대에는 조화가 놓여 있다. 찬송가책이 있어 들춰보니, 악보가 꼭 우리나라 정간보 같다. 글씨는 역시 알파벳 형태다. 전체적으로 오래된 교실처럼 낡고 편안해 보이는 풍경이다.

비자앙 마을의 문 문 밖은 비탈밭이다. 문을 나서면 어디 세상 아닌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비자앙 마을의 문문 밖은 비탈밭이다. 문을 나서면 어디 세상 아닌 곳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 최성수


비지앙에서 본 협곡 양쪽 산이 마주보고 있다. 골짜기 아래는 누지앙이 흐른다.
비지앙에서 본 협곡양쪽 산이 마주보고 있다. 골짜기 아래는 누지앙이 흐른다. ⓒ 최성수

교회 옆으로 해서 산비탈 쪽으로 가니 목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나무 막대기 두어 개를 걸쳐 문을 만들어 놓았다. 앞에서 보니, 그 문은 그냥 그대로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것처럼 허공에 떠 있다. 보이는 것은 건너편 협곡의 우뚝한 산뿐이다. 어디 세상 아닌 곳으로 나가는 문 같은 그곳을 나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아득하고 또 아득하다.

갑자기 문 밖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 또한 다른 세상에서 울려나오는 것 같이 아득한 것은 내가 지금 누지앙의 한 귀퉁이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소리 나는 곳으로 다가가 본다. 나무문 아래쪽 비탈 밭에서 두 아낙네가 콩을 꺾고 있다. 깍지 채 삶아 먹는다는 콩이다. 허리를 펴면 금방 까마득한 누지앙으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가파른 밭이다. 매달려 살아가는 생의 아슬아슬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비지앙 마을을 떠난다. 다시 자욱한 머지는 우리 꽁무니에 매달리고, 올라온 길을 휘휘 돌아 내려오는 길, 발아래 누지앙이 아름답다. 저 길을 따라 천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간쯤 내려왔을까, 제 몸보다 더 큰 배낭을 멘 서양 아가씨가 어두워지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오고 있다. 아마도 노모등 교회를 찾아가는 길이리라. 이곳에서 그래도 제법 알려진 곳이 노모등 교회니까.

조금 더 내려오자, 데이트 중인지, 젊은 총각과 처녀가 비탈길을 행복에 겨운 걸음걸이로 내려가고 있다. 윗마을 사람일까? 아니면 윗마을에 다녀오는 아랫마을 사람일까? 윗마을에서 아랫마을까지 내려가려도 하루 종일 걸릴 것 같은 길을 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걸어가고 있다. 우리 차가 일으키는 먼지를 피해 서면서도 그들은 편안하게 웃는다.

나는 차 뒤로 사라지는 그들을 바라보며, 행복이란 저렇게 마음이 환해지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 때문에 어둑어둑해지는 비지앙의 풍경이 더 아름답다.

비지앙에서 바라본 누지앙 비지앙 마을에서는 누지앙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물살이 성난 것 같이 흐른다. 그래서 누지앙(怒江)일까?
비지앙에서 바라본 누지앙비지앙 마을에서는 누지앙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인다. 물살이 성난 것 같이 흐른다. 그래서 누지앙(怒江)일까? ⓒ 최성수

높고 높아 하늘에 닿아 있는 것 같은 비지앙 마을에서 내려온 뒤, 차는 점점 어두워지는 길을 숨차게 달린다. 라이트 불빛이 조금 길 위의 어둠을 밀어낼 뿐, 강물도 산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이 어둠 속에 누지앙은 성난 물살로 흐를 테고, 산은 의연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어쩌다 아득한 산꼭대기에 걸린 집에서 끄덕끄덕 조는 것 같은 불빛이 흘러나온다. 그 빛은 인간의 불빛이 아니라 신의 별빛 같다. 그 별빛 아래서는 삶의 간난과 신고가 모두 사라져 버릴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승의 허물을 다 벗어버리고, 날마다 흘러가는 누지앙의 강물처럼 무심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어둠 속의 누지앙 길은 신의 땅을 향해 가는 길 같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중순에서 2월 초순까지 여행한 기록입니다,

이 기사는 제가 운영하는 카페 http://cafe.naver.com/borisogol.cafe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누지앙#비지앙#따리#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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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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