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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밭 사건(?)이 있고 나서 어머니는 상황에 맞지 않는 주장을 거의 안 하셨다. 며칠 동안 계속된 평화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는데 확실하게 한고비를 넘기신 게 분명해 보였다. 가끔 엉뚱한 주장을 하시기는 해도 예전처럼 집요하거나 공격적이지가 않았다. 어떤 주장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대로 따르지는 않으면서 맞대응하지 않고 가볍게 수긍해 주니까 어머니 스스로 주장을 접거나 잊어버리거나 했다.

 

자기주장을 지나치게 강변하지 않아도 누가 당신을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오랜 세월 내재되어 있던 긴장과 마음의 상처가 해소되지 않았나 싶다.

 

여름에 있었던 ‘백운역 할아버지’를 찾아나선 사건이 정점을 이루었고, 감자밭 사건을 거치면서 어머니가 완전히 변한 것이다.

 

‘백운역 할아버지’를 찾아 서울까지 갔던 사건은 나로서는 어머니랑 계속 같이 살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품게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였고, 어머니에게는 최고의 치유였다고 할 수 있다.

 

무더위가 예년과 달리 늦게까지 기승을 부리던 8월 말 어느 날이었다.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차려 놓은 아침을 드시지도 않고 어머니는 서울 여동생 뒷집에 ‘백운역 할아버지’가 와서 침을 놔 준다고 가자는 것이었다. 빨리 안 가면 ‘백운역 할아버지’가 가버린다고 불이 나게 서두르셨다.

 

늘 그렇듯이 보따리를 뭉쳐가지고 먼저 마루로 나서셨다. 전화를 해 보고 가자고 했는데 어머니는 그야말로 눈에 쌍심지를 켜고는 “소문나면 사람들이 몰려 올까 봐 전화하면 집에 없다고 한다니까!”라고 쏘아부쳤다.

 

이미 며칠 전 새벽 1시경에 역시 소낙비가 오고 있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어머니가 고향마을에 부산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미자’라는 이름의 외사촌 여동생이 와서는 어머니를 모시고 오시라고 했다면서 침을 맞으러 가자고 해서 대책이 없었던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하다가 울어버린 사건이 있었던 터라, 이번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어머니 말씀대로 서울을 가자고 했다.

 

외사촌 여동생네 안 가고 어머니를 설득해서 눌러 앉힌 것이 화근이 되어 다시 증상이 재발한 것으로 판단하고 이번에는 뿌리를 뽑자는 심정으로 나선 것이다.

 

내가 흔쾌히 어머니 주장을 받아 주니까 어머니의 눈초리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러나 서울에 가야겠다는 의지만큼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외사촌네 집에 엊그제 갔었으면 이런 일 없다 아이가. 미자가 기다리다가 기다리다 더 못 기다리고 부산으로 가버렸다 아이가.”

 

어머니의 요구가 시작될 때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서너 사람과 전화로 사태를 의논하여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을 뒤집을 듯이 퍼붓는 소낙비가 가끔씩 잦아들기도 했지만 내 트럭이 고속도로에 올라서기까지 날씨는 아주 위협적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전화해서 도움을 구하던 울산 사는 분으로부터 “서울로는 가지 말고 일단 고속도로를 달려보라”는 말대로 장수 나들목을 통해 대진고속도로 들어갔는데 정작 고속도로에 들어가자 ‘어디 해볼대로 해보자’ 하는 오기가 생기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88고속도로로 옮겨 타고 남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어머니가 나를 쳐다보면서 불안스레 한마디 하는 것이었다.

 

“아니. 서울이 와 이리 머노? 아직도 서울 아이가?” 하시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전깃불이 들어오듯 머리가 환해졌다. 살아 계시지도 않은 ‘백운역 할아버지’가 비현실적인 인물이듯이 어머니 마음속의 ‘서울’은 우리 지도상의 서울이 아님을 간파 한 것이다.

 

“비가 와서 빨리 못 달려서 그래요. 어머니 이제 다 왔어요.”

 

남원으로 빠져서 여기가 서울이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서울이 너무 멀다고 하면서 뭘 좀 먹고 가자고 했다.

 

이때부터 주도권은 완전히 내게로 넘어오게 되었고 서로 처지가 뒤바뀌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된 오후 여섯 시까지 나는 ‘백운역 할아버지’를 찾아 여기저기 계속 쏘다니고 어머니는 나를 만류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43회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국농어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목암,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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