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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의 상쾌한 아침. 호텔 로비를 나서던 신영이가 로비의 팸플릿 진열대에서 한 팸플릿을 집어 들고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그 팸플릿에는 'Next To Mozart: Multimedia Wax Museum'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름 그대로 모차르트 생가의 옆집에 있는 이 밀랍인형 전시관은 2004년 10월에 개장한 잘츠부르크의 새로운 명소였다.

팸플릿의 지도를 보니 박물관 위치는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 Gasse)에 위치한 모차르트 생가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박물관을 구경하게 되면 잘츠부르크의 위대한 건축물 중 어느 한곳의 답사는 물거품이 되겠지만, 나는 딸의 역사공부를 위해서 이 커다란 과거재현단지를 선택하기로 했다.

1791년의 잘츠부르크가 재현되어 있다.
▲ 왁스박물관. 1791년의 잘츠부르크가 재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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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트라이데 거리 한복판의 왁스박물관은 사람들이 몰리는 모차르트 생가 바로 옆에 있어서 찾기가 너무 쉬었다. 우리는 결코 싸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 잘츠부르크의 1791년 일상 속으로 들어섰다. 이 박물관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1791년은 모차르트가 사망한 해이자, 잘츠부르크의 중세문화가 가장 찬란히 빛을 발하던 시기이다.

나의 가족은 박물관에서 나누어준 영어안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 영어안내 서비스 이어폰은 우리를 잘츠부르크의 과거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신비한 학자이자 점성술가인 '닥터 미라클(Doctor Miracle)'이라는 박물관의 가공인물이 이어폰을 통해서 계속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박물관에 들어서면서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물관이 4층이나 돼서 진열된 전시물이 방대하고, 신영이는 성격상 77개의 모든 밀랍인형들 앞에서 이어폰의 설명을 모두 듣고 이동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도 신영이를 따라 이어폰의 설명을 충실히 들으면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실내는 조금 더웠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나의 몸은 실내온도에 점점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술과 같은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말조각의 연못 앞에 섰다. 연못 물 위에 반사되는 스크린에는 당시의 건축물들이 지나가고, 그 당시 게트라이데 거리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마치 현실인 양 재현되고 있었다.

나는 중세의 게트라이데 거리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빵집의 한 여인이 나에게 잘 구워진 빵을 건네려고 하고 있다. 과거의 여인으로부터 빵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그 빵을 사서 정말 그때 잘츠부르크의 빵맛은 어떠했는지를 감상해보고 싶었다. 나는 거리의 다른 가게로 발길을 돌렸지만 그 여인은 계속 빵을 사지 않겠느냐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금세공인이 금을 가공하고 있다.
▲ 게트라이데 거리의 가게들. 금세공인이 금을 가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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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트라이데 거리에서 삶을 영위했던 여러 군상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도원의 수도사는 양초 아래에서 깃털 달린 펜으로 글을 쓰고 있으며, 의사는 마취기구도 없이 과감하게 이를 뽑고 있다. 약국에서는 한 여인이 글리세린 치료제를 사고 있고, 금세공인, 구두 제작자, 목수, 술을 빚는 사람들은 자기의 생업을 열심히 꾸려 나가고 있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열심히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 박물관의 진솔함은 어린 걸인에게서 볼 수 있다. 거리에 나앉은 어린 걸인이 붉은 복장의 귀족을 바라보면서 간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벌리고 있다. 지금처럼 풍요롭지 못했을 중세의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은 이 걸인의 표정에서나마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박물관 내부에는 나의 가족밖에 없다. 박물관 입장료가 꽤 비싸기 때문인지 박물관 내에 단체 관광객은 전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조용한 박물관 내의 밀랍인형들을 조용히 관찰하며 중세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나는 중세 잘츠부르크 문화의 정점에 서 있었던 귀족들의 방으로 들어섰다. 움직이는 밀랍인형으로 만들어진 하인 프란츠 조셉(Franz Josef)이 나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18세기 귀족들의 패션과 옷을 입던 방법을 알려준다. 이 말하는 밀랍인형은 약간 짜증 섞인 얼굴로 설명을 하기에 더욱 웃기고 생동감이 있다.

그 옆에 선 여자 하인은 주인이 입을 외투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 하인들은 귀족들의 등 뒤에서 복잡하고 두꺼운 의상을 직접 입혀주기까지 하고 있다. 귀족의상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정지 모습으로 서 있는 것 같다. 당시의 모습대로 인형들 위에 입혀진 18세기 의상들은 잘츠부르크의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빛나고 있었다.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는 귀족뿐만 아니라, 그 밑에서 종속된 삶을 사는 당시 중세 유럽 서민들의 삶이 그대로 내 마음에 전해지고 있었다. 현대에도 중세시대와 같이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중세의 하인들과 같이 주인에게 종속되어 자신의 생활이 없는 사람들을 눈 앞에서 보는 것도 충격이었다. 책으로 읽는 하인들의 삶보다도 눈앞에 3차원 실물로 보여지는 그들의 모습에 묘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18세기에 잘츠부르크에서 귀족의 아이로 태어났던 행운아들의 생활상이 그대로 생생하게 옮겨져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수제인형을 만지며 놀고 있고, 어떤 아이는 옷을 입다가 엄마에게 꾸지람을 듣고 있다. 그들은 말인형을 타고 놀기도 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한다. 그들은 마치 사진에 담긴 순간의 예술처럼 정지된 동작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정지된 타임머신 속에서 나는 그 당시를 경험하고 있었다.

하인이 고기를 자르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 귀족 저택의 부엌. 하인이 고기를 자르며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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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로운 삶은 식탁에서도 나타나는 법이다. 장대한 저택 속에서는 당시 귀족들의 먹거리 생활이 이어지고 있었다. 여자 하인은 곧 잡아먹을 닭의 목을 비틀고 있고, 조리용 흰 모자를 쓴 남자 하인은 돼지고기의 넓적다리를 식칼로 자르고 있다. 한 하인은 지금 사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중세의 고급 식기들을 닦으며 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섬세하게 재현된 식기에 담긴 음식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나는 듯하다.

갑자기 식기가 '와장창' 하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인이 그릇을 닦다가 실수로 그릇을 깨버린 것이다. 신영이가 그 소리를 듣더니 키득거리고 웃는다. 밀랍인형들이 마치 사람들처럼 현실적인 실수를 하고 있으니 웃긴 것이다.

신선한 굴 요리를 즐기고 있다.
▲ 귀족들의 저녁만찬. 신선한 굴 요리를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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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은 이렇게 하인 여러 명이 만든 음식들을 가지고 성대한 저녁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귀족들이 식탁에 앉아서 입안에 오물거리고 있는 것은 신선한 굴이었다. 유럽에서는 전통적으로 굴을 '바다의 우유'라고 칭하며 최음제나 정력제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 식탁에 앉은 잘츠부르크의 귀족들도 사치스러운 굴 요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만큼 중세 잘츠부르크의 귀족들은 호화스럽고 윤택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식탁 뒤 벽면에 걸린 LCD 화면에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가 있었다. 그는 피아노를 치면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에서는 모차르트를 빼 놓고는 이야기 전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그는 양초가 불을 밝힌 식탁의 와인 잔에 반사되고 있었다.

파파게노가 피리를 불고 있다.
▲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 파파게노가 피리를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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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는 결국 마술 플루트의 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가 사망한 해인 1791년에 작곡한 오페라 ‘마술피리’가 박물관을 울리고 있었다. 나와 나의 가족은 밀랍인형들이 만드는 오페라의 세계 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았다. 총천연색 깃털 옷을 입은 파파게노(Papageno)가 마술피리를 불고 있고, 밤의 여왕은 오싹할 정도로 짜릿한 '복수의 아리아'를 부르고 있었다.

나와 신영이는 귀에 익숙한 '복수의 아리아'를 따라 불러보았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에게 이 도시는 왜 이렇게 음악적 감성을 심어주는지 모르겠다. 박물관 사진 전시실에서 밀랍인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도 이 아리아는 계속 귓전을 맴돌았다. 심혈을 기울여 두상을 만드는 과정을 보면서도 나는 모차르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 모차르트 밀랍인형.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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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출구를 찾다가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모차르트가 곁눈질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징그러울 정도로 사실적인 모차르트에게 하마터면 인사를 할 뻔했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차르트의 눈빛은 살아 빛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왁스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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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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