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짐을 꾸렸다. 새벽 두시 즈음. 연길을 나서 10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달렸다. 기차안에는 객실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훈기로도 녹이지 못할 매서운 추위가 스멀거리고 있었다. 차창 너머가 아니라 객실 안쪽의 기차유리창에도 밤새 얼음이 하얗게 얼어있다 아침녘 해가 떠올라서야 얼음이 힘없이 뚝 떨어져 내렸다. 목단강에 도착하니 차가운 바람이 폐를 찔렀다.
흑룡강성 목단강, 이 곳은 1920년대까지 중국과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이루어지던 독립운동이 일본의 탄압으로 점차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또 하나의 거점이 되었던 지역이다. 김좌진 장군도 말년에는 목단강 해림지역에 있었다. 목단강 동북쪽 밀산이라는 지역에서도 독립운동이 있었다. 그리고 작년 여름에 통화에서 만난 한 조선족이 독립운동가셨던 아버지 고철이라는 분의 삶과 투쟁에 대해 상세하게 얘기해 줄 때도, 목단강이 배경지역이었다.
아버지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끼고 무장투쟁을 하다 이후 목단강쪽으로 이동하여 투쟁과 교육활동을 하였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게는 목단강이 차가운 바람을 품고 살았던 독립운동가들의 땅이요, 아련한 그리움과 같은 곳, 꼭 한 번쯤은 가봐야 할 곳이었다.
목단강시에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김성우 선생님과 이영옥 선생님, 목단강중학교 교장 이길수 선생님 등의 도움을 받아 자료들을 구하고 인터뷰를 했다. 목단강에 도착한 이틀째 2월 2일 김성우 선생님과 이영옥 선생님이 우리를 문금옥 할머니에게 안내했다.
우리가 문금옥 할머니(81)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할머니의 놀라운 기억력, 현실을 보는 냉철한 눈, 그리고 분단된 한반도를 바라보는 안타까움, 무엇보다 할머니의 유쾌함과 맛깔난 이야기 솜씨가 일품이었다. 이틀에 걸쳐 할머니와 진행한 인터뷰동안 때론 숙연했지만, 내내 깔깔대고 웃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아픈 이야기도, 재미난 이야기도 웃음과 버무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우리가 할머니 집에 도착할 무렵, 남한에서는 대통령인수위의 영어몰입교육 논란이 한창 뜨거웠을 때였다. 할머니는 학교 이야기를 한참 하시다, 중국에서도 한국방송을 보고 계신다며 "땐스(TV)를 보다 내가 이런 생각이 들오"라며 말씀하셨다. 할머니 말씀은 이랬다.
"일본 때 우리를 일본말 갈쳐서 내 지금도 조선말 받침도 잘 모르는데, 지금도 내 일본글 쓰라면 잘 쓰오. 편지고 뭐고. 조선말은 받침도 잘 모른단 말이지. 사회를 잘못 만나서 억울해서 죽겠는데, 어째 저기서는, 영어가 국제통일어니까 응당 배워야 하지만 그래도 3학년때부터 영어를 배워주는가, 어째 조선글은 없이 저래 되는가, 어째 콧대 높은 것들 만들려고 저러나 그런 생각이 듭데..... 전체를 영어를 배워주면 전체가 미국으로 유학가고 이래는가. 그러니까 돈도 많이 달아나고 그러니까 조선에서 배워라고 저러는가. 저러다가 미국놈 만들려는가, 우리 조선사람 참 불쌍하오. 생각해보면 아니 불쌍하오."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가 한국의 영어몰입교육을 비판하는데는 까닭이 있었다. 일제시대, 중국으로서는 만주국시대 때 학교를 다녔는데, 그 때 조선어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일어만 배운 것이 지금도 한이라는 거다. 할머니는 일본이 일어를 가르친 것은 단순히 어느 한 나라의 말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놈을 만들려고" 그랬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셨다. 일제시대를 거친 할머니의 눈에 남한의 영어몰입교육은 아픈 역사로 되돌아가는 게 아닌가 우려스러운 듯 했다.
게다가 일본이 지금 와서는 역사 왜곡까지 하니 억울하기 짝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한국 땐스(TV) 보니까, 일본놈들이 우리 학교 갈 적에 성이랑 다 고쳤잖아, 그걸 우리가 하고 싶어했다고 그래 말하더만. 역사를 왜곡해가지고. 우리가 절로 고쳤다고. 야, 억울하다, 그 때 우리 성 아니 고치면 입학서 안 써준다고 해서, 노인들은 안 고칠라고 애를 빡빡 쓰다가 할 수 없이 아-들을 학교에 붙일라고 그랬는데, 그런데 그런 왕청 같은 소리를 하니까. 우리네처럼 일본의 늙은 사람들은 제대로 접수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죽게 되면 어떻게 지내왔는가를 역사를 전혀 왜곡할 것 같애. 일본놈들이."
일본은 1939년 11월 '조선민사령'을 공포하여 이듬 해 2월부터 10월까지 창씨를 신고하도록 하였다. '신고'제도이기는 하였지만, 실제로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불이익을 주었고, 제도적 차원에서 창씨를 강요하였다.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 있던 만주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흔한 방법으로 창씨하지 않는 이들은 학교 입학을 받아주지 않는 것이었다. 할머니도 창씨개명하지 않은 이는 입학원서를 받아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중학교 입학 즈음에 창씨개명하였다고 한다.
"악독했던 일본놈"들의 행적이 "실용"에 묻히려는 요즈음, 할머니의 말씀은 더 이상 역사왜곡은 없기를, 그리고 '말이 곧 사람'임을 분명히 하셨다. 문금옥 할머니와 인터뷰하는 도중에 들어오신 또 다른 할머니가 잠시 밖에 나가자, 문금옥 할머니는 우리들에게 몰래 말씀하셨다.
"저 할머니가 일제시대 때 일본놈 공장에 끌려가서 일했다고. 그런데 모른다카고 절대 말 안하거든. 혹시 문제가 생길까봐 무서워서."
문금옥 할머니의 말씀처럼, 그 할머니는 끝내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아직도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본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꺼내놓지 못하는 분이 계신 것이 역사이다. 이제는 말씀하셔도 된다고 해도, 수십 년 입을 다물어야 했던 개인에게는 아직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실을 묻고만 갈 수는 없다. 꺼내놓고 삐뚫어진 것은 바로 펴놓고 갈 길을 가야한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