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5일, 경기도 광명의 진성고등학교. 종업식을 하루 앞둔 이 날, 그간 쌓여있던 이 학교 학생들의 불만이 집단시위 형태로 표출됐다. 봄방학을 앞두고 있던 상황에서 1~2학년 500여명이 학교 옥상에 올라가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담긴 종이비행기를 일제히 날린 것.
1992년 개교한 이래 처음 발생했다는 이날 학내 시위는 '두발복장 규제폐지' '체벌 중단' '소지품검사 중단' 등 학생 인권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주요 이슈였다. 학교 측의 불합리한 처사와 사학재단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눌려왔던 학생들의 불만이 집단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학생들은 "21세기 다원화 사회를 이끌어가게 될 젊은 학생들이 70~80년대 학생을 군인처럼 양성하던 때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면서 두발규제·소지품검사·체벌 등등 학교생활을 억압하는 불합리한 교칙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또한 "매점에서 파는 값비싼 티셔츠나 코트를 입지 않으면 벌점을 매기는 복장규정이 학생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킨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종이비행기 날린 학생들, 그 뒤에 교내엔 감시카메라가...하지만 학교 측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 학교 박아무개 교사(현 학생부장)는 학내 방송을 통해 "종이비행기와 락카칠 해놓은 낙서 잘 봤다, 2007년까지만 가능했던 일이다, 비판적 사고방식 필요 없다, 불만사항은 학생회를 통해 건의하라"며 학생들의 요구를 일축했다.
아울러 "두발규제는 기존 방침대로 시행해 나갈 것"이라면서 "또 한번 이런 일이 발생하면 상상하지 못하는 강한 교육을 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이 학교 학생 A군은 "'정권이 바뀌는 마당이니 앞으로는 이런 행동이 발생하면 가만 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면서 "시위 이후 학내에 감시카메라가 4~5곳 정도 설치됐다"고 전했다. "학교 폭력 예방을 명목으로 내세우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진성고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이를 주도한 학생들이 청소년인권단체에 제보함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진성고는 경기도내 유명 입시명문고교로 알려져 있으나, 국회 국정감사에서 유령이사회 및 급식비 의혹 등 사학운영과 관련된 문제점이 드러났던 곳이기도 하다. 진성고 이사장은 이번 총선 출마를 위해 한나라당 광명(갑)지역 공천을 신청했다.
청소년 인권운동단체의 한 관계자는 진성고의 상황을 "새 정권의 등장과 함께 앞으로 예상할 수 있는 청소년 인권의 한 단면"으로 소개하면서 "민주적 시민으로 성장해 나가야 할 학생들이 입시의 압박 속에 기본 인권마저 제약당하는 일이 많아질 것 같다"고 우려했다.
학생들의 요구를 "2007년까지만 가능했던 일"이라고 강조한 진성고 학생부장의 표현에는 새 정권의 등장과 함께 교육현장을 바라보는 사학재단의 시각이 녹아 있다는 것이다.
이사장은 한나라당 공천 신청, 학생들은 인권 보장 요구 시위
이명박 정부가 등장하면서 청소년들의 인권과 학내 자율성이 상당 부분 제약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어륀지'로 상징되는 영어 공교육 정책과 자립고로 대표되는 교육 양극화 정책이 입시 위주의 교육을 강화시켜 청소년들의 대내외적 활동을 많은 부분 가로막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여기에 청소들의 사회의식성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보수적 교육계의 목소리도 강해질 것으로 보여져, 정부의 지원 아래 청소년들의 자율성 확보와 인권을 지원하던 청소년 운동단체의 활동도 많이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진보적 청소년 운동단체들은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대내외적 활동을 활발히 하기는 어렵고, 서열화가 심해지면서 탈학교와 아예 공부 자체를 포기하는 학생이 늘어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도 나온다.
또한 그동안 정부 정책에 따라 일부분 활동을 지원 받던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 분위기다. 새 정부의 정책 방향과 단체들의 활동 사이에 거리가 크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21세기청소년희망(이하 '희망')' 백성균 사무국장은 "올해 '청소년 활력 프로젝트' 정도는 수주가 가능할 것 같지만, 최악의 경우 사단법인임에도 지원을 못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놓는 교육정책들에 청소년들의 자율성이나 인권을 배려하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희망'은 그동안 국가청소년위원회 등에서 지원하는 청소년 프로젝트를 통해 청소년들에 대한 활동을 벌여왔다. 이들은 주로 입시에 찌든 학생들에게 학생회로 대표되는 학생자치활동과 동아리활동 지원을 통해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이는 일을 도와왔다.
그러나 외부에서 들어오는 후원회비 등은 경상비로만 간신히 충당되는 상태에서 정부지원 프로젝트가 없으면 활동에 제약이 올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희망이 올해 주활동 목표를 청소년 인권과 자율성 확보에 둔 것은 이같은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중 고등학교의 민주적 학생회 운영 및 동아리 활동 지원에 무게를 두었지만, 올해는 인권 쪽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다.
백 사무국장은 "학생들과 소통하는 것에 중점을 뒀을 뿐 교육 정책에 대해 적극 대응을 못했다"면서 "2007년에는 봉사활동을 많이 했으나 2008년에는 학생들의 교육과 인권에 분명한 목적을 두겠다"고 말했다. 이어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에게 좋은 방향이 될 수 있을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학교가 기업인가... 이런 교육에 청소년 미래 없어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던 지난 25일 청소년단체들은 국회의사당 앞 여의도 공원에서 집회를 열고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을 비판하며, 청소년 자율권 신장을 요구했다.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청소년인권활동네트워크, 희망 등 청소년 단체들은 "이명박 정권이 계획하고 있는 입시정책이 많은 학생들을 실의에 빠지게 했다"며 학교 내 청소년 인권을 보장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참석자들을 대표해 성명서를 낭독한 고등학생은 '경쟁을 강화시키는 교육현실은 입시성적과 경쟁에 휘둘리며 다양성을 파괴할 것'이라면서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청소년들에게 경쟁과 획일적인 줄 세우기만을 강요하고 서민들을 부익부 빈익빈의 잔인한 정글로 내모는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학생 인권 문제나 청소년 활동에 대한 압박이 심해질 것이라는 예상에 청소년 운동단체들이 단호한 결의를 밝힌 것이다.
이날 시위에 참석한 청소년 운동가 전누리씨는 "학교를 기업으로 생각하는 이명박 교육방식에 청소년의 미래는 없다"면서 "교육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어 "청소년 운동도 새로운 논의 구조를 통해 앞으로의 활동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구정인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장도 "20년 전처럼 2~3일에 한 명꼴로 자살학생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된다"며 "청소년들의 인권이나 자율이 상당히 후퇴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앞으로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기도 했다.
청소년 인권 활동가 유윤종씨도 "청소년들의 시험부담이 커지면서 서울 같은 경우 0교시와 야간 자율학습이 늘어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면서 "청소년들의 자율성이 많이 위축될 것 같다"고 예견했다.
아울러 진성고 상황에서 보듯 학생들의 반발을 아예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불만이 표출되는 학생들의 집단행동도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반적인 집회 시위마저 정권이 바뀐 이후 영향을 받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행동 또한 예외가 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교복 색깔로 학생의 등급 결정하는 '이명박식 교육'이같은 청소년 단체들의 움직임에 대해 고척고 김융희 교사는 "청소년 단체 활동가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 감동이 있는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청소년 단체들이 청소년들과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대안 마련이 중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조금이나마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이전 정권에서도 내신등급제가 심한 반발을 샀는데, 이는 교육정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학생 입장을 반영하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근본적으로 한국의 교육정책에는 학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희망' 총회에서 만난 중·고등학생들의 외침에는 이러한 교육 정책에 대한 많은 불만이 담겨 있었다. 이명박 정부 교육정책을 보는 학생들의 답답한 심정, 입시를 통한 서열화 경쟁이 강화되는 교육현실. 그들의 목소리는 처절하기만 했다.
"우리 학교에서 이전에 이명박식 영어 공교육 방침대로 수업한 적이 있는데, 한 반 40명 중 35명이 잤다. 도리어 공부 포기한 사람이 많아졌다. 영어로만 살 것도 아니고 갈 길이 따로 있는데, 그에 맞는 정책이 준비돼야지 이건 아니다.""영어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은 공교육 강화를 위한 사교육비 절감이 될 수가 없다. 대부분이 공교육 강화를 명분으로 한 영어 사교육에 매진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자사고나 특목고는 고등학교를 서열화 시키는 것이다. 결국 교복 색깔로 학생의 등급을 결정하게 만드는 처사다." - 지난 1일, 희망총회에 참석한 학생들의 발언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