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의 슬픈 역사 속에서 고통받던 우리 조상들은 1919년 3월의 첫날, 나라의 독립을 위해 용기있는 발걸음을 내딛는다. 독립 만세 운동의 시작이었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들불처럼 커졌고, 독립운동의 열기는 이내 전국 곳곳, 구석 구석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독립의 열기가 이어진 곳에는 대전의 한 장터도 있었다. 당시에 작은 시골이었던 대전이지만 독립의 열기는 어느 도시 못지 않게 깊고 뜨거웠다. 1919년 3월 16일. 대전 인동 장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한데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이를 용납치 않은 일본 헌병대는 즉각 출동해 총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또 다치게 했다.
하지만 무자비한 탄압에도 독립에 대한 열정은 꺼지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았다. 그리고 한줄기 '빛'으로 역사에 남았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독립운동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것이다. 후에 사람들은 그 역사를 '인동장터독립만세운동'으로 불렀다. 그로부터 89년 뒤인 2008년 3월 15일 토요일 2시, 대전 인동 쌀시장 앞 도로에서는 '인동장터 독립만세 운동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인동 장터 독립 만세 운동 재현은 우리조상들의 소중한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억하는 행사였다. 일제 강점에 저항하다 죽고 다친 슬픈 역사는 이미 89년이나 지난 '옛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런 슬픈 역사에 맞선 조상들의 '열정'은 살아남아 있었다. 그 열정을 후대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대전은 1일과 6일에 장이 열리는데 이 대전장은 (지금의 인동)가마니 시장으로 유명하였다. 대전의 본격적인 만세시위가 이 인동 가마니 시장에서 3월 16일 장날에 터지게 된 것이다. 정오가 지나면서 가마니 구판장에는 겨울 동안 짠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때 난데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모두들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가 보니 누군가가 쌓여진 가마니 더미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중략> 장꾼들은 삽시간에 불어났고 오후가 지나면서 격렬한 시위로 변하여 인동일대와 경찰서가 있는 원동을 돌며 만세를 외쳤다. 그런나 그것도 잠시 용두동 (전 문화방송 자리)에 있는 헌병대와 문화동 (전 한국은행 대전지점 자리)에 있는 보병대가 출동하여 무차별 총격으로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중략> 이날 결국 15명이 사망하였고 수십명이 부상하였으며 9명이 체포되었다. (대전시사 중에서)
이날 행사에서는 풍물단 공연을 비롯해 기미 독립 선언문 낭독, 진혼굿 등의 다양한 행사가 열렸지만 무엇보다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만세 운동 재현 및 거리극이었다. 민족예술단 우금치가 주연한 극의 주요내용은 일본의 착취와 수탈로 고통을 겪는 민중이 들고 일어나, 총칼로 위협하는 일본 헌병대를 도망가게 만드는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일본군 진격, 일제 침략마당, 착취와 수탈, 인동장터의 함성, 만세시위, 대결로 이어진 재현행사는 관람객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전해주었다. 3·16 인동장터 독립만세 운동 재현행사를 보기 위해 모인 천여명의 관람객들은 이런 극의 진행과 한데 어우러져 인동 장터 주위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그런 뜨거운 성원 속에 만세 재현행사는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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