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김병종 개인전이 3년 만에 사간동입구 쪽 갤러리현대 본관과 두가헌갤러리에서 오는 26일까지 열린다. 쿠바와 멕시코,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 남미의 불타는 태양에서만 나올 수 있는 황홀한 색채에서 얻은 환상적 풍경을 펼친다.
우리 역사 속에 묻힌 예인(藝人)들의 삶의 현장과 예술적 업적을 파헤친 '화첩기행'으로 번뜩이는 글 솜씨를 보인 그가 이번 전에 맞춰 신간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도 내놓았다.
김병종은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색채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인으로 '생명의 노래' 연작 등에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 이미 오래다. 이번엔 라틴세계에 가서 생동감이 넘치는 날것의 원초적 색감에 푹 빠져있다 돌아왔다.
그의 여행은 색채를 탐색하는 즐거운 고행
여행이란 화가에게 색채와 풍경을 탐색하는 즐거운 고행인지 모른다. 작가는 누구보다 예리한 감수성의 소유자이기에 전혀 가보지 않는 곳에서 만나는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접했을 때 받는 감격이나 충격 혹은 희열은 클 것이다.
'멕시코 기행'에서 보면 그의 작가적 역량과 재능이 이런 풍경과 만나면서 최대로 발휘된다. 여기에 등장하는 소와 닭, 물고기와 고양이, 선인장과 거리악사들의 모습 하나하나가 독립된 그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나름의 독특한 질감과 색조로 띄고 있다. 이것이 전체적으로 하모니를 이루어 마치 재즈연주나 오케스트라를 들려주는 것 같다.
이 그림은 이번 전의 부제 '길 위에서'와 잘 어울린다. 작가가 여정에서 만났던 그리고 듣고 보고 느낀 상념들이 그의 상상력과 만나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을 발견케 하고 이를 그림에 전이시켜 우리에게 커다란 마음의 선물을 준다.
동심을 고스란히 간직된 그림
김병종의 '쿠바일기'를 보면 영락없이 동화 속 풍경이다. 마치 쿠바 아니 수도 아바나를 압축시킨 카드엽서 같다. 모두 둥글둥글하고 뭐하나 모진 데가 없다. 그림 속 아이콘이 다 귀엽고 정겹다. 말, 나무, 나비, 태양, 선인장, 야자수, 자동차, 작은 집들 그리고 악사, 수영하는 소년, 소곤대며 이야기 나누는 이들 모두가 한 가족이 된다.
쿠바에 대한 김병종의 현란한 수사학은 거침없고 끝도 없다.
"카리브 해의 흑진주 쿠바하고도 아바나, 살사 리듬과 혁명의 구호가 타악기와 랩처럼 공존하는 땅, 해풍에 삭아 내린 페인트조차도 표현주의 회화의 화폭으로 전이되는 곳, 원색 판넬집과 나부끼는 색색의 남루한 빨래에서조차 치유할 수 없는 낙천성을 내뿜는 곳… " 우리는 이런 그림에서 작가의 천진무구한 시선과 하찮고 시시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평범한 사람들 속에 숨은 인간미를 읽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아직도 혁명가가 영웅이 되는 나라 쿠바, 그렇다면 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아직은 적다는 소리고 또한 가난하게 산다는 뜻인데 그렇지만 너나없이 사는 형편이 고만고만해서 그런지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치 지상낙원에 사는 것 같은 사람들의 몸짓을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작열하는 태양이 이런 춤을 추게 하나
김병종의 말처럼 탱고는 '몸을 쓰는 최고의 시'라고도 한다지만 '장밋빛 인생'에서 보는 춤은 그냥 춤이 아니라 광란의 몸짓으로 푸는 그들만의 카타르시스가 아닌가 싶다.
하긴 미술평론가 이주헌 씨도 이번 전시 평에서 "그림 속 주인공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이 그저 단순한 동작이나 행위로 보이지 않고 열정을 못 이겨 그렇게 뿜어내고 분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고 말한 바 있다.
태곳적부터 태양신을 숭배한 이곳에서 이글거리는 태양은 그들에게는 삶의 에너지원일 것이다. 격렬한 춤도 삶의 대한 찬미도 다 태양 탓인지 모른다. 주머니는 가벼워도 그런 태양 아니면 줄 수 없는 야자수와 그늘 그리고 푸른 하늘과 바다를 맘껏 즐길 수 있기에 부자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이 다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악사(樂士)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흐르는 삶의 애한과 슬픔도 엿보인다. 또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결핍 등으로 드리워진 그림자와 그 내면에 흐르는 우수와 고통도 느껴진다.
한국색동에 라틴원색을 입힌 듯
원숭이 섬이라고도 불리는 '마아우 섬'을 보니 정말 한번 가고 싶다. 보기 드문 생태의 보고(寶庫) 같다. 김병종의 그림에서 전반적으로 수성(水性)이 풍부한 건 역시 작가의 고향인 지리산 계곡과 관련이 있다. 폭포에서 소도 함께 놀던 때의 달콤한 경험담을 들어봐도 그렇다.
이 그림은 어려서부터 봐왔던 색동, 그 알록달록하고 울긋불긋한 빨갛고 파랗고 노랗기도 한 그 색에 라틴원색을 입힌 것 같다. 그리고 어려서 입으면 마음이 푸근해지고 편안해지는 색동한복, 그 감촉과 그 아련한 추억도 다시 떠오른다.
김병종은 화가로써 색채를 탐구하는 것이 그의 본업일 터, 우리의 오방색계열 색동과 강력한 햇살이 만들어 낸 라틴원색이 만나 또 다른 색의 분위기를 연출하니 참 멋지다. 전율과 함께 색채의 또 다른 지평이 열리는 것 같아 또한 반갑다.
이런 색채라면 지상낙원이 따로 없네
여기 소년과 물고기가 하나가 되어 노는 카리브 해의 석양을 보니 정말 아름답다. 지상낙원이 따로 없다. 그래서 작가는 이를 보고 '신(神)의 색채'라는 이름 지었다. 매순간 달라지는 물빛, 그 색채가 주는 풍성함을 무엇과 비교하랴. 하늘의 무지갯빛과 대조해 보는 바다의 오색찬란한 빛은 가히 매혹적이다.
그의 그림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 세월이 갈수록 감성은 더 어려진다. 작가는 나날이 유년시절의 동화 같은 주인공으로 돌아간다. 어려서 계곡에서 물장구치던 시절의 즐거움이나 짜릿함 그 때 받았던 착시현상 아니 착란증이 반영되어 있다. 하긴 그런 경험이 없이 어떻게 사물을 제대로 꿰뚫어보는 화가가 될 수 있겠는가.
그의 타오르는 창작열은 어디에서
끝으로 그의 불타는 창작열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참 궁금하다. 최근 급한 일로 생사거래나 마찬가지인 총알택시를 탔다가 큰 부상을 입어 병원에 입원까지 했단다. 몇 년 전에 추운 겨울 작업실에서 자다 연탄가스로 거의 죽을 뻔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적도 있다.
그를 이런 죽음의 문턱에서 건진 이는 누구인가? 그는 바로 아내 정미경 씨의 힘이 아닐까 싶다. 2006년에 '이상문학상'을 받은 중견작가다. 가까이고 보니 지성미 넘치는 보기 드문 미인이다. 화가와 소설가, 둘은 창작자로서 경쟁하고 협조하면서도 때론 우정 어린 충고를 아끼지 않는 동료이기도 하니 보기 좋다.
그에게 농담 투로 "오늘 그림을 보니 남편의 어리광이 더 심해질 것 같은데요"라고 했더니 "그래요 나이 들수록 더 어려져요"라고 대답한다. 하긴 이런 것이 예술가적 기질 아닌가. 두 분은 서로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주고받겠지만 더 힘내라고 박수를 보태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갤러리현대 사간동 122. 02-2287-3591 http://www.galleryhyundai.com 휴관: 월요일
김병종 1953년 전북 남원 생.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 수상: 선 미술상(1995) 한국미술작가상(1991)
저서: 김병종의 화첩기행 I, II, III, IV 김병종의 라틴화첩기행(2008)
화집: '바보예수' '생명의 노래' '길 위에서' 개인전: '생명의 노래'(갤러리현대 2005) 외 10회
소장: 영국 대영박물관, 캐나다 온타리오왕립미술관, 과천국립현대미술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