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4일 눈을 뜨고 창문을 여니 여전히 덥다. 30℃는 넘는 듯하다. 더위에 약간 지친다. 어제 하루를 밖에 나가지 않고 호텔에서 두문불출했는데 몸도 굳은 듯하고 다시 남쪽으로 가야 하니 왠지 좀 게을러진 듯 느릿느릿 일어났다. 후베이를 떠나 장시(江西) 성 최북단의 져우장(九江)으로 향했다. 다른 성으로 가는 길은 늘 멀다고 느껴지는데 사실 3시간 거리니 아주 가깝다. 져우장에 이르니 약간 날씨가 흐리다. 그래서인지 기온이 좀 내려간 듯하다. 다시 세계문화유산인 루산(庐山)으로 가려면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10인승 정도 되는 버스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10분 정도 기다렸는데도 나까지 두 명이다. 버스가 출발하더니 져우장 시내 어느 한 사거리에서 30분이나 정차한다. 그래도 30분만에 다 채웠으니 다행이다. 버스는 30분 정도 평지를 달리더니 드디어 산길 도로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점점 오르막길을 한없이 오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하늘이 온통 새까맣게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비가 내린다. 루산 입구에 버스가 정차하더니 입장권이 없는 사람은 내려서 사오라고 한다. 버스에서 내렸더니 비가 쏟아지는 것에도 당황했지만 날씨가 엄청 추워서 기겁을 했다. 몇 사람이 내려서 표를 사고 뛰어 돌아왔다. 그런데, 표를 사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입구를 통과할 때 보니 그들은 전부 이 루산에서 근무하거나 사는 주민인 것이다. 관광객들만 200위엔(한화 약 3만원)이나 하는 표를 사는 것이다. 루산의 중심인 구링(牯岭)은 해발 1164m로 그 형세가 수소와 닮았다고 해 지어진 이름이다. '구(牯)'는 '수소'이고 '링(岭)'은 '고개'이다. 오후 늦게 도착하니 휘몰아치는 바람과 산 전체를 덮고 있는 안개, 그리고 산 아래와 온도 차가 무려 15℃ 이상 차이 나는 4~5℃의 날씨였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고개 아래를 내려다보니 반대편 산기슭에 펼쳐진 별장과 산을 넘는 구름이 빠른 속도로 옮아가고 있다. 구링의 아침은... 산뜻하다? 상큼하다?
숙소도 구해야 하지만 우선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침을 먹고 나서 다음 행선지가 가깝다 느껴 게으름을 피웠더니 중간에 점심을 먹지 못하고 저녁 무렵이 된 것이다. 게다가 반팔에 반바지를 입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 고개 아래로 이어진 식당 중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동북요리를 하는 식당이다. 대충 음식을 주문하고 배낭을 열어 긴 팔 옷부터 하나 찾아 입었다. 하루면 다 보겠지 하는 생각에 호텔을 잡았다. 추워서 두루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호텔로 들어가서 그냥 방에 짐부터 내려놓았다. 그리고 생각하니 정말 한산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할인해도 될 뻔 했다. 씻고 나서 몸을 좀 녹이니 바깥이 궁금해졌다. 구링 시내를 두루 걸었다. 빗물이 남아있는 거리에 조명이 빛나니 산뜻해 보인다. 고개 아래 쪽 골목으로 내려가니 재래시장이 형성돼 있다. 사람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이동하는 모습이 여느 도시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한 찻집 옆에서 향긋한 냄새가 난다. 기름이 떨어지면서 튀긴 통닭이 빙빙 돌아가고 있다. 담백한 닭튀김은 원래 좋아하는 품종이라 입맛을 다셨다. 이 한 마리를 사서 다 먹을 수 있을까. 아마 저녁을 먹지 않았으면 눈 딱 감고 샀을 지도 모르겠다. 대신 과자인 가오빙(糕饼)이 눈에 들어와서 루산 특산이라는 차로 만든 과자, 차빙(茶饼) 한 봉지를 샀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때문에 감기가 들릴 지도 모른다. 여행 초기에 감기 기운이 있어서 약 먹고 금방 나았고 라싸에서 고산병으로 약간 고생한 것 외에는 그 동안 특별히 아파 보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수상하다. 급격한 온도 차는 위험하다. 그래서, 발 안마하는 곳을 찾았다. 1시간 가량 뜨거운 물에 발을 씻고 안마를 했더니 한결 몸이 가뿐하다. 잠도 잘 와서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이불을 덮었다. 9월 5일 오전 7시, 차빙과 뜨거운 물로 배를 채우고 체크아웃을 했다. 터미널에 가니 오후 2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있다고 한다. 표는 미리 팔지 않는다. 빨리 서둘러야 하겠다. 생각보다 루산이 볼거리가 많아서 하루 일정으로 오기에는 벅차구나 생각했다. 터미널 앞 구링의 언덕에서 바라본 전경은 한 폭의 수채화였다. 19세기말 영국 선교사 이덕립(李德立)이 입산해 아름다운 산세를 보고 이곳에 별장(别墅) 마을을 건설했다. 당시 시원하다는 뜻의 'Cooling'의 음을 따서 원래 구녀우링(牯牛岭)이던 지명을 '구링'으로 바꿨다고 한다. 구링의 아침, 산 아래로 휘감아 오는 안개 속에 별장마을 분위기가 운치가 넘친다. 선명하다 못해 산뜻, 상큼, 생생 그 어떤 말로도 잘 표현하기 어렵다. 바로 옆으로 갑자기 비둘기 떼가 몰려들어 '구구구'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해발 1000m, 하늘과 맞닿은 호수 루친후(如琴湖)
구링 아침을 더욱 맛깔스럽게 하는 새소리가 서서히 늘어나더니 이윽고 귀가 따가울 정도가 된다. 한 할머니가 비둘기모이(鸽食)를 1위엔에 팔면서, 팔아야 할 먹이를 모이 주듯 던져놓고 있기 때문이다. 지붕 위에 앉은 비둘기들이 참 평화롭다. 지도를 따라 걸었다. 산 기슭 곳곳에 별장들이 보이는 한산한 아침거리를 1시간 가량 걸으니 거문고를 닮은 호수인 루친후(如琴湖)와 만났다. 길게 생겼다는 말인데, 가까이에서 보니 금방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잔잔한 호반인데다가 해발이 1000m에 이르는 고산지대에 이렇게 멋진 호수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고 가볍게 산책을 하는 사람도 있다. 호반 주위로 예쁜 꽃도 피었고 나룻배도 고요하게 서 있기도 하다.
루친후 옆에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사마(司马) 벼슬을 할 당시 이곳을 찾아 쓴 '대림사도화(大林寺桃花)'라는 시를 남겼다. 늦봄이라 산 아래에는 이미 진 도화 꽃이 이곳에는 화창하게 피기 시작한 것에 빗대어 감탄사로 뿜어낸 것에서 화징(花径)이라는 이름의 명소가 된 것이다. 정자도 있고 연못도 있고 작은 초당도 있다. 초당 안에는 붓글씨를 쓰는 묵객(墨客)이 있어 사람 이름을 시제로 시를 짓고 부채에 써서 판다. 이름하여 이명작시(以名作诗)라 한다. 한 중국사람이 160위엔을 내고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부채를 들고 기뻐한다. 주인 아주머니는 '헌여우첸(很有钱)' 즉 부자가 될만한 시라고 훈수를 두기도 한다. 호수 서편에는 장장 2500m에 이르는 진셔우구(锦绣谷)이 자리잡고 있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계곡에서 안개에 뒤덮인 루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한다. 계곡 초입에는 '하늘다리' 텐챠오(天桥)라 부르는 자그마한 바위가 계곡 사이에 불쑥 드러나 있다. 이 바위에 서서 사진을 찍으면 마치 하늘을 오르는 분위기를 만드는 그런 곳이다. 마오쩌둥이 앉아 명상에 잠기던 자리에 앉는 비용은?
가파른 산길을 따라 가니 사자 입처럼 생긴 스즈커우(狮子口) 낭떠러지(悬崖)가 나오는데, 그 바로 아래 하오윈스(好运石)라 부르는 큰 암석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이 암석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남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여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돌을 만져야 행운이 생긴다고 한다. 작은 샘물인 판칭췐(梵青泉)을 지나 관먀오팅(观妙亭)에 이르는 계곡은 참으로 세계문화유산다운 아름답고 산세의 전망이 좋은 곳이다. 진셔우 계곡을 지나가니 시엔런둥(仙人洞)이라는 글자가 또렷하게 새겨진 곳이 나타났다. 보통 신선과 관련된 곳은 도교 유적지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사(道士)가 이곳에 거대한 암석을 옮겨와 새겼다고 한다. 옛날에는 한 방울의 샘물이란 뜻의 이띠취엔(一滴泉)이라 불렀다 하는데, 동굴 속에는 암석에서 떨어진 물이 만든 자그마한 샘이 하나 있다. 1905년에는 장안에서 온 도사(长安道士)가 도교의 천신이며 교주이며 도교의 삼청(三清) 중 세 번째 지위의 도덕천존(道德天尊)을 기리는 사당인 태상노군전(太上老君殿)을 건립했다고 한다.
도교의 삼청(三清)은 신선이 거주하는 곳으로 옥청(玉清)은 원시천존(元始天尊), 상청(上清)은 영보천존(灵宝天尊), 태청(太清) 도덕천존의 순위이다. 중국에서 삼청각이나 삼청전에 가면 위 신선들을 모시는 사당을 흔이 볼 수 있다. 태청(太清)은 노자를 원형으로 한다고 전해지고 있다. 영험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이라 여기는지 점을 보는 관광객들이 있다. 작은 팻말을 하나 뽑으면 향불 앞에서 뭔가를 적은 종이로 바꿔주고 다시 태상노군전으로 가면 그 안에 있는 도사들이 길흉화복을 점쳐 준다. 도교 용어를 더 공부해서 꼭 한번 팻말을 뽑아봐야겠다. 계곡을 따라 계속 가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의자에 앉아 10위엔씩 돈을 주고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다. 바로 마오쩌둥이 앉아 명상에 잠기던 자리라고 한다. 1959년 7월 한달 당 중앙은 이곳 루산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연다. 정치국원을 비롯 각 성과 자치주 서기, 국가기관 부문 책임자들까지 모두 모인다. 이 자리에서 당의 좌경화 흐름을 경계하고 새 진로를 모색하는 마오쩌둥의 연설이 있었다고 한다. 루산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멋진 자연경관 때문이건만 그 틈새를 차지하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얄밉다. 물론 허가를 받아 하는 것이겠지만 대단하다. 마오쩌둥이 앉았던 자리 부근 높은 나무에 앉은 원숭이가 그런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도 재미있다.
산에서 내려오는데 한쪽 옆에 레일 달린 차량을 타고 내려갈 수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없어서 이상했지만 재미있을 것 같다. 생각보다 아주 빠르게 내려간다. 약간 무서웠다. 고장 나면 떨어질 텐데 하는 두려움 때문일까 손으로 브레이크를 당겼다. 차량이 섰다. 다시 출발하려는 곳이 평평하다. 그러니 차가 출발하지 않는다. 몸으로 왔다 갔다 해도 움직이질 않는다. 다시 자세히 보니 옆에 출발하는 키가 붙어 있는 것이다. 산 아래로 내려왔다고 생각했는데 중간 지점이다. 지도를 보고 시계를 봤다. 이제 오전 11시. 아직 2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택시를 타고 돌아갈까 아니면 새로운 산길을 따라 더 갈까 약간 고민을 했다. 한적한 오솔길에 서화를 나무 사이에 걸어놓고 파는 가게 옆에서 앉았다. 루산 전 지역은 중국에서는 드물게 금연이다. 계곡 마다 대신에 담배 피는 곳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국사람들은 아무 곳에서나 습관처럼 담배를 피워 문다. 참자. 다시 새로운 산길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가까운 곳에 사원이 하나 있으니 그곳까지 일단 가자. 텐츠쓰(天池寺)에 이르니 넓은 광장도 있고 흡연실도 있다. 암자 수준의 작은 사원 앞 연못에 붕어들이 노닐고 있다. 연못 바닥에 항아리가 있고 동전들이 수북하게 쌓이고 있다. 계곡 잇는 다리 위에서 본 풍경, 루산의 진면목
잠시 쉬면서 지도를 다시 보니 반대편 길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있다. 절벽 롱셔우야(龙首崖)를 거쳐 오는 사람들인 것이다. 다시 산길을 따라 내려가 보기로 했다. 이 절벽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많다. 낭떠러지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내렸다가 또 오르고 하면서 트레킹하는 것은 정말 기분 좋다. 곳곳에 암석들의 향연을 보는 듯 여러 가지 모습을 띠고 나타나니 신기하다. 사자암(狮子岩), 문인암(方印岩), 문수암(文殊岩), 청량암(清凉岩) 등 암석들을 보면서 산을 타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다. 멀리 계곡과 계곡을 연결한 다리가 보였다. 힘차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도 보인다. 땀이 샘솟기 시작이다. 날씨가 추워서 입었던 긴 팔 옷을 벗어 배낭에 넣어야 했다. 30여 분을 더 가니 티에촨펑(铁船峰)으로 넘어가려면 산 하나는 넘어야 한다. 그런데, 산과 산을 잇는 높은 다리인 티에숴챠오(铁索桥)가 연결고리가 된다. 돌과 돌을 쇠사슬로 연결한 다리인데 가만 보니 약간씩 흔들린다. 계곡을 타고 부는 바람이 아주 강하다. 세차게 불어서인지는 모르나 약간 두려웠다. 1993년에 만들었다고 하는 이 다리 중간에 섰다. 사방을 둘러보니 그야말로 루산 풍경의 진면목을 보는 듯하다. 사방이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산봉우리이다. 다 이름이 있을 터이나 흔들리는 다리에서 오래 머물기 참 불안하다.
다리를 건넜다. 이곳에도 마오쩌둥이 앉았던 자리가 있다. 즉석에서 칼라 프린팅을 해주기도 한다. 샘플 사진을 보니 배경에 일출 모습이 있다. 산봉우리 옆으로 솟아나는 붉은 해가 정말 장관이다. 군복을 입고 찍은 사람들도 있다. 외국인도 있다.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새벽 산행을 시작해 일출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옆에 케이블카가 있다. 이것을 타면 산꼭대기로 올라간다. 처음에는 당황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버스 정류장이 있고 그 옆에 수력발전소가 있다. 그 주변에서 나비와 벌 등 벌레들이 많아서 한동안 지켜봤다. 나무와 꽃들도 정겨웠다. 구링까지 택시요금을 물어보니 30위엔이라고 한다. 20위엔으로 깎고 택시를 탔다. 운전사가참 순박하다. 한국사람들 많이 오는가 물으니 거의 못 봤다고 한다. 본 적은 있느냐 했더니 몇 달 전에 한 명 봤다고 한다. 짐을 맡겨둔 호텔을 갔다가 다시 터미널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흔쾌히 좋다고 한다. 터미널 길가에 버스가 한 대 서 있어서 물어보니 져우장 시내로 간다. 매시 정각에 출발하는 버스가 아니라 관광버스였다. 무거운 배낭을 들어주기도 하고 잠시 5분 정도 기다리면 금방 출발한다고 친절하게 이야기도 해준다. 이곳 사람들은 아직 때가 덜 묻은 듯하다. 다른 세계문화유산 지역이라면 하루에 몇 번 스트레스 받을 만하다. 그런데 전혀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이상할 따름이다. 버스가 루산 구링 시내를 따라 서서히 출발했다. 발걸음이 참 아쉽다. 언젠가는 다시 꼭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칠순이 넘으신 아버지가 이런 자연경관, 멋진 산의 정서를 좋아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구링을 떠나 버스를 타고 산 굽이굽이 끝도 없이 내려가고 있다. 어제 올라올 때는 날씨가 흐려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정말 아름다운 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