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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 번 찾아뵙겠노라 했는데,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네요. 꺼얼무(格爾木)에서 덜컹거리는 지프차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려 꼬박 하루 만에 도착한 라싸. 잠잘 곳도 정하지 못한 채 낯선 도시를 헤매 다니다, ‘아리랑’이라는 세 글자를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오지 중의 오지인 그곳에서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들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십여 년 전 우연히 여행 왔다가 이곳이 좋아 고향 울진을 버렸다(?)며 옛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그때가 엊그제 일처럼 또렷합니다.

어느 호텔이 괜찮은지, 어느 티베트 식당이 먹을 만한지, 또 가볼 만한 곳은 어디며 교통편은 어떻게 되는지 등 그곳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게 주셨죠. 아저씨는 얼치기 중국어 실력 하나만 믿고 온, 겁 없는 젊은 여행자에게 나침반과도 같은 분이셨습니다.

아저씨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맨 처음 시켰던 메뉴가 김치 송송 썰어 넣은 얼큰한 라면이었습니다. 가게에서 아마 가장 비싼 음식이었죠. 매상 올려주었으니 좋은 정보 하나 주겠다며, 맨 처음 가보라고 권한 곳이 어딘 줄 기억하세요?

바로 조캉 사원입니다. 티베트의 중심이 라싸이고, 라싸의 중심이 바로 조캉 사원이라며, 여행자라면 맨 먼저 찾아가 왔노라고 인사드려야 하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한달음에 달려갔고, 라싸의 지리적 랜드마크가 푸달라궁(布達拉宮)이라면, 정신적인 심장부이자 티베트인들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곳이 바로 조캉 사원임을 알았습니다.

조캉 사원에서 만났던 가족

성지인 조캉사원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티베트인들의 모습.
 성지인 조캉사원을 향해 오체투지하는 티베트인들의 모습.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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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루한 옷차림에 조캉 사원 앞 바코르 광장에서 오체투지하는 한 티베트인 가족을 만났습니다. 이곳에 오기 위해 한 달이라는 그 먼 길을 마다 않은 그들 중에는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땅을 베개로, 하늘을 이불 삼아 노숙을 해온 터라 변변한 짐 꾸러미 하나 없는 그들의 초라한 행색이 가여웠지만, 외려 그들의 거뭇한 얼굴에는 웃음만 가득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힘이라면 그것은 종교의 신비를 넘어 머리를 쭈뼛하게 서게 할 만한 두려운 그 무엇이었습니다. 티베트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 그곳에서 대규모 유혈 시위가 벌어졌고, 100명 가까운 티베트인들이 희생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가슴 아파하던 그날 밤, 조캉 사원에서 만났던 그 가족을 꿈 속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눈인사를 건넸지만, 잔뜩 주눅이 든 표정이었습니다.

평화롭고 행복해 하던 그때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두려움에 떨며 가족들의 손을 꼭 잡은 채 누군가에 쫓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바코르 광장에는 낡은 방석과 헤진 장갑 등 그들이 정성스레 바친 오체투지의 흔적만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주인 잃은 마니차가 군홧발에 짓이겨지고 평평한 벽돌이 깔린 고풍스러운 도로 위에는 인력거와 손수레 대신 장갑차와 군용 트럭이 늘어서 있습니다. 시간이 멈춘 듯 느리고 나른한 풍경이 인상적인, 아무리 걸어도 싫증나지 않는 정겨운 길이었는데, 그곳에는 을씨년스럽고 살벌한 기운만 가득했습니다.

예닐곱 살짜리 아이의 살려달라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습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현관에 나가 조간신문을 들었더니 1면에 꿈에서 본 장면이 사진이 되어 실려 있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사진 속 무장한 군인들이 늘어서 있는 곳은 아저씨의 아리랑 식당 근처임에 틀림없습니다.

아저씨는 어느 날 함께 점심을 먹으며 티베트의 고단했던 현대사를 직접 겪으신 일인양 들려주셨습니다. 티베트 망명 정부의 존재와 그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권위가 조금도 흔들리지는 않았지만, 티베트가 ‘중국 속의 비(非)중국’으로 남아있을 날도 머지않았다고 하셨지요.

구도심 서쪽에 조성한 불야성의 신(新)라싸를 거닐면서, 또 티베트어보다는 중국어에 더 익숙한 수많은 티베트 젊은이들을 보면서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칭짱(靑藏) 철도의 개통 소식을 전해 들으며 중국 정부가 티베트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어버리려 한다고 여겼습니다.

역사의 왜곡마저 서슴지 않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소수민족 동화 정책은 의도한 바 대로 그렇게 ‘성공’하리라 믿었죠. 더욱이 1951년 중국에 강제 병합된 이래 1959년과 1989년에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유혈 시위가 있었지만, 국제 사회의 별반 관심과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스러졌고, 더 이상의 반중(反中) 시위는 없을 것이라 공감했습니다.

라싸에서 보름 동안 머무르며 관광지에서, 식당에서, 또 길거리에서 수많은 티베트인들을 스치듯 만났습니다. 그 어디에서든 그들의 삶은 찌들대로 찌든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화려하게 변모하는 라싸의 이면, 좁디좁은 뒷골목은 예나 지금이나 그들의 차지입니다.

그런데도 도무지 찡그릴 줄 모르는 그들의 웃는 얼굴에서 ‘불만’과 ‘저항’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자기네 땅에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는 ‘이방인’들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 그들이 바보스럽고 밉기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아저씨와 제가 공감했듯, 그렇게 끝날 것 같았던 ‘평화’는 티베트의 본모습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또 다시 그들의 홀로서기 위한 몸부림이 시작되었습니다. 티베트 여인과 아이들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승려의 가사가 찢기며, 적지 않은 티베트 젊은이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익숙해진’ 장면을 다시 접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희생이 있어야만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힘없는 티베트인들의 간절한 외침이 눈가에 이슬이 맺힐 정도로 처절합니다. 총칼을 들이대는 진압이 가혹해지면서 그들의 외침 또한 죽음을 각오한 폭력이 되어 맞서는 듯합니다.

오늘 유난히 아저씨가 뵙고 싶습니다

외국 여행객은 물론, 외신 기자들도 하나둘씩 다 빠져나가고 있다 하니, 이제 남은 건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학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핏빛 먹구름 가득한 라싸의 텅 빈 거리 사진을 보며 마치 제가 지금 그곳에 있는양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건, 그때 만난 티베트의 순수한 영혼들이 머릿속에 깊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 한 번은 아저씨 가게에 들른 티베트인들이 우리의 아리랑 곡조를 참 좋아한다며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라고 하셨지요. 굳이 그것이 핍박 받아온 역사적 경험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금 그들이 겪고 있는 극심한 고통을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올 여름에 올림픽을 구경할 요량으로 베이징에 갈 계획이었습니다. 이번 일로 그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고쳐먹었고, 아예 그 참에 라싸로 갈까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한 번 찾아뵙겠다고 한 아저씨와의 약속도 지킬 수 있는 셈이니 말입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티베트에 남게 될 참혹한 생채기를 직접 돌아보면서, 비록 이방인이지만 적어도 그들과 공감하고 있다는 따뜻한 시선 정도는 보여주고 싶습니다.

3년 전 라싸에서의 보름이 무척이나 생생하게 기억되는 요즘입니다. 진정 ‘평화로운’ 티베트에서, 아저씨와 함께 김치 송송 썰어 넣은 라면을 먹으며 즐거운 이야기 나눌 그날을 기다립니다. 건강하십시오. 오늘 유난히 더 뵙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문 내용 중 '오체투지'란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불·법·승 삼보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한다는 뜻에서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하는 큰절입니다.
또, '마니차'란 불경을 넣은 원통으로, 한 번 돌리면 그 공덕이 경전을 한 번 읽는 것과 같다고 여겨지는 티베트 불교의 불구입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태그:#티베트 유혈 시위, #티베트 분리독립운동, #라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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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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