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세리 성당과 공세곶 창고의 역사
문화유산을 답사하면서 오전에는 경기도 안성에 있는 안성 객사와 구포성당 그리고 청룡사를 둘러보았다.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차를 몰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194번지에 있는 공세리 성당을 찾았다. 현재의 공세리 성당은 1922년 10월8일 에밀리오 드비즈 신부(1871-1933)에 의해 봉헌된 이래 충청남도 북부 지역에서 신앙의 못자리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공세리 지역 신앙의 뿌리는 이보다 훨씬 더 깊어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내포지역 사도인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의 영향으로 이곳 공세곶에도 천주교 교리가 전파되어 1800년대 초에 다수의 신자들이 생겨났다.
1866년(병인)에는 천주교의 지나친 확장을 우려한 조정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병인박해다. 이때 공세곶 출신의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3형제를 포함한 28명의 순교자가 죽음으로 신앙을 지켜 이곳이 성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한 세대동안 신앙의 맥이 끊겼다가 1895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비즈 신부가 이곳 공세리에 부임하면서 다시 포교가 시작됐다. 그는 먼저 현재의 공세리2구 마을회관 터에 성당을 지어 포교를 재개했고, 이후 옛 사제관 터에 한옥 성당을 지어 천주교 교리를 전파했다고 한다.
1922년에 이르러서 드비즈 신부는 공세곶 창고터를 매입하여 그곳에 서양식 성당을 지었으니, 그것이 현재의 공세리 성당이다. 현재 성당 건물은 문화재 가치가 인정되어 충남 지정문화재 144호로 보호를 받고 있다. 드비즈 신부의 포교를 기점으로 공세리 성당은 11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공세리라는 명칭은 나라에 공물(貢物)로 바치는 세금을 뜻하는 공세(貢稅)에서 나왔다. 이곳은 조선시대 충청과 전라 그리고 경상도에서 모인 세곡을 잠시 보관했다가 한양으로 이송하던 창고터가 있던 자리다. 고려말 조선 초부터 해운과 수운을 이용하여 세곡이 서울로 이송되었는데, 이곳 공세곶(貢稅串) 창은 1478년(성종 9) 설치되어 주로 충남 지역의 세곡을 바닷길을 통해 서울로 운반하였다. 이때 곶(串)은 육지가 바다 쪽으로 돌출되어 나온 부분을 말한다.
공세곶 창에는 해운판관이 파견되어 행정 업무를 처리했으며, 세곡 운반을 위해 15척 조운선을 운영하였다. 처음에는 세곡을 언덕에 야적하다가 1523년 80칸짜리 창고를 지었으며, 이름도 공세곶 창에서 공진창으로 바꾸고 조선 숙종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조선 후기에 이르어 세곡을 화폐로 대신하면서 창고 역할이 축소되었고 조선시대 말까지 충남 북부 지역 창고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갔다.
공세리 성당 주변 신앙의 흔적들 1인주농협 공세지소를 지나 공세2리 마을회관에 차를 세운 우리 일행은 약간 언덕이 진 길을 따라 공세리 성당으로 향한다. 공세리 성당은 공세리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성당에 이르러 '공세곶 창지와 천주교회'라는 표지석을 보는데 수녀님이 쫓아와 어디서 왔으며 몇 명이나 왔는지를 물어본다. 나는 충주 전통문화회에서 약 45명이 왔다고 대답을 하고 안내를 좀 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수녀님은 그냥 한 번 죽 둘러보면 될 거라고 하면서 사양을 한다.
계단을 올라 한 층을 더 올라가니 저 앞으로 마리아 상이 우리를 맞이한다. 지나가던 신자들이 가끔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한다. 나는 먼저 계단 옆에 있는 두 개의 비석에 주목한다. 하나는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비이고 다른 하나는 드비즈 신부 공덕비이다. 그런데 비문에는 '成에밀리오一論神父功德碑'라고 쓰여 있다. 드비즈 신부의 한국이름이 성일론(成一論)이기 때문이다.
성일론 신부는 천주교 복음을 전파하는 일 외에 교육사업과 의료 활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인근에 조성보통학교를 설립하였을 뿐 아니라 이명래 고약을 만들어 조선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명래 고약의 이름은 원래 성일론 고약이었다. 나중에 이 고약을 만드는 방법이 이명래(요한)에게 전수되었고 이후 이명래 고약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비석을 보고 성당을 향하며 보니 성당 주변이 온통 느티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이들 느티나무는 삼백년 이상이나 된 보호수로 모두 일곱 그루나 된다고 한다. 성당 입구에 서니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탑은 고딕식임을 알 수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성당이 역사만큼이나 차분하고 조용하다. 또 이날이 화요일 오후인지라 신자들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성당 안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 좋다.
공세리 성당 내부에서 느끼는 신앙과 순교 성당 안은 아치형 천정과 버팀벽이 아주 특이하다. 독일 힐데스하임 성당에서 볼 수 있는 베른바르트 양식의 소박한 변형 정도로 보인다. 더욱이 눈에 띄는 것은 그 아치를 따라 쓰인 개화기 투의 우리말 표현이다.
★슈고하난 쟈와 무거운 짐진 쟈난 내게로 오라 나 너희를 도으리라★(여기서 하와 난에는 ㅏ대신 아래 ㆍ가 들어간다.)
제대 구조 또한 특이하다고 하는데 신자가 아닌 나로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제대 형태가 변했다고 하며, 그 전과 후 제대가 이곳에 공존하고 있다고 한다. 제대 앞에는 가시 면류관이 있어 예수의 수난과 고통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제대 뒤에 벽의 감실에는 지팡이를 든 베네딕토 상이 모셔져 있다. 베네딕토는 공세리 성당의 주보 성인이다.
성당 제대에서 성당 입구로 이어지는 양쪽 벽면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과정이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되어 있다. 제대 오른쪽 앞에서부터 14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성당 밖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에 환희심이 생겨난다.
첫 장면에서 예수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런데 예수의 모습이 너무나 태연하다. 두 번째 장면에서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진다. 세 번째 장면에서 처음으로 넘어지고 네 번째 장면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다. 다섯 번째 장면에서는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를 진다. 여섯 번째 장면에서는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아 주고 일곱 번째 장면에서 예수는 두 번째로 넘어진다.
여덟 번째 장면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의 부인들을 위로하고 아홉 번째 장면에서 세 번째 넘어진다. 열 번째 장면에서 병사들이 예수의 옷을 벗기고 초와 쓸개를 마시게 한다. 열한 번째 장면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열두 번째 장면에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다. 열세 번째 장면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고 열네 번째 장면에서 예수가 무덤에 묻힌다.
그런데 이들 스테인드글라스를 자세히 살펴보니 예수가 처음으로 넘어지는 세 번째 장면이 없다. 그 대신 마지막 장면에 예수가 부활하는 모습이 보인다. 최근에 십자가의 길(Via Cruise)을 예수 부활을 포함해 15처로 하자는 의견이 있다고 하는데, 이곳 공세리 성당은 예수 부활을 포함시킨 것이다. 그런데 창문은 양쪽 대칭으로 한쪽에 7개씩 만들다보니 예수가 처음 쓰러지는 제3처를 생략한 것 같다. 그래서 이곳의 스테인드글라스 역시 14처로 이루어져 있다.
공세리 성당 주변의 신앙의 흔적들 2
성당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순교자 현양탑 봉헌 및 박물관 기공식을 했음을 알리는 플래카드와 그림이 나무판으로 만든 단 위에 걸려 있다. 그림에는 병인박해 때 순교한 조선 신자들이 빛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맞은 편으로는 붉은 벽돌로 지은 옛날 사제관이 보인다. 이 건물은 옛날 한옥 성당이 있던 자리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개축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옛 사제관 밖으로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그 아래로는 경사가 심한 편이다. 그 아래로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너머로 아산만이 보인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아산만 바닷물이 이곳 성당 바로 아래까지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배가 바로 이곳 공진창에 들어와 세곡을 경창(京倉)으로 운반해간 것이다. 그런데 일제시대 이곳에서 간척 사업을 했고 그 때문에 해안선이 4㎞ 정도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사제관을 돌아 다시 왼쪽을 보니 2007년 11월 20일 봉헌된 순교자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붉은색 부조작품으로 순교자들의 모습을 새겨 넣었다. 현양탑 아래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십자가와 함께 새겨져 있다.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신앙과 양심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모습이 숭고하기까지 하다.
이제 공세리 성당을 떠나면서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수난과 신앙을 위해 죽음을 택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록 정치논리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그들이 지닌 신앙과 양심의 논리는 영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오는 길에 최근에 문중에서 세운 것 같은 '걸매리 밀양 박씨 의서 원서 익서 삼위 순교자 현양비'를 들여다본다. 성당을 내려오면서 보니 공세리 마을에서 성당으로 올라오는 옛길이 보인다. 이 길 오른쪽으로 푸른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소리를 내고 있다. 마치 순교자들의 절개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