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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어느 길가에서 만난 열녀비
▲ 열녀비 화순 어느 길가에서 만난 열녀비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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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생긴 열녀비

전남 화순에서 쌍봉사를 찾아가다가 문득 길가에 꽤 특이하게 생긴 비가 있어 차를 멈췄다. 그것은 열녀비였다. 남편의 뒤를 따라 죽은 제주양씨 부인을 기리는 열녀비란다. 열녀비라...... 열녀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은장도! 바늘! 바늘? 은장도는 알겠는데 바늘은 뭐하게? 바느질이나 하라고? 아하! 긴긴 밤 외로움에 잠 못들 때 허벅지 쿡쿡 찌르던 그 바늘?

예로부터 우리 역사에는 열녀가 무수히 많았던 모양이다. 백제 도미부인이나 아사녀 이야기 같은 전설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고, 지금도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 열녀문이나 열녀비가 많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남편 대신 죽거나, 남편이 죽으면 뒤따라 죽거나, 그도 아니면 일생 동안 수절을 한 부인들을 칭송하여 국가가 열녀라는 이름으로 권장했다. 열녀를 배출한 집안은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의 특채, 세금 감면 등의 실질적 혜택을 받기도 했더란다.

그런데 일반 사대부 집안 열녀는 물론 왕실에도 열녀가 있었으니, 바로 영조의 서녀였던 '화순옹주'다. 얼마 전에 드라마 <이산>에 나왔던 화완옹주(성현아 분)의 이복언니이자 추사 김정희의 몇 대조 할머니 되는 화순옹주가 바로 대표적인 열녀였다. 화순옹주는 김한신이라는 젊은 수재에게 시집을 가서 내외간 금슬이 아주 좋았던 모양인데, 남편이 일찍 죽자 곡기를 끊고 마흔도 안 된 나이에 뒤따라 죽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영조 자신은 팔순이 넘게 살았지만 자식들은 다 비참했다. 맏아들 효장세자는 요절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는 뒤주 속에 갇혀 죽었으며, 12명의 딸들 역시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요절하거나 산고로 일찍 죽었다. 그런 마당에 화순옹주마저 남편을 따라 죽겠다면서 곡기를 끊어버리자 영조는 눈물로 편지를 써서 말린다. 하지만 화순옹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죽고 말았다. 이에 예조에서는 눈치도 없이 시댁 경주김씨 집안에 열녀문을 하사하여 칭송하자고 했다. 하지만 영조는 대노하여 아비보다 먼저 죽은 불효자식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 역시 남의 집 딸이 남편 따라서 죽었다고 하면 열녀문을 내려 표창했을 것이다. 열녀, 일부종사 같은 이념은 조선의 유교사회, 남성 중심의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그러나 막상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딸이 젊은 나이에 자결을 했다니, 남들이야 왕실에 열녀가 났다고 했겠지만 딸의 죽음을 목도한 친정아버지로서 그 속이 오죽했겠는가. 시댁 식구들이 다 죽는다 하더라도 내 딸만큼은 부디 목숨을 부지해 줬으면 하고 바라는 게 세상 모든 친정 아버지의 마음 아니겠는가.

후손들이 세로 만들어 세운 듯한 열녀비
▲ 열녀비 후손들이 세로 만들어 세운 듯한 열녀비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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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를 권하는 사회는 미개하다

저 열녀비의 주인공인 제주양씨의 사연인 즉, 남편이 일찍 죽자 홀로 수절하며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장가를 보낸 양씨부인, 드디어 그 아들이 다시 아들을 낳자 며느리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일찍이 내 남편이 돌아가셨을 때 나도 뒤따라 죽으려 했으나 자식을 생각해서 오늘날까지 참았다. 그러나 이제 조상의 제사를 받들 손자가 생겼으니 내 소임을 다했느니라. 나는 오늘부터 곡기를 끊고 일찍 죽은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연인의 죽음을 눈앞에서 봤다면 충동적으로 따라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죽은 후 수십 년이나 지나서 갑자기 남편을 따라 죽겠다고 음식을 끊어 버리다니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열녀라는 이데올로기가 그렇게도 강력한 것이었던가?

그나마 자발적인 열녀만 있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조선 시대의 야사를 읽어보면 타의에 의해 열녀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모양이다. 열녀를 배출한 가문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 며느리에게 자결을 강요한 경우도 더러 있었고, 병자호란 중에는 청나라군이 진격해 온다면서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막상 자기 자신은 몰래 도망을 쳐버린 그런 후레자식도 있었다니 말이다.

열녀를 권장하는 사회는 미개하고 악날하다. 설령 그것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한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그렇게 열녀로 교육시키고 권장하고 강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이 일찍 죽었다고 은장도와 바늘로 무장하고 꼭 수절을 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유학이나 군대에 간 애인을 반드시 기다려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든 말든, 재혼을 하든 말든 그것은 오로지 그녀들의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 열녀니 정절이니 하는 낡은 가치가 아니라 그녀들의 자유의지와 사랑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태그:#열녀비, #문화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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