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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기차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고속 열차인 '유로스타 이탈리아'는 너무 빨라 없을지 모르지만 지역 열차인 '레지오날레'에는 느릿한 여유가 있다. 언제 어디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나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함께 정신없이 수다를 떨지도 모른다.

비록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그만큼 더 많은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외국어가 부족하면 모르는 단어를 물어가면서 대화해도 괜찮다. 이미 대화상대가 됐다면, 단어 모른다고 화낼 상대방은 없다. 이탈리아에서 급한 볼 일 없이 여행하시는 분들은 꼭 레지오날레를 타 볼 것을 권해드린다.

피렌체 가는 기차 객실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귓가를 간지럽히는 정도였다. 독일어였다. 독일에서 온 두 가족 여행 일행이었는데 부모와 여자 아이 둘인 가족과 부모 여아 하나 남아 하나인 이웃들, 총 8명이었다.

아이들의 말은 왠지 알아들을 것 같았다. 사용하는 단어가 쉽고, 억양이 정확하고, 말의 속도가 느려서 들렸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 들으면 애들 말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가까이 잡았다. 가까이서 들으니 의미도 이해가 됐다. '한국에서 200시간 동안 배운 독일어는 딱 저 어린이 수준이구나' 싶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저 아이들이 몇 살일까 궁금해졌다.

아이들의 장난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귀는 가족의 대화를 향하고 눈은 창 밖을 보면서 가는데 한 아이가 숨바꼭질을 걸어온다. 객차의 좁은 의자 사이로 얼굴을 보였다 감췄다 해주니 좋아한다. 같은 놀이를 오래 하지 못하고 내가 다시 차창 너머 풍경을 감상하자, 아이 얼굴은 차창에 반사되어 비췄다 사라졌다 한다. 창문을 이용해 숨바꼭질을 걸어온 것이다. 또 숨바꼭질을 하며 놀아줬다. 역시 애들이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건 어딜 가나 마찬가지다.

숨바꼭질은 애가 먼저 걸었지만 말은 내가 먼저 걸었다. 아이에게 "몇 살이니"라고 독일어로 물어봤다. 처음부터 반말로 해서 당황하는 것 같아 존댓말로 다시 했다. (독일어에도 존칭어가 있다.) 독일에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관계의 친밀도에 따라서 존칭을 쓴다고 배웠던 것이 생각났다. 아직 친한 사이가 아니니까 존칭을 하는 것이 맞다. 존칭을 해도 여전히 당황한다. 다행히 반말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내 앞좌석에 있던 일행 8명이 모두 긴장했다. 부모들은 아이가 장난 좋아하는 걸 알고 있을 테고, 비록 낯선 아시아인이지만 나와 숨바꼭질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을 텐데, 생긴 것답지 않게 갑자기 독일어로 말을 걸어서 놀랜 거 같다. 어른들이 당황하자 질문을 받은 아이도 당황한 눈치다. 당황한 아이의 아버지는 덜 당황했는지 대신 대답했다. 5살이란다. 독일 나이로 5살이면 학교에 다니는지 궁금했다. 독일의 교육제도가 궁금했는데 취학 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원치 않지만 귀여운 아이의 '아버지'와 대화를 하게 됐다. 어른의 언어는 속도가 빠르고, 억양이 강하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뉘른베르크인지 뉘벡인지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두 단어를 구분해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똑같은 단어처럼 느껴졌다. 여행 끝나면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명과 위치를 잘 모르자 그는 그냥 뮌헨 근처라고 한다. 내가 되지도 않는 기초회화 독일어로 질문하자 애 아빠가 자꾸 가소롭다는 듯이 영어로 답했다.

아이들은 독일어로 답을 할 것 같고, 연습을 해보고 싶기도 해서 굳이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와 대화 수준이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얘가 5년 살면서 내내 공부한 거 난 1년 공부하고 대화를 하고 있으니, 내가 더 빠른 속도로 배우고 있구나'하고 철없이 좋아하고 있는데, 애 아빠가 대답하는 걸 말린다.

'외국인한테는 독일어 쓰면 안 돼. 영어로 말하는 거야'

그는 유치원도 안 들어간 딸에게 외국인을 만나면 영어로 대화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내가 독일어를 못 알아들었으면 몰랐겠지만 분명 그렇게 말했고, 이내 아이가 영어로 말을 했다. 꽤 잘한다. 어린 딸이 영어 잘 한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건지, 빡빡한 영어 훈련의 일환인지 모르지만 독일어를 연습하고자 했던 내 의도는 무의미해졌다. 나는 그 애 아빠 반만큼도 영어에 관심이 없었다.

아이는 자기 이름이나 나이 등 간단한 영어는 제법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유치원에 다니는지, 영어는 몇 살 때부터 시작하는지 등을 물었다. 영어는 학교 다니면서부터 배우는데 이번 학기에 유치원 들어가야 돼서 미리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초등학교 과정에 영어가 있기 때문에 유치원 가기 이전부터 영어를 가르쳤다는 거다. 독일이나 우리나 애들 영어 공부 열심히 시키는 건 비슷한가 보다.

아이에게 나는 '피렌체'로 가는 중인데 너는 어디로 가는 중이냐고 물었다. 아이는 유창한 영어로 자기는 '플로렌스'에 간다고 하며 깔깔 웃었다. 나는 아이의 웃음이 귀여웠지, 얘가 왜 웃었는지 몰랐다. 나중에 알았다. '피렌체'는 영어가 아니고 이탈리아어 지명이었다. 내가 영어 문장에 '피렌체'라는 이태리어 지명을 넣자, 아이가 '플로렌스'라는 영어 지명을 넣어서 답하고 웃고 있던 거였다. 유치원도 안 들어간 애가 참 대단하다. 외국어로 말 장난도 하고 어른도 놀리고.

아이의 장난기 어린 표정에서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 속 아이를 만나다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어린 아이. 어린이는 맑고 순수하지만 때로는 그 순수함이 무서울 때도 있다. 그는 어린이들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잘 표현한다.(일본에서 촬영)
▲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 장난기 가득한 표정의 어린 아이. 어린이는 맑고 순수하지만 때로는 그 순수함이 무서울 때도 있다. 그는 어린이들이 갖고 있는 양면성을 잘 표현한다.(일본에서 촬영)
ⓒ 정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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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아이들과 놀다 보니 요시토모 나라의 그림 속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가 얼마나 어린 아이들을 많이 관찰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림 속에서 표현되는 '개구쟁이'들이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서양인 아이(특히 그가 독일에서 미술 공부를 했기 때문에 독일 아이일 가능성이 높다)와 이렇게 오랫동안 웃고 떠든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서야 알게 된 셈이다. 그의 작품을 책으로밖에 본 적이 없지만 이번에 보게 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그림 속 아이들은 특히 표정을 잘 표현했고, 눈을 잘 표현했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은 그의 그림 속에서 봐오던 것이기에 익숙했다.

웃고 떠드느라 잠시 잊었지만 나는 외국어 회화를 연습하러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회화를 감상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그림들이 기대된다.

그 가족은 피렌체역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그래서 나는 그때까지도 '플로렌스'가 '피렌체' 전 역인 줄 알았다. 피렌체에 내려 영어 관광 안내책을 보고 나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아이와 가족들이 내리자 금세 말 상대를 잃어서 쓸쓸해졌다. 기차 문이 닫히고 나는 창 밖을 바라봤다. 옆 사람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옆 좌석에 앉아 있던 여자가 반대쪽 창가를 보라고 손짓했다. 그 아이가 아빠 목마를 타고 창가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제 만난 사이라고 벌써 이별이 아쉽다.


태그:#이탈리아, #피렌체, #유럽, #기차,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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