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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느는 것은 지난 일들을 생각하는 버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그 버릇이 생활에 양념이 되고 과거의 잘못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는 계기가 된다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태어나 자란 곳은 군산으로,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공설운동장과 재래시장, 정미소와 이웃하고 있는 골목동네였습니다. 여러 모양의 조개껍데기를 엎어놓은 것 같은 지붕들과 서로 껴안듯 엮여있던 판자울타리들이 한 폭의 포근한 풍경화처럼 다가오네요.     

 

 

저희 집은 큰 골목과 작은 골목이 만나는 모퉁이에 있었고, 굴뚝도 두 개나 있어 동네에서는 잘 사는 편에 속했습니다. 마당에는 샘이 있고 채송화와 봉숭아, 수국과 함박꽃 등이 어우러진 화단도 있었지요.

 

아침에 일어나면 새싹이 돋는 신기한 모습을 보려고 화단으로 달려갔습니다. 새로 나오는 떡잎을 하나 둘 세며 기뻐하던 그때가 새롭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꽃이라면 가리지 않고 좋아하나 봅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교회가 있었는데, 방학 때마다 열리는 주일학교는 막내 누님과 함께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목사님은 하루에 한 번씩 예수님을 만나는 것으로 알았지요. 가장 궁금했던 점은 제아무리 산타할아버지라고 하지만 좁고 뜨거운 구들장 사이를 옷에 검댕이도 묻히지 않고 어떻게 통과하느냐는 것이었지요.

 

골목 앞 신작로를 건너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공설운동장이 있었고, 높고 낮은 석산(石山) 두 개가 운동장을 껴안고 있었습니다. 석산 아래는 피난민 촌이었는데, 산꼭대기에 작은 교회가 있어 제법 동네 규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피난민 동네 아이들은 항만과 역을 오가는 기차 화물칸에서 석탄을 훔쳐 동네 빵집이나 시장 옹기전에 있는 돼지국밥 집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지요. 동네 아이들은 북한 사투리를 쓰고 석탄을 훔치는 그 동네 아이들을 놀려대거나 편을 갈라 돌싸움을 하기도 했습니다.

 

50년 가까운 채석작업으로 지금은 형체도 없이 사라진 석산이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실감이 나게 합니다. 대부분 골판지나 미제깡통을 펼쳐 벽에 덧발라놓은 집들이었지만, 끼니때가 되면 굴뚝 이곳저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고즈넉한 동네였습니다.

 

한국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됐을 터인데도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습니다. 그렇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사셨던 어른들이 계셨기에,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도 경제 대국을 이루지 않았나 싶습니다.

 

 

선창가와 갯벌을 이웃하고 있던 동네

 

집에서 한 마장 거리에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째보선창’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대낮에도 적막이 흐르지만 당시에는 조금과 사리를 가리지 않고 풍성했지요. 선창가에서 쭈그리고 앉아 조기를 엮으며 웃는 아주머니들 얼굴은 부잣집 마나님 부럽지 않았고, 뱃사람들의 대화에는 활력이 넘쳐났습니다.

 

선창가 풍경을 얘기하려면 기억하기 싫은 추억이 떠오릅니다.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 길가에 버린 복어 알로 국을 끓여 먹고 온 가족이 죽었다느니, 행인지 불행인지 아이들은 살아났다느니 하는 어른들의 대화가 어린 마음을 아프고 무섭게 했으니까요. 그렇게 달갑지 않은 소식은 70년대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강 하구에서 조금 내려가면 갯벌과 갈대숲이 있었습니다. 손을 뻗으면 강 건너 갯마을 초가집이 잡힐 듯했고, 모래가 쌓인 삼각지에서는 손으로 긁어 소쿠리에 담을 정도로 아사리(작은 조개)가 많이 잡혔습니다. 지금은 맛으로 먹지만 배고프던 그때는 끼니를 때우는 식량이었지요. 길가에 버려진 아사리 껍데기를 밟으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갯벌을 가로지르는 방파제 아래에는 운동장보다 넒은 밭이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기마병들이 훈련을 받던 곳이었는데, 해방이 되자 밭으로 개간하여 수박과 참외, 배추 등 철 따라 채소를 가꿔 먹었습니다.

 

가을이면 김장철이 되기 전부터 밭떼기하러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여름이면 이곳만큼 좋은 놀이터도 없었습니다. 갯벌에서 짱뚱어와 농게를 잡고, 때까치 알을 꺼내려고 갈대숲을 헤매고 다니다 지치면 참외와 수박 서리에 나섰으니까요.

 

하루 살기도 버거웠던, 보고 싶은 사람들

 

사람들의 직업이라고 해봐야 집에서 콩나물을 기르거나 종이봉투 붙이는 게 고작이었고 끼니를 이을 막노동 자리라도 있으면 감사해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루 살기도 버거운 인생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강과 바다를 끼고 있어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수월찮았지요.

 

주태와 행길이 아버지는 한날에 돌아가셔서 제사도 함께 지냈습니다. 다시 기억하기 싫은 사라호 태풍이 있던 해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함께 돌아가셨기 때문이지요. 하얀 모포가 덮인 시체가 오던 날,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이 교회 앞길에서 시신을 맞았습니다. 혀를 끌끌 차는 사람, 모포를 들춰보는 사람, 눈물을 흘리는 사람 소주병을 들고 고함을 지르는 사람, 사람들···.

 

태풍으로 부상당한 아저씨들과 시체가 돌아오고, 며칠은 온 동네가 초상집분위기였지요.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울면서 무서워했던 철부지 시절이 그립습니다. 그 후 사람들은 제삿날이면 단자도 보낼 것 없이 이집저집을 오가며 제사를 지냈습니다. 

 

섬에 살면서 갯벌로 조개를 캐러 갔다가 변을 당했던 사촌 누님 얼굴이 아스라이 떠오르네요. 간만(干滿)의 차가 심한 서해안의 섬이나 마을에는, 바다에서 변을 당한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지역 상여꾼들의 소리가 유달리 애절하고 구슬픈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코끝을 시리게 했던 추위가 가시고 봄볕이 따사해지니까, 어려웠던 시절에 함께 울고 웃던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네요. 다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특히 편을 갈라 싸우던 피난민촌 아이 중에는, 회사 사장님이 되어 옛날의 적을 직원으로 고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덧붙이는 글 | 단자: 사랑방에 모여 수다를 떨던 동네 사람들이 누구네 제삿날인 것을 알면, 약간의 부조금을 보내면서, 술과 떡 등을 보내달라고 적은 쪽지를 보냅니다. 그러면 제삿집에서는 정성을 다해 술과 음식을 보내주는데, 일종의 놀이문화라고 해야겠지요.  


태그:#고향, #째보선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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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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