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는 지금 온통 공사 중입니다. 반듯한 길을 내기 위해 산을 자르고 터널을 뚫으며 바다를 매립하고 콘크리트를 쏟아붓는 대형 공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돈이 모이고 하루가 다르게 탈바꿈하는 활력 넘치는 도시의 분위기는 밝은 주민들의 표정에서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여수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산고수려(山高水麗)한, 우리나라 최고의 미항(美港)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그런가 하면, 충무공 이순신의 자취가 서린 역사의 고장이며, 제주 4·3 사건과 더불어 우리 현대사 최대의 참극으로 일컬어지는 여순 사건의 현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이 곳 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인들조차 여수의 그런 고유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해 말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로 여수가 확정되면서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여수'와 '엑스포'는 동의어이자, 하나의 '언어적 랜드마크'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길가와 건물마다 매달린 엑스포 깃발은 4년 넘게 펄럭일 것이고, 버스마다 택시마다 덕지덕지 붙인 홍보 스티커 또한 색이 바랠 때까지 그 자리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길 겁니다. 적어도 엑스포는 지금 여수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덮어버리는 '블랙홀'입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엑스포'
엑스포가 삼켜버릴 맨 처음의 먹잇감(?)은 바로 기억하기조차 꺼려하는 가슴 아픈 역사가 될 것 같습니다.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고, 세월이 많이 흘러 밝히기도 어려운 역사적 상처는 더욱 그렇습니다. '엑스포'라는 축제의 분위기에 여순사건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 모두가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 이 곳 사람들은 슬피 우는 것조차 죄가 되는 기막힌 세상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야 했고, 억울하게 죽은 가족이 불에 태워져 쓰레기 버려지듯 매장되는 현장을 먼발치에서 그저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반란군에게든, 진압군에게든 부역해야 했던 수백 수천명의 민간인들이 '빨갱이'라는, '우익 앞잡이'라는 이름으로 죽어가야 했던 피맺힌 현장이 바로 이 곳 여수였습니다.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곳이 단 한 곳도 없다 할 만큼 시내와 외곽을 가리지 않고 여수 전역이 여순사건의 역사적 현장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순 사건의 현장이 엑스포 깃발이 화려하게 나부끼는 공사장 곳곳마다 구석에 천덕꾸러기마냥 나뒹굴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여순사건에 천착해 온 지역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곳곳에 안내판이 세워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행정 관청은 물론 주민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안내판이 훼손된 곳도 있고, 학살된 민간인이 매장된 터로 추정되는 곳에는 쓰레기가 수북이 쌓여있어 아쉬움을 넘어 참담할 지경입니다.
아예 안내판과 나란히 '쓰레기를 무단투기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세워진 곳도 있는데, 이는 여수에서 여순사건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여순사건이 시작된 14연대 자리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게 터를 내주었고, 바로 앞 일제가 만든 콘크리트 활주로는 4차선으로 넓혀진 해안 도로에 묻혀 알아보기조차 어렵습니다. 학살된 민간인들을 '버리려' 통과했던 비좁은 마래터널 곁에는 4차선 우회도로가 지날 웅장한 새 터널이 뚫리고 있습니다.
반란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자리에는 엑스포를 위한 컨벤션 센터와 신항만 공사가 한창이고, 모든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부역자로 몰린 민간인들을 진압군 대장이 일본도(日本刀)로 즉결 참수한 서슬퍼런 현장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뛰노는 '평화로운' 곳이 되어 있습니다.
125명의 부역자가 처형당한 후 불태워져 파묻혔다는 참혹한 현장은 훗날 숨죽이며 살아온 몇몇 유족들에 의해 형제묘로 되살아났지만,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채 잡풀만 무성합니다. 검은 모래의 만성리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가 통곡의 피울음 소리로 들리는 이 곳으로 당시 처형당할 부역자들이 자신들을 불태울 장작더미를 직접 짊어지고 올라갔다고 하니, 오르는 계단길에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만성리 형제묘 주변은 몇몇 유족들의 증언만 있을 뿐 과거에 발굴된 적이 없습니다. 유골 '부스러기'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을 땅 속은 지금 주변의 터널 공사로 시끄러워, 그들의 원한을 풀어줘야 할 후세인들에 의해 두 번 죽임을 당하고 있는 셈이지만,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경제적 효과로 포장된 '당의정'
그 누구 하나 책임을 지지 않고 교훈도 얻지 못한 채, 가해자든 피해자든 무심한 세월 속에 모두 사라져야만 비로소 밝혀지는 역사라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학문적 사치이며 반이성적 범죄 행위를 방조하는 흉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관련 시민단체의 도움 없이는, 엑스포에 포위된 여수에서 여순사건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세계적인 축제를 준비하며, 돈이 몰리고 경제가 되살아나 '살맛나는' 도시가 되었다지만, 반추해야 할 가슴 아픈 역사, 그 기억을 복원할 수 있는 자취만큼은 반드시 남겨둬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엑스포는 쓰라린 역사의 생채기를 경제적 효과라는 성과로 덮어버린 '당의정'으로 인식될 것이며,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행사라는 불명예를 역사에 남기게 될지도 모릅니다.
돌아오는 길에 듣자니까, 여수, 순천 지역에 사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 여느 지방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자신의 속내 드러내기를 꺼려한다고 합니다.
그러한 독특한 지방색이 해방 정국 극심한 좌우 갈등 속에서 어쨌든 살아남기 위한 처세에서 비롯됐다고 하니, 가슴 아픈 역사적 경험이 미래의 삶조차 옥죄고 있는 셈입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3월 22일, 5.18기념재단에서 주최하는 여순사건 현장 답사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을 빌어 의미 있는 공부의 기회를 주신 재단 관계자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