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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부터 주당의 소질이 엿보이는 둘째 아들. 앞쪽 영월 더덕와인보다 진도홍주에 더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 홍주 일찍부터 주당의 소질이 엿보이는 둘째 아들. 앞쪽 영월 더덕와인보다 진도홍주에 더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 김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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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보름쯤 전이었던가, 동생한테서 집에 좋은 술 있으니 마시러 오라는 기별이 왔다. 술이라면 주종불문, 원근불감, 상선약주의 신조를 가진 내가 아닌가.

일부러 토요일로 날을 잡아 안주거리도 준비하고, 아예 하룻밤 자고 올 작정으로 아내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갔다.

물론 겉으로는 양쪽 집 아이들이 서로 만나 놀게 해준다는 명분이 우아했지만 내심 형제가 만나 술 한 잔 거나하게 마실 속셈이었던 우리는 초저녁부터 상을 펴고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동생이 내놓은 술은 안동소주, 한산소곡주 등과 더불어 손꼽히는 명주 ‘진도 홍주’였다. 전국 각지 농수산물의 원산지표시제도와 관련해서 이러저러한 강의를 다니는 게 업무인 동생이 홍주 관련 프로젝트 때문에 진도에 갔을 때 직접 사왔다는 진도홍주. 농림부장관도 추천한 좋은 술이라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혀가 당기는 대로 들이 부었다.

홍주는 양주를 마실 때처럼 얼음을 넣어 순하게 마시는 것이 좋고, 맥주와 섞어 마시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일명 ‘일출일몰주’라는 것으로, 맥주잔에 홍주를 살짝 따르면 홍주가 한꺼번에 맥주와 섞이지 않고 빨갛게 떠있는 모습이 마치 바다에서 뜨고 지는 해를 닮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식한 우리 형제는 그런 우아한 주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소주 마시던 평소 습관대로 그 독한 홍주를 오로지 스트레이트로 들이 부었다.

물론 홍주를 처음 마셔본 것은 아니었다. 오래 전에도 진도에 사는 종친 어르신들이 마치 빨간 화염병에 심지를 박은 듯 휴지로 입구를 막아 들고 온 유리됫병을 꺼내 아버지 몰래 한 잔씩 마셨던 기억도 있고, 서울에서도 가끔 인사동 술집에 앉아 마셔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 양이 잔술 정도였지 이렇게 큰 병을 옆에 두고 넉넉히 마시지는 못했던 것이다.

예전 드라마 <태조 왕건>에도 홍주가 나오는 대목이 있었다. 왕건(최수종 분)과 형제들이 개선해서 술자리에 모여 앉은 장면이었는데, 왕건의 여러 부인 중의 한 명이자 나주 호족의 딸인 오씨부인(염정아 분)이 이렇게 말했다.

오씨부인 : 이 술은 진도에서 빚은 홍주라는 귀한 술이옵니다. 많이들 드시옵소서.
신숭겸 : 오, 그렇습니까? 형수님, 그럼 더욱 더 많이 마셔야겠습니다.

제작진이 무슨 생각으로 홍주 얘기를 집어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좀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홍주의 유래는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 함께 들어왔다는 얘기도 있고, 연산군 때 누군가가 진도로 들어가 빚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지만 어쨌거나 왕건 시대 이전, 즉 통일신라 때부터 빚었다는 얘기는 없으니 나주 오씨부인이 홍주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얘기도 있다. 조선 성종이 폐비 윤씨를 서인으로 강등하기 위해 어전회의를 소집하자 양천 허씨 허종(許琮)의 부인은 남편에게 이 홍주를 잔뜩 먹였고, 술 때문에 말에서 떨어져 어전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허종은 훗날 연산군의 보복 때 회의 참석자 명단에 없어서 화를 면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홍주는 양천 허씨 가문의 비전이 되었고, 지금도 진도홍주하면 허화자 할머니가 빚는 홍주가 첫 손에 꼽히고 있다.

아무튼 입궐해야 하는 대감을 말에서 떨어뜨릴 정도로 독한 이 진도홍주, 알콜도수가 40도가 넘는 독주를 권커니 잣커니, 나와 동생은 700ml 한 병을 어느새 다 마셔버리고, 영월 더덕 와인 마시고, 그도 부족해서 생맥주를 잔뜩 사다가 또 들이 부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어제 밤에는 살짝 쓴 맛 다음에 은은한 달콤함이 느껴지더니, 흥진비래(興盡悲來), 오늘 아침엔 흥이 다하고 괴로움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간밤에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고 눈을 뜨려는데 도저히 떠지지도 않았다. 하기야 그 독한 술을 허겁지겁 털어 마셨으니. 비몽사몽 중에 아침을 먹던 동생은 이렇게 독한 술인 줄은 정말 몰랐다며 한 마디 했다.

“몸에 좋다더니, 농림부장관 이 양반은 먹어보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한테 권한 거 아냐?”

나는 그날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운전할 정도의 상태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부터 며칠 동안 계속 배가 더부룩하고 살살 아픈 게 아무래도 탈이 난 듯 싶었다. 급기야 병원에 가서 내시경 검사까지 받게 되었는데 의사의 소견은 위염이었다.

아, 천하의 술꾼, 주선을 자처하던 내가 정작 술 때문에 위염에 걸리다니, 망신스러워서 이 일을 어찌할 것인가? 나를 이렇게 처참하게 KO시킨 진도 홍주. 그러나 목을 타고 넘어 들어가는 그 알싸한 홍주의 맛을 어찌 잊으리. 지금 내가 고분고분 의사가 시키는 대로 약을 먹고 있는 것도 하루 빨리 병이 나아 그 우아한 일출일몰주를 맛보고 싶기 때문이다.


태그:#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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