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으로 가는 길에 서다 나는 지금 해인사로 간다. 해인(海印). 그곳은 내 정신이 걷고 걸어서 마침내 닿고자 하는 종착점이다. 우리 마음이 맑고 투명한 명경지수에 이르러 세계가 제 본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경지. 그러니 그곳이 얼마나 먼 곳인가. 수 많은 사람들이 일생을 걸고 그곳에 닿고자 하였으나, 정작 그곳에 닿았다고 알려진 사람은 매우 드문 곳이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그곳에 닿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해인의 경지는 물론 그 이름을 내걸고 가야산 자락에 앉아 있는 해인사에 닿는 일조차 쉬운 일이라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그곳에 이르러야 한다. 해인사 들머리. 이곳엔 일찍이 해인의 경지를 맛봤다는 세 분 스님이 적멸을 즐기고 계신다. 성철·혜암·자운 스님의 부도. 이 고승대덕들께서 일생을 갈고 닦아서 이룬 색즉시공의 세계를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구현해낸 뒷세상 사람들의 부질없음이여. 일주문 앞에 이르러 해인사에 들기 전, 잠시 숨을 고르려고 벤치에 앉는다. 도종환 시인의 시 '해인으로 가는 길'이 떠오른다. 화엄을 나섰으나 아직 해인에 이르지 못하였다 해인에 가는 길에 물소리 너무 좋아 숲 아랫길로 들었더니 나뭇잎소리 바람소리다 그래도 신을 벗고 바람이 나뭇잎과 쌓은 중중연기 그 질긴 업을 풀었다 맺었다 하는 소리에 발을 담그고 앉아 있다 지난 몇 십 년 화엄의 마당에서 나무들과 함께 숲을 이루며 한 세월 벅차고 즐거웠으나 심신에 병이 들어 쫓기듯 해인을 찾아간다 - 도종환 시 '해인으로 가는 길' 일부 시인이 이곳에 왔을 때는 여름이었던가. 탁족을 하고 앉아 있었다니 말이다. 그러나 해인사 옆을 흐르는 계곡의 물은 거의 말라 있다. 또 다른 연기를 좇아 증발해 버린 것이다. 늙은 스님 한 분이 옆자리에 앉는다. 어디선가 많이 본 스님이다. 어디서 봤더라.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연기(緣起)의 끈. 아, 맞다. 이분이 바로 어느 신문에선가 본 적 있는 해인사 극락전 한주 도견스님이 분명하다. 모든 소임을 거두고 '뒷방'으로 물러나 물처럼 바람처럼 지내고 계시다는.
스님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나는 일주문을 찾아들고 스님은 그 옆길로 가시고. 저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인가. 언덕길을 올라가시는 스님의 구부정한 뒷모습. 스님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자리에 멈춰 서서 바라본다. 등 뒤에 대고 중얼거린다. 스님, 부디 성불하소서.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에 들어오려면 알음알이를 버리라"고 해인사 일주문은 말한다. 그러나 난 귓전으로 흘려 들으면서 두 번째 문을 향해 걸어갈 뿐이다. 길 양 옆으로는 전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섰다. 헛길로 빠지지 마라. 여래께서 중생들의 직입(直入)을 위해 베푸시는 친절인가. 두 번째 문은 천왕문이라고도 부르는 봉황문이다. 벽 안쪽엔 사천왕 탱화가 그려져 있다. 입체와 평면의 차이일까. 소조사천왕상이 주는 우락부락한 느낌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인상이다. 사천왕중에서 나와 코드가 맞는 분은 다문천왕이다. 웃음 띤 얼굴로 비파를 연주하는 다문천왕이야말로 문화의 다양성을 몸소 구현하시는 분이다. 봉황문을 지나면 높은 축대 위에 또 문 하나가 기다리고 있다. '해동원종대가람'이란 현판을 단 해탈문이다. 해인사에 유독 담장과 문이 많은 까닭
해탈문을 나서면 꽤 너른 마당이 펼쳐진다. 이곳이 법당 마당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다. 오른쪽엔 요사채가 자리 잡고 있고, 그 맞바라기에선 범종루가 자리 잡고 있다. 법종루 앞에는 작은 석탑이 서 있고 사람들이 탑 주위를 돌고 있다. 중앙엔 구광루라는 누각이 버티고 있다. 해인사의 모든 건물 가운데 한가운데 자리 잡은 건물이다. 구광루라는 이름은 <화엄경>의 내용 중에서 따온 것이다. 부처님께서 아홉 군데에서 설법하셨는데, 그때마다 이마의 백호(白虎, 인의 32가지 상호 하나)에서 빛을 뿜으셨다는 이야기다. 구광루는 누하를 통과할 수 없게 막혀 있다. 그 옛날 근대 선의 중흥조라 부르는 경허 스님께서는 이 구광루에 올라 "구광루상평천산(九光樓上枰千山, 한시 '해인사 구광루')라고 읊었다. 구광루에 올라 눈앞에 바라다보이는 많은 산을 저울질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의 우린 경험할 수 없는 풍경이 돼 버린 것이다.
그게 미안했던지 구광루에는 양쪽 겨드랑이에다 두 개의 문을 내어주고 있다. 높다랗게 쌓은 축대 위에 낸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해야 해인사의 법당인 대적광전에 닿게 되는 것이다. 해인사에는 이렇게 유독 담장과 문이 많다. 봉황문에서 해탈문, 해탈문에서 구광루에 이르기까지 온통 담장으로 그 영역을 철저하게 한정하고 있다. 문을 닫아 버리면 다른 영역으로 갈 수가 없게 돼 있다. 이것은 혹시 일어날는지도 모르는 고려대장경 분실에 대비하기 위한 공간 나눔이 아닌가 싶다. 비로자나불들이 장엄한 불국토
구광루 옆으로 난 문을 통과하면 해인사 주불전인 대적광전이 장중한 모습을 드러낸다. 해인사는 애장왕 3년(802)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이정 두 스님이 세웠다고 한다. 본래는 비로전이라 부르던 것을 조선 성종 때 다시 지으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다시 지은 것을 1971년에 대폭 수리한 것이다. 법당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다. 대적광전 좌측엔 지난해 11월 24일에 낙성식을 가진 대비로전이 자리 잡고 있다. 본래 명부전이 있던 자리였다. 대비로전은 지난 2005년 8월, 해인사를 방문했을 때 이 비로자나불을 친견한 노무현 대통령이 이 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전각을 짓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함에 따라 지어진 건물이다. 솟을모란꽃이 아름답게 새겨진 문살이 아름답다. 단청을 칠하지 않아서 더욱 정갈한 느낌을 준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면 아담하고 예뿐(?) 비로자나불 2구를 뵐 수 있다. 지난 2005년 6월 개금을 위해 복장유물을 개봉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 시대인 883년에 만들어졌다는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불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불상이다. 대적광전에 모신 비로자나불과 모양이 흡사한 것으로 봐서 동시대에 조성된 게 아닌가 싶다. 울지 말라, 여기서 울지 말라
대적광전 위, 높다란 석축이 있다. 계단을 올라 '팔만대장경'이란 현판을 단 문 안으로 들어선다. 거기서부터 대장경을 봉안한 장경각 영역이 시작된다.
첫 번째 문을 지나면 비로소 수다라장 문이다. 내가 해인사에 오고 싶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문의 존재가 컸다. 사진을 통해서 본 수다라장으로 들어가는 문은 명암이 매우 분명했다. 명과 암을 가르는 그 뚜렷한 윤곽이 나를 매혹시켰던 것이다. 장경각을 언제 처음 세웠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1398년 5월, 강화도 선원사를 떠난 팔만대장경이 한양을 거쳐 해인사로 옮겨진 시기는 대략 1399년으로 추측된다. <가야산해인사고적>등 여러 기록을 참조하면 장판각은 조선 초 무렵인 1488년쯤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후로 여러 차례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각은 모두 네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에 있는 법보전, 남쪽에 있는 건물을 수다라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사이 좌우에는 사간판(寺刊板) 대장경이 보관한 두 채의 건물이 서 있다. 장경각 건물의 크기는 두 채 공히 30칸씩 총 60칸으로된 건물이다. 사간장경판각은 각 2칸씩이다. 사간장경판각의 기둥 12개와 합하면 기둥 수가 모두 108개이다. 장경각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조선조 초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건축 양식이 가장 빼어난 건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건물이 뛰어난 점은 특히 대장경을 보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건인 습도와 통풍이 자연적으로 조절되도록 지어졌다는 것. 해발 730m 지점에 위치한 장경각 터는 본디 그 토질이 좋다. 흙바닥이 햇볕을 적절히 걸러낸다. 흙속에는 숯과 횟가루와 찰흙을 넣었다. 장마철같이 습기가 많으면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땐 자신이 품고 있던 습기를 내보내도록 했다. 습도가 자연적으로 조절되게 한 것이다. 살창 사이로 장경각 안을 들여다보니, 아래 3단, 위 2단 모두 5단으로 된 판가가 드문드문 세워져 있고 거기에 경판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경판을 바라보자니, 어느새 가슴이 뭉클해진다. 고은 시인은 문화기행집 <절을 찾아서>(책세상, 1987)란 책 속에서 경판을 만져본 소감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경판 한 장을 들어본다. 천년이 지나간 뒤에도 어제 일을 마친 것 같은 새삼스러운 경판이다. 그 글씨 한자 한 자를 파고들던 무기명의 예술가였던 선인의 고통과 정열, 희망으로 넘친 모습이 눈앞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울 수밖에 없다. 울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경건한 장경각 안에 햇빛이 비칠 때 그 빛에 반짝이는 눈물 한 방울 맺는 것은 예절이 아니다. 울지 말라, 여기서 울지 말라. - 위 책 95쪽 비록 화엄의 바다에 이르진 못했지만
사람들이 해인사를 떠나고 있다. 축 늘어진 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이제야 해인사로 들어오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해인사를 떠나는 사람이 훨씬 많다. 덧없이 피고 지는 계절조차 해인의 바다를 떠나고 있다. 저들은 오늘 이곳에 와서 바다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리석은 나는 아직도 바다에 이르지 못하였다. 아마도 난 해인의 바다 근처에도 이르지 못한 채 생을 끝마칠 것이다. 그렇더라도 크게 실망할 것은 없다. 시작은 끝을 지향하고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을 위해 기꺼이 디딤돌이 돼준다는 걸 알고 있기에. 계곡을 따라 뻗은 길을 허위허위 걸어간다. 개울가 오리나무의 겨울눈이 맘껏 부풀었다. 인내는 쓰다. 오리나무가 겪은 쓰디쓴 순간들이 거기 오롯이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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