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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동면을 찾았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매화가 활짝 피었다.
 내가 원동면을 찾았을 때는 이미 대부분의 매화가 활짝 피었다.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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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은 천 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한때 내 중국어 선생님이었던 분의 이메일 맨 마지막에 늘 붙어 있던 글귀다. 아마 그분의 좌우명쯤 되는 걸 게다. 나는 그분의 이메일에서 이 글귀를 처음 대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여러 번 되뇌었고, 지금도 간혹 이 글귀를 떠올리곤 한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이 글은 조선 중기의 학자 신흠(申欽)이란 분이 쓴 책 <야언>(野言)에 나오는 한시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桐千年老恒藏曲(동천년로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유경백별우신지)

오동나무로 만든 악기(아마도 가야금)는 천 년을 묵어도 자기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을 추워도 그 향을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치 않으며,
버드나무 가지는 백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아마 조선 선비의 절개를 노래한 듯한데, 시에서 풍기는 어떤 강직함이 읽는 이로 하여금 약간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나만 그런 느낌인가….

원동면 영포마을. 사람들은 '원동 매화마을'이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사실 매화마을은 원동면 전체라기보다는 여기 영포마을을 가리킨다.
 원동면 영포마을. 사람들은 '원동 매화마을'이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사실 매화마을은 원동면 전체라기보다는 여기 영포마을을 가리킨다.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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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를 찾아

지난 주말(22일), 일생을 추워도 자신의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를 만나러 길을 나섰다. 처음에는 홍쌍리 할머니가 계시는 전남 광양을 떠올렸다. 그러나 거긴 너무 잘 알려진 곳이라 매화보다 사람들의 시커먼 머리통만 보게 될 것 같아 목적지를 경남 양산으로 잡았다. 경남 양산시 원동면 영포마을. 마을 전체가 매화밭이어서 매년 3월이면 그 향이 천태산 배 내골 전체를 휘감는다는 곳이다.

오전 8시에 집을 나서 오후 2시에 원동면에 도착했다. 내가 사는 일산에서 영포마을까지 정확히 6시간이 걸렸다. 양산시에서 낙동강 줄기를 따라 꼬불꼬불 고갯길을 넘어 원동역 앞에 이르자 열어둔 차창 안으로 매화향이 수줍게 스며든다. 아~, 내 입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매화는 다른 꽃과 달리 그 향이 짙지 않아서 향기로는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데, 원동면은 역시 매화마을이라 불릴 만했다.

촉촉히 봄비를 맞은 홍매화.
 촉촉히 봄비를 맞은 홍매화.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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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23일에는 새벽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봄비다. 바람이 불지 않아 차분히 내리는 봄비를 맞고 있는 매화는 그 향이 더 진하다. 동네 전체에 맑고 깨끗한 기운이 감돌고, 하얗거나 혹은 빨간 매화의 콘트라스트가 더 강하다.

나는 원동면에서 밀양댐 가는 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았다. 낙동강의 지류 격인 내포천 이쪽저쪽 골짜기가 온통 매화천지다. 대부분 하얀 꽃이고, 군데군데 선홍색 물감이 퍼진 듯한 홍매화도 눈에 띈다.

영포마을, 마을 전체가 매화밭으로 덮여있는 매화마을

원동면에서 10km 정도 달리자 길 왼쪽에 영포마을 표석이 서 있다. 원동 매화마을은 사실 이 동네, 즉 영포마을을 가리킨다. 나는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포천 작은 다리를 건너 비탈진 산기슭의 매화밭으로 마치 꿈꾸듯 천천히 걸었다.

아직 그늘진 곳에는 꽃망울이 맺혀있는 것도 보인다.
 아직 그늘진 곳에는 꽃망울이 맺혀있는 것도 보인다.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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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는 매화 꽃잎과 가지를 적시고 땅으로 스며들고 있다. 멀리서 보면 하얗고 발그레한 솜털이 산 전체를 감싼 듯하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한 송이 한 송이 범접할 수 없는 도도한 자태에 눈이 어지럽다. 마침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마을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할머니, 매실은 언제 따나요?"

다짜고짜 매실 언제 따냐니? 하하. 묻고 나서도 스스로 어이가 없다. 아마 이 동네 주민들에게는 매화꽃에 대한 낭만적 감상 따위보다는 현실적인 이리에 대한 물음이 더 와 닿을 거란 생각을 한 지도 모르겠다. 역시 할머니께서는 아주 친절하게 답해주셨다.

"빠르면 5월 말, 그러니까 28일쯤이면 땁니더. 그래도 지대로(제대로) 익은 거 딸라마(따려면) 6월 초나 돼야지."

그리고 이 할머니, 시골 사람 특유의 친철함으로 영포마을에서는 20~30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매실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과 여기 매실은 다른 지방 매실과 달리 순수 토종 매실이어서 도시 사람들에게 인기가 꽤 있다는 얘기를 하신다. 실제로 원동매실은 우리나라 토종 매실이다.

나는 토종 매실과 개량종 매실이 어떻게 다른지, 또 그 구분이 왜 필요한지는 알지 못한다. 주워들은 이야기로는 토종 매실은 개량종보다 알이 작고 향이나 액이 더 진하다는 것뿐.

영포마을 매화밭 속에서 나들이 나온 한가족이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영포마을 매화밭 속에서 나들이 나온 한가족이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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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향기 가득한 매실주 한 잔에 정을 느끼고

오후가 되면서 굵었던 빗줄기가 약간 가늘어진다. 원동역 쪽으로 다시 방향을 잡았다. 원동역 앞에는 '순매원'(www.soonmaewon.com)이라는 매실농원이 있다. 올해로 7년째 이 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미정씨가 어설프게 우산을 받쳐 들고 매화꽃을 찍는 내가 안 돼 보였는지 굳이 집 안으로 들기를 권한다.

박미정씨는 매실 장아찌·매실 고추장·매실 간장이 담긴 큰 독 위에 작은 상을 차려놓고는 나에게 맛을 보란다. 게다가 점심을 차려 줄 테니 먹고 가라고 한다. 나는 한 시간 전에 늦은 아침을 먹었던 지라 점심만은 끝내 사양을 했는데, 간장종지 같은 잔에 따라서 권하는 매실주는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달력사진? 전깃줄만 없다면 한 폭의 수묵담체화 같은 풍경 아닐까.
 달력사진? 전깃줄만 없다면 한 폭의 수묵담체화 같은 풍경 아닐까.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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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잔을 살짝 입에 대고 입술을 적셔봤다. 진하고 상큼한 매실 특유의 향이 확 풍긴다. 입 안에 탁 털어 넣고 술을 물었다. 처음 느낌은 매실주라기보다는 원액에 가까웠다. 그리고 목구멍으로 술이 넘어가자 비로소 술 향이 느껴진다.

"캬아~."

마른 멸치를 대가리도 떼지 않고 매실 고추장에 푹 찍어 안주 삼아 씹었다. 달콤한 맛이 먼저 혀에 감기고, 끝 맛에 매실 향이 살짝 묻어난다.

"우리 집에 오시는 분들 말씀이 고추장도 좋지만 간장이 제일 맛있다 카데예. 밥에 김을 싸서 찍어 무도(먹어도) 되고, 만두를 찍어 먹어도 맛이 좋다 캅디더."

그럼 그렇지. 아주 장사를 잘 하는 아주머니다. 이처럼 여기 순매원은 오는 손님에게 점심 밥 대접을 한다. 집에서 담근 매실 장아찌와 고추장, 간장 등으로 한 상 차려낸다. 모르긴 해도 이거야말로 최고의 상술이 아닐까. 먼 길 온 손님에게 따뜻한 밥 한 상 차려내는 것. 박미정씨는 어쩌면 '친절'과 '정'을 팔고 있는지 모른다. 여기서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받은 사람은 비록 간장 한 병 사가지 않더라도 박미정씨의 정만큼은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낙동강과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경부선 원동역 옆에는 '순매원'이라는 매실농장이 있다. 분홍색 지붕을 인 집 안에는 매실고추장, 간장, 장아찌 독이 가득 들어 차 있다.
 낙동강과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는 경부선 원동역 옆에는 '순매원'이라는 매실농장이 있다. 분홍색 지붕을 인 집 안에는 매실고추장, 간장, 장아찌 독이 가득 들어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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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순매원을 그냥 나오기가 뭣해서 간장 두 병을 들었다. 한 병은 집으로 가져가고 한 병은 서울 올라가는 길에 대구 사는 동생네 것으로.

"얼마예요?"
"1.8리터 짜리 한 병에 1만2000원이라예."

나는 주머니를 뒤지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현금이 있으려나 모르겠네…."
"없으면 그냥 가져가시고 나중에 계좌로 입금해 주이소."

이쯤 되자 다시 한 번 드는 생각. '하~, 장사 참 잘 하는 분이네.' 마침 주머니에 현금이 좀 남아 있었다. 나는 2만4000원을 박미정씨에게 건네주고, 순매원을 나섰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고, 마침 낙동강변을 따라 KTX가 철커덩 철커덩 지나갔다.

어쩌면…, 혹시…, 안타깝게도 '한반도 대운하'가 만들어진다면, 구불구불 낙동강을 따라 매화꽃이 흐드러지는 이 봄날의 절경은 그 순간부터 콘크리트 구조물이 을씨년스러운 '운하 물류기지'로 바뀔 것이다. 부디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라지만, 혹 모르는 일이므로 낙동강변 매화향이 아직 남아있을 때 많이많이 구경들 하시길….

절개의 상징 답게 다가가서 보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절개의 상징 답게 다가가서 보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 김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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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원동 매화마을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양산 나들목을 나가 양산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원동 이정표가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진행, 물금을 지나 꼬불꼬불 고갯길을 넘으면 원동면이다. 영포마을은 원동면 소재지에서 배내고개 가는 길을 따라 10km 정도 가면 된다. 대구-부산 간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는 대동분기점에서 양산 쪽으로 올라가다가 남양산나들목을 나가서 양산-물금-원동 순으로 진행한다. 열차는 경부선 삼랑진역이나 구포역에서 내려 원동 가는 걸로 갈아탄다.

이기사는 blog.naver.com/penandpowe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매화마을, #양산시, #원동면, #영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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