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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지나간 자리, 버썩 말랐던 대지가 촉촉하다. 푸른 비라고나 할까, 황사로 꺼칠했던 산과 나무와 강물이 파란 빛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며칠 동안 감자를 심느라 흑 먼지에 메말라버린 내 마음에도 푸른 생명의 소리가 들려온다.

 

병아리 솜털만한 봄볕 사이로 제비꽃, 꽃다지, 냉이들이 흙 속을 보듬고 나온다. 이 꽃들은 키가 하도 작아 허리를 굽혀야 눈 맞춤을 주고 무릎을 꿇어야 손을 내민다.

 

제비꽃은 오십여 가지가 넘는다는데 숱한 종류들을 다 구별할 재간이 없다. 내가 아는 제비꽃은 몇 가지가 안 된다. 하나는 보랏빛이고, 또 하나는 노랑 제비꽃, 다음은 남산제비꽃이다. 제비꽃만 보면 지금도 봄바람이 일어난다.

 

총각선생 시절, 제비꽃이 막 꽃물을 터트릴 무렵, 자그마한 소도시 중학교로 초임 발령을 받았다. 처음 대하는 수업에 아이들 이름도 채 외우지 못해 절절 맬 무렵, 어린 여학생이 시도 때도 없이 제비꽃을 한 묶음씩 꺾어다 교탁 위에 꽂아 놓고 수업시간에 자기만 쳐다보라고 응석을 부리는 바람에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오목이라 했다.

 

꽃샘추위도 지나고 을씨년스럽던 교실 온기가 따스해오며 아이들과 호흡을 맞춰 수업이 달콤하게 익어가던 어느 날부터 꽃이 보이질 않았다. 꽃물 속으로 몸을 감춘 오목이의 책상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폐렴이라 했다. 제비꽃 닮은 화분을 하나 사들고 병문안을 갔다. 오목이가 이 꽃을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또 얼굴이 붉어왔다.

 

“오목아, 여기 제비꽃.”

“아, 예쁘기도 해라. 근데요 선생님, 이 꽃은 제비꽃이 아니고 팬지예요.”

“내가 보기엔 제비꽃보다 훨씬 더 요염하고 귀여운데.”

“그럼, 선생님은 팬지나 사랑하세요.”

하더니만 창문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콜록콜록 잔기침을 해댔다.

“아, 미안, 난 꽃 이름을 잘 몰라서… 다음에 올 땐 제비꽃을 사다 줄게.”

 

한 학기가 다 끝나 여름 방학이 되어도 오목이는 등교를 하지 않았다. 자퇴 원서를 냈다 했다. 병이 악화 돼 서울 큰 병원으로 옮겼으나 시리고 서러운 꽃물로 변했다 했다. 그리고 소녀는 ‘선생님, 다음 세상엔 제비꽃으로 피어나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한 마딜 남겼다 했다.

 

이른 봄, 팬지가 온 거리를 뒤덮고 화려한 자태를 뽐내 으스대면 제비꽃은 하찮은 잡초로 전락한다.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라나는 팬지의 기세 앞에 쪽도 못쓰고 살아야 한다.

 

“제비꽃, 너 까불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내가 언제 까불었어요?”

 

“혹시라도 사람들이 물이라도 주면 넌 아예 마실 생각은 말거라.”

“난, 물 안 마시고 밤에 내리는 이슬만 먹어도 살아요.”

 

“그리고 너, 오늘부터 나보고 형이라고 해.”

“......?”

 

“난, 이래 뵈도 삼색 제비꽃이야, 알았어?”

“형은 외래종이죠, 고향이 어디세요?”

 

그 날부터 제비꽃은 팬지가 뭐라 해도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을 죽이고 살았다. 사람들이 옆을 스쳐가며 ‘앉은뱅이’ 같다 하면 고갤 숙이고, ‘병아리 꽃’이라면 눈을 감았다.

 

어인일인지 봄부터 가뭄으로 물이 귀했다. 열흘이 가고 한 달이 돼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싱싱하고 교만하기 짝이 없던 팬지는 쥐약 먹은 생쥐처럼 시들어버리나 싶더니 이내 꼬부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제비꽃은 꼿꼿이 살아남아 시린 꽃물을 수없이 터뜨렸다. 그 때였다. 지나가던 바람과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따가운 햇살이 말을 걸어왔다.

 

“아, 제비꽃 너, 정말 아름답고 멋진 꽃이구나. 조금만 기다려, 곧 비님을 데려 올게.”

 

푸른 비가 지나간 자리, 아무도 돌보지 않고 벌 나비가 찾아오지 않아도 여기저기 잘도 피어나는 제비꽃, 화려하게 뻐기기보단 여리고 끈덕지게 살아남는 제비꽃, 많은 세월이 흘러갔건만 풋풋했던 시절, 어린 제비꽃 다발을 아침마다 교탁 위에 꽂아놓고 꽃처럼 살라하던 어린 오목이가 울컥 보고 싶은 오늘이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 농촌공사 전원생활, 네오넷코리아 북집,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이야기>를 클릭하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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