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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길'로 유명한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 그 길도 봄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선 별 수 없는가 보다. '유명세'만 있을 뿐 풍경이 마음을 끌지는 못한다. 거침없이 지나쳐간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끊어졌다 이어지는 순창 가는 24번 국도를 따라가다 금성산성 표지판을 보고 들어선다. 산 허리를 타고 하얗게 드러난 산성길이 얼른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다.

 

금성산성 가는 길

 

담양온천에서 조성한 수목원을 지나 산길로 들어섰다. 들어서는 길에 길마가지꽃이 연분홍 꽃잎을 뒤로 젖힌 채 봄처녀처럼 싱그러운 모습으로 나를 유혹한다. 산길은 무척 메말라 먼지를 일으키고 있다. 길 옆으로 보춘화 군락도 있다.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보춘화에 매료되어 고개를 땅에 붙이고 한참을 구경한다.

 

소나무 숲길을 걸어가는 길에는 봄내음이 물씬 배어 나온다. 봄꽃들이 하나 둘씩 얼굴을 내밀고 있다. 분홍색 진달래도 피었고, 노란 생강나무꽃들도 활짝 반긴다. 보랏빛 제비꽃은 나도 보고 가라고 애처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들어서면서부터 가파르게 산길이 올라가 중턱에서 잠깐 쉰다. 쉬엄쉬엄 올라가니 솔숲 사이로 성문이 언뜻 보인다. 조금 더 올라서니 커다란 바위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보국문(輔國門)이 가로막는다.

 

 

천혜의 요새 금성산성과 만나다

 

보국문은 본성(本城)에서 방망이처럼 돌출된 형태로 외성을 쌓은 끝자락에 서있다. 적군이 올라오려면 이 문을 통과해야 한다. 설령 이 문을 어렵게 들어섰다 해도 본성 성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몸을 은폐할 수 없는 이곳에서 전투를 해야 했다.

 

금성산성은 성내(城內)에 계곡을 포함하고 주변의 산세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두룬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둘레가 7345미터나 되는 큰 성이다. 평시에 2부 3현에서 관할 운영했으며, 해마다 2만여 석의 군량을 비축해 산성의 유지와 보수, 산성에 주둔한 관리의 급료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물론 정유재란, 병자호란, 정묘호란 등 난리 때마다 요새로서의 기능을 발휘했다. 특히, 정유재란엔 의병들의 거점이 됐으며, 갑오년엔 동학 농민군들의 치열한 격전지가 됐다.

 

임진왜란 이후 산성의 수축 논란이 일어날 때 이항복은 선조에게 "담양은 산성이 크고도 더욱 웅장하여 평양성보다도 더 우수합니다. 사람의 힘은 들이지 않고도 지킬 수 있는 곳이 2/5나 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 정유재란 때 왜적이 전라도의 여러 성을 둘러보고 모두 그 허술함을 비웃다가 담양의 금성(金城)을 보고서는 "만약 조선이 이 성을 고수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함락시킬 수 있었겠는가"라고 했다고 한다.

 

금성산성은 막강한 병력과 병참기지로 웅대한 군사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나 고종 31년(1894년) 갑오 동학농민혁명 때 대혈전이 벌어져 안타깝게도 성 내외의 각종 시설물이 완전히 파괴됐다.

 

나를 이곳까지 이끌었던 풍경

 

보국문을 지나 성벽을 따라 올려다보면 충용문(忠勇門)이 하늘과 맞닿아 버티고 있다. 좁다란 문만 남겨놓고 돌로 쌓아 막았고 빨려 들어가듯 문을 따라 들어간다. 문을 통과해 충용문에 서니 그리도 나를 유혹했던 풍경들이 펼쳐진다.

 

잘룩한 호리병 모양을 하고 있는 외남문과 성벽, 그리고 그 아래로 펼쳐지는 담양벌. 이 아름다운 풍경을 동경하다 이제야 이곳에 서서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과 같은 마음을 만들어 가고 있다.

 

문루에 서서 비가 올 듯한 흐린 풍경을 내려다본다. 그렇게 보고 싶던 풍경을 막상 보고나니 쓸쓸한 마음이다. 아름다운 이 풍경 속에는 성을 쌓았던 수많은 민초들의 노동력과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병사들의 설움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던 전투 중, 이곳에 서서 내려다본 풍경은 어떻게 다가왔을까?

 

산성 안에는 또 다른 숲길이 시작된다. 돌무지 위령탑을 지나 서문으로 향한다. 처음 계획은 성을 한 바퀴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러가 버렸다. 성안에는 오랜 세월 동안 지나 다녔을 오솔길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어가는 기분이 좋다. 오래된 버드나무도 있고, 작은 대나무 숲길은 싱그럽기만 하다. 도란도란 걸어가는 길. 완만하게 내려가는 길을 따라 가다 보니 집 한 채가 보인다.

 

보국사터를 지키고 있는 휴당산방

 

휴당산방(休堂山房)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흙담을 두루고 지붕은 비닐로 덮었다. 주변에는 막돌로 돌탑을 쌓았다. 방 한칸에 부엌 하나. 참 넉넉한 이름만큼 여유로운 집이다.

 

꿀차를 한잔 부탁하고, 자리를 잡으니 산방주인(홍성주, 68)이 일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다. 나이에 비해 무척 젊어 보인다. '산속 공기 좋은 곳에 살아서 그런가?' 벽에 걸어 놓은 시를 보고서 직접 지으신 거냐고 물으니 달력 형태로 된 책을 내놓으신다. 여기에 들어와 살면서 직접 사진을 찍고, 시를 지었으며, 판매도 하고 있다고 한다.

 

西城의 관아터와 민가터를 지나

중앙에 자리잡은 보국사 찾아드니

절도 스님도 찾을 길 없네.

 

휴당이라 이름한 외딴 토담집 하나

道林居士 사는 모양 금성산성 닮았구나.

 

그래도 아침햇살 제일 먼저 비치인다니

한가닥 희망이 이곳일진데

나그네 인생 피곤하거든 이곳에서 쉬어나 가소.

 

- 道林 홍성주의 <금성산성> 일부

 

왜 이곳에서 사시느냐고 물으니, "태어났으면, 죽는 것이고, 만들어 졌으면 사라지는 것"이라는 선문답을 하신다. 편안하게 죽기 위해 이곳에 들어와 사는 것이라고 한다.

 

주변에 있는 종(鐘)과 주련(柱聯)은 장성 용주암(龍珠庵)이라는 암자가 폐사되자 인수해서 가져 왔다고 하며, 방에는 불상도 있다고 한다. 보국사터의 유래에 대해 설명도 해주시면서, 작은 희망이 있다면 폐사된 보국사터가 복원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돌아오는 길은 철마봉과 노적봉 사이로 올라서서 성벽을 따라 걸었다. 담양호 풍경과 구불구불 이어진 성벽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답다. 그 위를 걷고 있는 사람은 살아있는 그림이 된다.

 

금성산성을 내려와서는 대나무골 담양에서 유명한 떡갈비와 대통밥을 먹었다. 된장국은 시원하고 담백하다. 그 비결은 된장국에 들어있는 대나무 때문이었다. 아마 죽순이겠지만, 씹히는 맛이 죽순보다는 센 것 같다. 대통밥은 생각보다 양이 많다. 식당 아저씨는 봉투를 주면서 필요하면 대통을 가져가도 된다고 한다. "야! 필통으로 사용하면 되겠다."

 

ⓒ 전용호

덧붙이는 글 | 금성산성 가는 길은 연동사에서 가는 길과 담양온천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습니다. 30분 정도면 산성에 도착하며, 한바퀴 도는 데 4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합니다.


#금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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