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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교실 개강 날이었다. 그 날은 하루 내내 양동이로 쏟아 붓듯 비가 내렸다. 집을 나서 그곳까지 가는 동안, 나는 왜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어둠과 폭우를 뚫고 이 길을 가고 있는지 생각해봤다. 그러나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즈음 계속 그랬다. 머릿속이 텅 빈 듯 멍멍했다. 일상 생활이 그저 습관처럼 흘러갔을 뿐이었다. 철학 수업을 신청하게 된 것도 어쩌면 무기력해진 일상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동차가 극도의 정체 속에서 가다 서다를 반복했기에 나는 강의 시간에 임박해서야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졸업한 지 20년이 넘어서야 찾은 옛 교정은 추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했지만, 나는 아는 척 하며 반갑게 다가오는 옛 애인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곧장 인문대 건물로 들어섰다.

 

강의실을 찾아 자리에 앉는 순간, 나는 곧장 타임머신을 타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듯한 생생함을 느꼈다. 20여 년 전, 내가 수업을 받던 바로 그 건물, 그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꿈도 이상도 드높았던 대학 시절이었다. 책을 가슴에 껴안은 채 강의실을 찾아 뛰어다녔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나는 학교 선생님이 되었고, 아내가 되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곧바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 시간, <나와 우리, 개인과 국가>라는 제목으로 주어진 세 개의 제시문, <근대 이전 개인과 국가> <자기 존중과 자유> <나는 왜 우리로서 살아갈까?>를 읽었다. 수업은 제시문 속에서 제각각 문제를 찾아낸 다음, 기준을 정해 분류를 하고, 주제를 만들어 토론에 이르도록 짜여 있었다.

 

첫 제시문에는 국가를 구성하는 세 가지 부류, 즉 절제, 용기, 지혜에 대한 플라톤의 진술이 있었는데, 내 시선은 ‘절제’라는 단어에 머물러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절제는 노예의 미덕이다>라는 선생의 부연 설명 때문이었다.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여백에 끼적거리기 시작했다.

 

‘자유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내면화된 절제가 스스로의 자유와 자존감을 해친다.’

‘이론과 관념으로서의 자유와 현실적인 행동의 자유가 항상 부합한 것은 아니다.’

‘국가, 사회, 가정, 심지어는 나 자신마저도 본질적인 자아를 지배하고 억압한다.’

‘사회는 보편성이라는 덕목으로 개인의 욕망을 지배 한다…….’

 

문득 가슴이 시큰해졌다.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뭔가에 억압당하고 지배를 받으며, 절제를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절제가 노예의 미덕’이라는 선생의 말이 틀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대부분은 노예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입시에 치여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못하는 선생으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며느리로서, 고3 아이를 비롯한 두 아이의 엄마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잘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반성했을 것이다. ‘금’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절제하며 살아왔을 것인가. 

 

남편이든 부모든 아이들이든 부르면 곧바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겠지만, 나는 행복해 했을 것이다. 내 역할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찼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항상 그랬을까. 

    

내게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 있었다. 좋은 글을 쓰며 사는 그 일은,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꿈꾸었던 일이기도 했다. 당시 문리대 벤치에서 시화전을 가졌던 동아리 친구들은 이미 사회적 명성을 드높이기 시작했지만, 나는 선생과 아내, 딸과 며느리, 엄마의 역할에 충실하는 동안 꿈을 잊고 살았다.

 

그러나 잊었다고 해서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꿈은 되살아나 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알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는 무릎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는 내게 호된 목소리로 꾸짖곤 했다.

 

너, 지금 뭐하는 거니? 이렇게 살아도 되니? 네 친구들을 봐. 모두 자신의 세계를  이루어가고 있잖아. 네 힘을 보여줘. 예전의 너를 생각해봐.

 

온몸이 뜨거워졌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이 늘어갔다.

 

정말,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살인적인 입시 체제 아래에선 선생으로서의 보람과 자부를 얻지 못할 거라는 절망감이 나를 무너뜨렸고,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열망에도 불구하고, 사춘기의 예민한 아이들과 힘겨루기를 하다보면 금세 지쳤다. 피곤의 연속이었다. 밤이면 쓰러지듯 누웠고, 아침이면 혼몽한 의식을 다잡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속에 꿈이 들어설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나는 잘 가르치는 선생,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훌륭한 선생이 되고 싶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었고, 현명한 아내가 되고 싶었고, 착한 딸, 착한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에는 내가 가진 시간과 힘이 너무나 미약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무엇인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인 거 말고, 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 속에는 쉼 없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며칠 전, 서울에서 친구가 내려왔다. 기차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우리는 광주역 화단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열에 들뜬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잘 사니?"

"아니."

"왜?"

"지금껏 뭐하고 살아왔나 몰라."

"아이가 고3이라서 힘드니?"

"그것도 그렇지만……."

"왜, 둘째 아이가 사춘기라서 속을 썩히니?"

"아니".

"그럼 뭐야?"

"해놓은 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

 

친구는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힘껏 껴안아 주었다. 그러더니 등을 토닥이면서 가만가만 말을 이었다.

 

지금껏 넌 열심히 잘 살았어. 우리나라 고3 엄마 역할이 얼마나 어렵니? 그 일도 잘 해내고 있잖아.

 

눈물이 핑 돌았다. 친구는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다만…… 네게 감사하는 마음이 좀 부족한 것 같다. 마음을 넉넉하게 풀어놔봐. 그러면 주변의 모든 것, 건강하고 열심히 잘 자라주는 아이들에게까지 고마운 마음이 들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네 마음도 편안해질 거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네가 지금 힘들어하는 모습까지도 말이야. 너는 지금 부모로서 겪어야 모든 과정을 통과하는 중이잖아. 그것도 좋은 글을 쓰는데 양분이 될 거야. 네가 지금은 당장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것들은 네 마음 속에 차곡차곡 챙겨질 거야. 나중에 그걸 쓰면 되잖니?

 

구내방송이 기차 출발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친구는 쫓기듯 플랫폼으로 들어가면서 자꾸만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과 열망으로 달아오른 채 멀어져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시야가 점점 흐릿해지더니 기어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태그:#행복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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