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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교한 달빛 아래 그림자를 던지는 청춘의 외로운 질주. 어두운 삶의 무대 아래에서도 뜨거운 심장 질은 더욱 세차게 요동친다. 내 곁을 스쳐간 차 뒤로 낡은 바람이 건조하게 뺨을 훑고 나면 도시의 풍경들은 어느 새 저만치 밀려난다. 오직 타다 남은 잿빛하늘로부터 '깜부기불'이 된 별들만이 나의 호흡 위에 서성거리고 있을 뿐….

 

과달라하라(Guadalajara). 멕시코에서 두 번째로 큰 이 도시에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기 위해 거친 숨을 몰아쉬고 한 걸음에 달려가고 있다. 신년을 이틀 남겨놓고 새로운 것을 맞이하기 위해 또 다른 정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은 조용히 세상에 어둠을 칠한다. 일단 숙소 구하는 것보다 앞서 당장 시내로 달려갔다. 센트로는 그야말로 인산인해. 2007년을 마무리하려는 인파로 북적인 것이다. 그 풍경 사이로 의지를 벗어난 시신경이 고정되어 오래도록 담아보는 광경. 생동감 넘치는 밤공기를 뚫고 역사의 외투를 두르고 우직하니 서 있는 찬란한 '카떼드랄'.

 

대성당 정면 각종 건축 미학의 가미된 화려한 외양 뿐만 아니라 내부에는 현대의 대표적인 종교화가 무릴료의 그림이 있다.
대성당 정면각종 건축 미학의 가미된 화려한 외양 뿐만 아니라 내부에는 현대의 대표적인 종교화가 무릴료의 그림이 있다. ⓒ 문종성
과달라하라 대성당  굴곡진 역사를 가진 식민지 시대의 심벌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떼드랄. 1618년에 완공된 카떼드랄은 앞으로 10년만 있으면 건축완공 된지 400년이 된다.
과달라하라 대성당 굴곡진 역사를 가진 식민지 시대의 심벌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떼드랄. 1618년에 완공된 카떼드랄은 앞으로 10년만 있으면 건축완공 된지 400년이 된다. ⓒ 문종성

지금껏 많은 교회와 성당을 봐 왔지만 이만큼 압도당한 적은 드물었다. 하나의 역사를 위해 60년 간 노예들의 땀까지 눈물로 바꿔 돌들을 쌓아 올렸던 곳. 종교적 순종의 완성을 위해 숱한 피 흘림으로 칠을 해야 했던 곳. 네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해야 할 평화의 중심은 야만으로 얼룩진 인디언 노예사냥의 중심으로 스위치를 바꿔 눌렀고, 영혼을 잠잠한 평안으로 물들여야 할 성당의 종소리에선 자신의 터전에서 몰살당한 인디언들의 고통스런 비명이 터져 나온다. 예수를 믿었지만 결코 예수를 사랑하지 않았던 자들에 의해 세워진 비참도록 아름다운 성전이여!

 

역사를 잠시 비켜간다면, 과달라하라 카떼드랄은 그 눈물을 잠시 멈추고 탄성을 지르게 하기 충분하다. 스페인 침략 당시 식민지 자금의 무려 3분의 1을 투자해 꼭대기 2개의 탑을 비잔틴 양식으로 치장한 것을 비롯해, 코린트, 토스카나, 아라비아 등 다양한 양식이 도입되었다고 하니 건축의 미학 속에서 다양한 그들의 문화흡수를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렴 역사에 남을 건축물을 남겼다 해도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그래서 그 아픔을 짓누르고 살아내야 하는 멕시칸들에게 남긴 상처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밤에 본 대성당 아름다움이 더해진 카떼드랄 뒤편에 성탄 장식이 펼쳐져 있다.
밤에 본 대성당아름다움이 더해진 카떼드랄 뒤편에 성탄 장식이 펼쳐져 있다. ⓒ 문종성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재야의 종소리를 뒤로하고 신나게 뛰어 들어가는 어린 아이들, 높이 솟구쳤다 떨어지는 분수의 물줄기처럼 인생의 마지막 장을 정리하는 노인들, 조도가 낮은 오렌지 등불 아래 은밀한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연인들, 계단에 앉아 한가로운 평화를 누리는 가족들을 품고 있는 카떼드랄. 그 십자가 아래 적막한 요란함으로 시작된 역사가 활기찬 고요함이 되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바래본다.

 

마지막은 언제나 아쉽고 또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로 술렁이기 마련. 거대한 성당을 한 바퀴 돌아 나온 길.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천천히 자전거를 밀어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인파 속을 헤쳐 가며 까치발을 들어 머리들 위로 고개를 삐죽 내어보니 더 수많은 인파가 내 눈 앞에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그리고 성당 뒤편 광장에 설치된 야외 특설 무대에서는 바로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고 있었다. 송년 음악회를 하는 것이다.

 

최고의 무대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만드는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벅찬 감격에 그저 할 말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런 감동의 현장도 그 감정을 나눌 수 없는 혼자라서 심히 안타까울 뿐.
최고의 무대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만드는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벅찬 감격에 그저 할 말을 잃게 된다. 하지만 이런 감동의 현장도 그 감정을 나눌 수 없는 혼자라서 심히 안타까울 뿐. ⓒ 문종성
공연 대성당 뒤편 광장에서 송년 오케스트라가 열리고 있다. 특설 무대를 통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는 혼신의 열정을 다하는 연주자들과 값진 예술에 대한 답례로 환호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청중들이 하나가 되어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무대를 연출한다.
공연대성당 뒤편 광장에서 송년 오케스트라가 열리고 있다. 특설 무대를 통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자리에는 혼신의 열정을 다하는 연주자들과 값진 예술에 대한 답례로 환호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청중들이 하나가 되어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운 무대를 연출한다. ⓒ 문종성
 

이제 막 클래식에 취미를 붙여 듣기 시작한 나는 오디오의 재생이 가져다주는 평면적 지루함을 벗어나 보다 입체적인 현장감을 제대로 맛 볼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애마'를 세워놓고 제목도 뭔지 모를 클래식을 귀로 눈으로 또 가슴으로 들었다.

 

핏줄이 튕기는 듯한 현악기의 선율, 대지 위에 말발굽 소리처럼 심장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북, 그리고 얼었던 세포들을 깨우는 관현악의 환상적인 하모니. 잔잔한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연주되다가도 어느 순간 표현하기 벅찬 아름다운 선율이 폭발할 때에는 내 마음까지 음악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게다가 마지막 무대에서는 클라이맥스부분에서 폭죽까지 터트리며 사람들을 열광케 한다.

 

로봇 공연 로보캅 복장을 하고 관객이 주는 팁을 받으면 로봇처럼 움직이는 행위 예술가. 역시 어린이들이 주 타깃이다.
로봇 공연로보캅 복장을 하고 관객이 주는 팁을 받으면 로봇처럼 움직이는 행위 예술가. 역시 어린이들이 주 타깃이다. ⓒ 문종성

결국 마지막 무대 마지막 음악은 바로 박수와 환호, 그리고 함성의 3중주였다. 오케스트라라고 해서 마냥 실내의 고품격 이미지만으로 객석과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나 관객들이나 서로의 위치에 관계없이 하나가 되어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음악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눈대중으로도 1만 명이 가볍게 넘어 보이는 대관중이 하나가 되어 축제를 즐기는 장면이 너무 멋있고 감동적이었다. 이렇게 환상적인 야외공연을 그저 혼자만 보고 있자니 감탄도 잠시 이내 서글퍼지려한다. 마침 내 옆에 아리따운 아가씨도 이 장면에 못내 감동했는지 연신 감탄사를 연발했다. 손바닥을 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 두 손으로 놀란 벌어진 입을 가릴 때 순간 비치던 맑은 미소가 얼마나 예쁘던지. 잠시 고개를 돌려 본 그녀의 감격스러운 표정에 나도 괜히 흐뭇해졌다.

 

하지만 그 때였다. 갑자기 정체불명의 남자가 그녀 뒤에서 쑥 나타나더니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는 함께 그 광경을 목도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백옥보다 투명한 한 점 바람에 떨려 흩어진 꽃잎에 스쳐도 쉬이 상처가 날 것만 같은 그 고결한 천사에겐 개미핥기와 고릴라의 불건전한 만남이 의심되는 남자친구가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오케스트라의 장중한 연주에 감읍했는지 남자는 여자의 입술에 살며시 키스를 하는 것이었다. '짐승 같은 놈'.

하지만 여자는 행복에 겨워하며 남자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야, 그냥 가자. 여기 있음 뭐하냐? 사람 많고 복잡하기만 하다."

 

더 이상 그 꼴을 볼 수가 없어 로페카에게 투덜대며 당장 인파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혼자라는 외로움에 또다시 내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한숨 속에 체념을 위한 미련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도 대도시라서 그런지 구경할 게 너무도 많아 생각을 전환하기에는 편했다.

 

'복잡해줘서 고마워, 과달라하라 센트로.'

 

트리 연말 거리에 트리가 없다면 앙꼬 없는 찐빵.
트리연말 거리에 트리가 없다면 앙꼬 없는 찐빵. ⓒ 문종성

카떼드랄 뒤로 펼쳐진 야외 오케스트라 무대에서 더욱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런데 길 한 쪽 구석에 웬 아이가 벽에 기댄 채 길바닥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맞지도 않은 음을 아코디언으로 구슬프게 연주하는 예닐곱 살 가량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였다. 그런데 더욱이 마음이 안쓰러운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옆에 짐으로 보였던 이불 속에서 뭔가 꿈틀대는 것이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두 살 정도로 보이는 여동생이 담요에 덮여진 채 누워있었던 것이다.

 

"휴, 이 좋은 날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긍휼함에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기부했다.

 

"고마워요."

 

짧고도 무뚝뚝한 한 마디를 건네는 아이의 모습을 얼마동안 그대로 서서 바라보았다. 녀석은 비록 구걸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존심은 있었던지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면 얼른 얼굴을 가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추운 날에 그저 담요 하나로 의지해야 하는 어린 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아빠는 지금 뭐하는 걸까? 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있기나 한 걸까? 혹시 어쩌면….'

 

혹시 라는 가정이 맞지 않길….  '너의 인생 아름답길 바란다', 독백조의 작은 메아리를 남겨두고 무거운 마음을 뒤로한 채 다시 핸들을 돌렸다. 화려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바로 옆에 쪼그려 앉아 연주하며 구걸하는 아이를 보니 같은 날을 두고도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기쁜 날이 누구에게는 가장 슬프고 서러운 날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저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선물 꾸러미 속에 아이의 희망도 같이 들어있기를 감히 축복을 빌어 주면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카떼드랄도, 모두가 하나 되어 감동에 젖어든 오케스트라 연주회도, 그리고 트리 아래에서 구슬피 엇박 연주를 하던 이름 모를 아이도, 여전히 대목을 위해 바삐 움직이는 상인들과 이 순간을 즐기러 거리로 쏟아져 나온 모든 사람들도, 그리고 그 속에 덩그러니 혼자인 나까지…. 한 해를 마감하는 축제의 무대 위에서는 모든 것이 배경이 되었다. 동시에 무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각기 다른 한 해를 보낸 인생들이었겠지만 다가오는 새해를 맞는 생각들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멈추지 않는 시간을 후회로 잡아보려는 대신 멋지게 안녕을 고하는 자만이 삶을 헛되이 살지 않았으리라! 인생이여, 노래를 불러라. 최선을 다한 자에게서 나온 기쁨과 희망에 찬 노래를!

 

2007년을 만 25시간 남겨놓은 유난히 아름다웠던 밤은 그렇게 과달라하라 센트로에서 보냈다. 그리고 운이 좋았던지 자전거 세계일주자에 도전을 격려하며 유스호스텔 측에서 무료로 하룻밤을 잘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되지도 않을 작은 친절이 내게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온 것이다.

 

대답 어둠이 도시에 내려앉을 때쯤 카떼드랄의 종소리가 하늘의 침묵을 대신한다. 여전히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 밖에.
대답어둠이 도시에 내려앉을 때쯤 카떼드랄의 종소리가 하늘의 침묵을 대신한다. 여전히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 밖에. ⓒ 문종성

다음 날, 근 한 달 보름여 만에 뜨끈한 국물이 있는 떡국과 매콤하고 달달한 김치를 먹으며 눈물 세 방울 떨어뜨리며 드린 송구영신예배를 통해 지금보다 확실히 더 나은 내가 되기로 약속했다. 아무 짝에 쓸모없는 돈짝 만해진 욕심을 뒤로 하고 도담도담 마음의 키가 자라나게 하는 새해가 되기로 말이다.

 

다신 오지 않을 시간의 기록 속에 유난히 공백이 많았던 내 삶을 반성하며. 그리고 이 추운 날 찬 땅바닥에 누워있는 아이를 보면 이제는 정말 녀석을 품 안의 온기로 따뜻이 안아주는 제발 좀 괜찮은 녀석이 되어 보자고 말이다. 그럴 수 있지? 그렇다면 새로운 시작과 함께, Adieu 2007.

 

언제쯤 내 인생의 답을, 내 소망의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까.
언제쯤내 인생의 답을, 내 소망의 비밀을 찾아낼 수 있을까. ⓒ 문종성

 

카떼드랄의 침묵

 

햇살에 부서진 옛 거리를 걷다

청춘의 불안한 눈동자로 훑어본 카떼드랄 광장.

 

웃고, 떠들고, 사색하고, 구걸하는 거리 어디에도

다만 나에게는 하나의 질문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시간은 조금씩 이 거리를 밤으로 색칠하고

교교한 달빛이 노랗게 익어 호흡 위에 출렁거릴 때

 

개밥바라기로 날아오르고픈 한 영혼은

하룻밤 날개 짓을 위한 비밀을 풀기 시작한다.

 

하지만 봉인된 진실은 어딘가 더욱 깊숙이 침잠해 버리고

진리를 구하는 기도는 시간의 끝을 찾지 못하고 헤맬 뿐.

 

교태스런운 웃음으로 기운 달빛 아래

그림자마저 던지지 못하는 청춘의 푸르름은 바래버리고

 

어느 누구의 시선도 흡수할 수 없는 이 거리에

울멍진 십자가만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구나.

 

바람이 달려와 안긴 자리를 힘겹게 털어내

재회의 절대적 불가능성을 위한 추억을 남겨둔 자리에서

 

스물일곱 번째 오답에 울먹거리던 사내는

덕지덕지 남은 용기와 인내만으로 다음 시험을 기약한다.

 

오, 신이시여! 부디 대답해 주소서.

내 기도가 당신의 입술을 열 수 있기를.

 

오, 신이시여! 제발 말씀해 주소서.

당신 앞에 엎드리어 찾아야 할 진리의 비밀을.

 

…….

 

땡,땡,땡!

성당의 검은 종소리만이 하늘의 침묵을 대신한다.

덧붙이는 글 |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과달라하라#문종성#비전노마드#멕시코#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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