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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육에 전념한 것도 죄인가요?”

김형근 교사, “아무리 생각해도 내 죄를 모르겠다”

 

 

“주체사상에 입각해 친북 반미적인 통일의식을 학생들에게 주입하고 전위대로 활용했다”라는 이유로 지난 1월28일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군산 동고등학교 김형근 교사(49)가 28일 오후 2시 전주지법 3호 법정에서 두 번째 재판을 받았습니다.  

 

김 교사는 모두진술에서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조선일보>, 뉴라이트 등 일부 언론들의 ‘빨치산’을 들먹이는 여론몰이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것 같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김 교사 변호사측은 검찰의 공소 사실에 대해, 제2회 남녘 통일애국열사 추모제 참가, 통일교사모임과 통일산악회 활동 등의 몇몇 객관적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했지만, 이적표현물 제작, 취득, 소지, 반포와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선전’ 등의 혐의에 대해서는 전면 부인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2년여에 걸친 유무선 전화 감청과 강도 높은 압수 수색, 13회의 소환조사 등 김 교사를 무슨 커다란 국사범인 양 취급한 것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6·15선언 정신에 입각한 통일교육을, 어린 중학생을 전위대로 키우려 했다는 내용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통일교육은 분단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분단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육인적자원부가 검증한 통일교과서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과서에 따른 통일교육이 적을 이롭게 한 행위가 되어 처벌을 받는다면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것이나 다름없지요. 남북의 지도자들이 협약한 6.15선언 정신으로 통일교육을 해온 김 교사를 처벌하는 것은 국가가 이 시대 교육자들의 인권과 양심을 짓밟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생각입니다.

 

다음 재판은 4월18일(금) 오후 2시 전주지법에서 있을 예정인데,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이시우 사진작가에게 징역 10년에 자격정지 10년, 압수물품 몰수라는 검찰의 구형에, 서울지법이 무죄를 선고한 예를 보더라도 김형근 교사는 무죄가 선고돼야 마땅할 것입니다. 

 

 

김 교사가 옥중에서 보내온 편지

 

김 교사는 재판을 받기 전 필자에게 보내온 편지에서 “저에게 주어진 조건이 좀 가혹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분단보다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고, 일상 속에서 하나씩 분단질서가 깨어지고 있다”라며 통일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김 교사는 “언론의 마녀사냥부터 조사 그리고 구속에 이르는 매카시즘의 배후에는 소위 ‘빨치산’(빨갱이)이라는 아직 미성숙한 야만의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라며 아이들과 함께 회문산 추모전야제 문화행사에 참석한 것을, 북을 이롭게 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여중생의 ‘1.000통째 통일편지’를 근거로 삼는 검찰을 점잖게 나무라고 있습니다.

 

김 교사는 “60여 년 전의 싸움터에서 있은 추모제 참석은 하등의 문제가 될 게 없다.”라며 사건 직후, 희생자들뿐 아니라 조승희 씨의 촛불까지 함께 켜놓았던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동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죄가 밉더라도 죽은 자에 대해 예우를 해주는 것이 인류 보편의 제네바 협정 정신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김 교사 편지는 “우리가 사는 지금은 미친 광풍이 난무하는 시대이고 그 시대의 한복판에 제가 갇혀 있다.”라며 “통일로 가는 길이 어찌 난관이 없겠냐?”라는 물음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통일교육에 전념한 것도 죄인가요?”

 

김 교사 부인 전영선(해오름 단장) 씨는 29일 전화 통화에서 “사랑하는 어린 제자들에게 했던 통일교육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올가미가 되어 차가운 교도소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며 “통일교육에 전념한 것도 죄이냐.”라며 비통해 했습니다.

 

무용가인 전 씨는 “김 교사의 모두진술이 끝나고 방청석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자 방청객 몇 분이 밖으로 쫓겨나고, 가장 강력하게 항의하는 어머님이 넘어져 타박상을 입는 바람에 재판이 정회되고 법원경비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도 했다”라며 무척 가슴 아파했습니다.

 

특히, 집 전화와 휴대전화, 이-메일 내역, 음성사서함 청취, 문자메시지와 메일 내용을 2년 가까이 열람한 국정원의 야만적인 행위에 분노를 금할 수 없으며 표현의 자유가 생존하는 민주주의 국가인지 의심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전 씨는 서울에서 내려오신 홍근수 목사님과 문규현 신부님을 비롯하여 학부형과 제자들, 교수와 대학친구들, 5.18동지회 선후배님들과 전국에서 와주신 통일단체 회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전 씨는 <조선일보>의 허위보도로 충격을 받고 ‘구와나사’에 걸려 2년 가까이 병원치료를 받는 중에 구속된 남편의 건강을 걱정하며, 주변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봐 주는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김형근 교사의 모두진술서 전문

 

"6.15공동선언과 교육의 의미를 되짚어 보려 합니다"

 

사 건:국가보안법 위반

피고인:김형근

 

재판장님! 저는 지난 1월 28일 구속된 이후 영장실질심사와 구속적부심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과 검찰이 얼마나 악랄하게 저를 격리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들은 몇 가지 기억에도 없는 자료를 가지고 저를 무슨 사상가로 아주 쉽게 몰아세웠으며, 어린 중학생들을 데리고 무슨 국가를 전복시킬 전위대를 배양할 목적으로 활동했다는 어마어마한 죄를 저에게 뒤집어 씌었습니다.

 

아디들과 함께 한 교육이, 그것도 교육부에서 인가한 통일 교육활동과 통일교사의 기초연구활동을 놓고, 국가의 존립과 안전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적 질서를 위태롭게 했다고 쉽게 등치해버리면 도데체 우리 공동체에 가치 있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의 교육활동이 국가보안법에 위반이 된다는 범죄판단에는 6.15 남북공동선언을 뒤로 물리려는 음모적 책동도 있겠지만, 편협한 ‘조직이기’의 논리도 깊게 가미되지 않았는가 의심이 듭니다. 제가 조사과정에서 들은 이야기로 ‘전북 대공분실 직원 88여명이 지난 7~8년간 한건의 공안사건을 적발하지 못했다’며 ‘이번에는 꼭 구속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또 국가정보원에서도 2005년 9월11일~2007년 5월 10일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저의 유선전화, 휴대전화, 우편물, 이메일 전자우편까지 남김없이 감청, 열람, 추적을 하였습니다. (국정원통보자료 제 전대08-1,2호) 해봐야 아무것도 없었는지 겨우 두건만 공소사실에 올라와 있고, 그것도 범죄와의 연관성이 부정확합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여러 곳에서 제가 걸려들 수 있도록 본인도 모르게 그물을 쳐놓고 기다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관과 인원이 어떻게 하든 저 하나를 죽여 보려고 눈에 쌍불을 켜고 총집중을 하였으니, 아무런 죄도 없고 따라서 숨길 것도 없는 제가 그렇게 시달리며 추궁을 받고 또 감옥에 갇힌 것도 저들에게는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겠지요. 저에게는 수구 공안세력들이 저지르는 더 할 수 없는 억압과 합법을 가장한 자의적 폭력인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쇠우리 같이 집단적으로 악한 세력이나 구조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60년 이상 분단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조국의 통일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들이 있고,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를 거부하며, 일인독재나 일당독재를 배제하고, 합리적 법질서와 의회주의의 신념 속에서 우리 사회를 참다운 민주공동체로 만들어 가려는 대다수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정의가 있는데, 거짓은 진실이라고 윽박하며, 한 멀쩡한 교육자를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둔갑시키는 일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이 안타까운 것은 영장 실질 심사에서나 구속적부심에서 젊은 판사님들께 이 문제가 안고 있는 역사성이나 사회적 동의수준, 그리고 통일을 향한 공동체의 지향과 염원은 보지 못한채, 저들이 악랄하게 꾸며놓은 온갖 서류덩어리와 위장된 주장에 그냥 사인을 하고 말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 학기 준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인신이 구속되어 이 재판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구속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해도 저는 사법권의 독립을 존중하는 사상과 입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또 학생들에게 근대적 소유권 개념을 확립한 로크의 입법과 행정 이권분립에서부터 몽테스키외의 3권 분립까지 민주적 가치를 소중히 생각하며 성실히 가르치고 있는 교사이므로, 본 재판의 과정에서도 시종 사법부를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고자 합니다. 이제 저는 모두 진술에서 앞으로 재판진행 과정에 계속 중심문제로 떠오르게 될 ‘6.15남북공동선언’과 ‘교육’의 의미만을 간단히 되짚어 보려 합니다.

 

1. 6.15 남북공동선언은 국가보안법 보다 더 상위의 개념인 민족의 대 협약입니다.

 

2000년 남북 양 정상에 의해 체결된 6.15남북공동선언은 우리시대 통일의 최고 헌장이며, 분단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낼 민족의 대 장전입니다. 제 1조는 우리 민족끼리 자주의 원칙을 재천명했고(1972. 7. 4 공동선언에 이어) 제2조는 남의 연합제와 북의 낮은 단계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지향한다고 하여 남북이 통일 방안까지 합의의 기초를 마련한 쾌거였습니다. 지난 2007년 말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또 다시 북을 방문하여, 6.15공동선언의 구체적인 이행서격인 10. 4 선언을 합의하고 돌아옴으로써, 우리 민족에게 6.15 선언은 이제 뒤로 물릴수 없는 통일의 대강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따라서 남과 북 그리고 해외에 사는 우리 민족들은, 한민족이라면 그가 어디에 살건 이러한 조국통일의 대강에 따라 통일로 가는 역사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이 민족으로서 당연한 본성적 요구이며 의무로 됩니다. 본인 또한 교육자로서 통일 교육에 관한한 6.15 공동선을 중심으로 교육활동과 연구활동을 계속 해왔습니다.

 

그런데 검찰에서는 이와 같은 6.15 남북 공동선언에 따를 저의 행동을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는 국가보안법상 위반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 근거로 6.15남북공동선언이 북의 대남전략의 일환이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이라는 것은 북의 이념이라고 들고 있습니다. 물론 6.15 남북공동선언과 국가보안법은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규범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남북지도자가 만나서 서로 통일을 하자고 하는 것에서부터 크고 작은 교류협력까지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 구성원과 회합통신죄에 해당합니다. 개성공단일지라도 북을 방문하면 잠입탈출죄에 해당합니다. 이는 6.15남북공동선언에서 북을 더 이상 적이 아니라 공존번영하며 통일을 해야 할 같은 민족임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모순들입니다.

 

이렇게 상호충돌 되는 모순이 생길 경우, 서로 위상을 달리함으로써 모순이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남북 모두에게 이익이 되고, 또 남북 모두의 지향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보다 상위규범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6.15남북공동선언에 입각한 통일교육활동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국가보안법이 분단지향의 법률이면서, 국민들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는 독재유지를 위한 반민주악법이기 때문에, 진즉에 폐지되었어야 하는 점은 UN의 폐지권고안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에 그 역사와 폐해, 시대적 조응의 문제, 낱낱의 조항에 대한 부당성은 여기에서 생략합니다.

 

2. 숭고한 교육적 행위를 낡은 법률적 잣대로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이 주장하고 있는 바는 ‘백지처럼 하얀 학생들에게 빨간색을 칠했다’(영장심사 검찰주장)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은 한마디로 교육에 대한 초보적 이해조차 없는 사람들의 판단입니다. 이런 구시대적인 낡은 판단이 법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교육에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습니다. 교사가 학생을 상품 찍어내듯 어떻게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은 근대 이분법적 체계의 낡은 이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교육학적인 개념과 명제로 이야기해보자면, 검찰의 주장은 객관주의 혹은 표상주의로 표현할수 있습니다. 이는 지식을 인식주체와는 독립적으로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며, 교사는 백지상태(tabula rasa)인 학습자에게 지식과 정보를 하나씩 채워주며, 적절히 반응할수 있도록 해야 하고 강화해야 한다는 이론으로서, 학습자인 아동을 수동적 수용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학생들이 대상화되고, 학교교육은 학생들의 삶을 잠시 유예하는 준비기간으로 이해합니다. 교사는 미리 완벽한 교수목표를 설정하여 학습자의 행동을 통제하고 적절히 이끌어 갈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 교육학적 이론의 대다수는 지식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며, 인식주체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contextuality)속에서 이해를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사회적 상호 작용이란 삶의 맥락이 중요하고,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주체가 구성하는 자신의 삶에 대한 능동적 행위의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교사는 학습자가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며 맥락에 적합한 의미를 구성할수 있도록 하는 안내자, 촉진자, 대화자로서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지식구성의 주체는 교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학습자 자신의 의미를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해석하는데 있습니다. 학교교육 역시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삶의 과정이지 유예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저의 교육관은 이런 현대적 교육이론에 반성적으로 기초하고 있으므로, 학생들은 학습에서(삶에서) 주인으로 생각했으며, 삶의 풍부한 인간 경험 세계들이 맥락으로 주어지고 있을때 근접발달 영역내에서 사회적 구성이 가능한 문제해결의 교육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러한 교육관과 교수학습모델은 입시교육의 한계 때문에 제한적이어서 그렇지 모든 교사들에게 보편적으로 권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검찰에 의해서 제기되는 낡은 지식관과 인식론, 그리고 교육관을 보면서 보편적 교육의 이론들과 실천들이 법률적 영역보다 앞서 있을 때 그것이 어떻게 법률적 판단의 대상으로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학문에서 어느 영역의 우선순위를 단순 비교하여 우월을 가릴 수는 없지만, 교육의 영역에서도 수많은 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고찰, 발달과 인식에 대한 탐구, 그리고 지식 구성과 미래적 삶을 준비하는 능력과 교수학습모델 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점만큼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장님! 이와 같이 저의 사건은 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6.15남북공동선언에 대한 이해가 얽힌 문제이고 또 교육을 보는 시각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전국적인 관심의 한 가운데 있습니다.

 

얼마 전 새 정부의 통일부 장관으로 내정되기까지 했던 남주홍씨가 ‘6.15공동선언은 단순한 대남 통일전선 전략용 정치문서에 불과하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신문기사(한겨레 2.26)를 보았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고 어쩌면 저를 조사했던 조사기관의 입장과 이렇게 똑같을 수 있는지 전율했습니다. 우리 남한만 해도 민족구성원 대부분이 압도적 다수로 6.15공동선언을 지지하고 있는데(70%),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6.15공동선언을 적화통일의 한 방편이라고 보면서 통일을 방해하는 냉전수구세력이 이렇게 엄연히 권력의 망을 가지고 집단적 실체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냉전시대의 이념적 틀을 벗지 못한 냉전 수구세력들은 냉전시의 낡은 이데올로기적 잣대로 모든 것을 평가하고 또 단죄하고자 합니다. 마치 외눈박이가 자기가 비정상인줄 모르고 정상인들에게 눈을 하나씩 빼라고 요구하는 식이지요, 특히 교육부분에 들이대는 이런 흑백논리의 이념적 잣대는, 다양성과 균형성을 요구하는 교육을 죽이고 그 대상인 인간(학생)의 능동성을 죽이고, 또 공동체의 미래를 꿈꾸는 모든 창조적 사고들을 말살 시킵니다.

 

그 동안은 교육관계자들이 권력의 바운더리 안에서 상대적인 나약함으로 인해 지금과 같은 냉전 수구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통했을지 모르겠지만, 21c 광속으로 시공이 압축된 오늘의 조건에서는 과거와 같이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냉전 매카시즘이 통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6.15 남북공동선언을 중심으로 한 평화와 통일 교육을 단죄한다는 것은 칠천만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을 짓밟는 것이며, 통일되어 살아야 할 민족의 내일인 후대들의 꿈조차 짓밟아 버리는 잔인한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래도 제가 터무니없이 처벌을 받게 된다면, 이미 통일시대에 사문화 되어가는 국가보안법의 위반의 문은 훨씬 더 넓어져서, 과거처럼 애꿎은 사람들이 줄줄이 엮여 들어올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수많은 교육자들과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 재판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부디 권력의 힘이나 보수화된 사회분위기에 흔들려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하거나 하지 마시고, 낱낱의 사실관계, 범죄의 구성요건을 하나씩 치밀하게 검토해주셔서, 개인적으로는 억울함이 없도록 해주시고, 민족과 역사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은 정의로운 판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논어 안연편에 ‘필야사무송(必也使無訟)’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송사를 처리하면서도) 반드시 송사를 없게 하라는 공자님의 말씀입니다. 병이 없는 세상을 바라는 의사의 고매(高邁)처럼, 배고픈 사람이 없게 하려는 농부의 직심(直心)처럼 다른 사람과 공동체를 배려하는 존엄 높은 정신이 오늘 이 재판에서도 꽃 피어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3월 12일 재판 모두진술)

 

지난 3월 12일 첫 공판에서 모두 진술서를 작성했는데, 그 날은 기회가 되지 않아 이번에 제1차 모두 진술서에 이어 2차 모두 진술서를 함께 제출합니다.

 

재판장님! 사람은 누구에게나 살아온 삶의 여정이 있고, 오늘 삶과 행동 속에는 그 역사가 묻어나게 됩니다. 저는 1978년 일인독재파쇼체제였던 유신철권 통치의 시절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유신체제는 사회를 하나의 커다란 감옥으로 만들어 놓고, 양심과 사사의 자유라는 국민들의 기본권은 물론, 삼권분립과 의회민주주의 제도 또 복수정당제도조차도 아예 무시해버린 오로지 일인만을 위한 장기집권체제였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일어났던 일이 동일방직 사건이었습니다. 살인적인 최저임금을 받던 동일방직 여공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일어서자 경찰과 관리자들이 합세하여 여공들에게 인분(똥)을 퍼붓고 폭력으로 철저히 짓밟았던 대표적인 노동탄압이었습니다. 종교 인권단체 등을 통하여 이 사건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사람으로서 갖는 최소한의 권리와 존엄마저 뭉개버린 이런 일에 누구든 관심을 쓰면 빨갱이라 의심을 받고 심지어 잡혀가기도 하기 때문에 알아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학교에서도 탄압은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교정에 경찰이 몇 개 중대씩 주둔을 하며 교내 행진하면서 군가를 부르며 시위를 하고 있었고, 사복경찰들은 학생과 교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조금만 이상한 낌새가 있다 하면 예비검속으로 학생대표들은 그냥 그들의 장소(전북대는 학생회관 지하)에 불려가 치도곤을 당하곤 했습니다. 가히 유신말기 발악적 지배를 눈에 보며 학교를 다닌 것이지요.

 

1979년 제가 시험을 보고 있던 중에 형사 20~30명이 시험장에 난입해 들어와 저를 짓이기고 수갑을 채워 끌고 갔습니다. 시위를 하기로 했다가 취소된 일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그들의 코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그 때까지 저의 죄는 파쇼통치가 어서 끝나기를 기도했다는 것이고, 미국식 민주주의인 자유와 인권을 선망한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실제적 정권을 장악한 80년 봄은 전국에서 거대한 민주화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해부터 수배 중이었던 저는 다시 새 학기에 학생운동 대열에 앞장을 섰고, 전두환에 의해 계엄확대가 실시되자 또 다시 수배되어 쫓겨 다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참혹한 광주학살이 벌어졌고, 그 시대를 젊은 대학생으로 살던 저는 울분과 좌절 그리고 저항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남한 정세가 불안하다고 미국에서는 항공모함을 부산에 급파했습니다. 저는 그 때 미국이 인권의 나라이기 때문에 광주시민을 도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전두환을 지원하였고, 거기 힘입은 전두환은 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살육전을 벌였으며, 전국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탄압을 자행했습니다.

 

이후 미국 대사 글라이스틴이라는 사람은 ‘한국 국민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통치를 해도 잘 따라가게 되어있다’며 노골적으로 전두환을 지지했습니다. 미국 놈들이 한반도에서 자기 잇속이나 중요하지 한국 민중들의 애타는 민주화 열망과 피 흘림을 안중에나 두었겠습니까? 제가 착각을 한 것이지요.

 

하여튼 저는 광주학살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들을 여기저기 돌리고 다니다가 늦게 체포되어 군 헌병대 영창에 몇 달 수감되어 있다가 군대로 강제징집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군대에서도 보안사 요원들이 빨간 것을 파랗게 만든다고 녹화교육을 시키지 않나, 시시때때로 무슨 수사인가를 받게 하지 않나 하면서 몇 개월씩 보안대에 끌려가 짓이겨지곤 하였습니다.

 

보안대에서는 말이 수사이지 그냥 무식한 폭력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제대를 하여 복교조치가 있은 다음, 학교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곧 또 퇴학을 당하고 다시 복교를 하고, 이러기를 반복하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1985년은 한 해 동안 경찰서에 끌려간 것만 10차례가 넘습니다.

 

제가 이렇게 삶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저의 부모님들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부모님들께서는 80년 당시 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만이라도 알자고 35사단 정문 앞에서 노을 하며 계셨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그 때까지 친구로 지내던 최낙도 의원에게 아들의 생사를 알아보아달라고 부탁을 하였다가 폭도 아들을 두었다며 거절을 당하자 한동안 친구관계를 끊고 계셨습니다.

 

제가 수배되었을 때도 일계급 특진에 눈이 먼 형사들이나 군부대 수사관계자들이 시골집에 일틀이 멀다하고 찾아와, 저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군화발인 채로 방에 들어와 온 집을 다 뒤집어 놓곤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놈들은 부모님에게 더러운 욕을 내뱉고 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며, 살림살이를 다 내던지는 바람에 방마다 난장판이 되어서 어머님께서는 그들이 떠난 뒤에 너무 서러워서 땅바닥 댓돌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시기를 반복했다 합니다.

 

지난번 재판정에서 ‘이놈들아! 내 아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가두었느냐?’라고 절규하신 어머님의 한 마디 오열 속에는 시대와 역사의 격랑 속에 살면서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지 못했던 그런 아들을 둔 어머니의 삶의 모습의 압축적인 한 표현이었습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광주민주화운동보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어 저에게 국가유공자 신청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늦게나마 보상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죽은 사람, 다친 사람, 그 때 그 일로 힘들게 되었던 정말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해서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차마 보상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같이 죽지 못하고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이 가장 크겠지요. 이 부분은 이 한마디면 충분히 짐작하실 것 같아 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때 어머님께서 ‘내 가슴에 맺힌 한이라도 풀리게 보상을 받아라. 보상으로 그토록 분하고 억울했던 세월이 다 풀어지겠느냐만 그래도 나는 내 아들이 국가유공자를 받는 모습을 보아야 쓰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질게도 5차례 이상 계속되었던 보상신청기간에 끝까지 접수하지 못하고, 보상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또 이렇게 구속되어 있습니다. 풀어주었다 또 가두고, 국가유공자로 보훈처에서 신고하라고 했다가 또 잡아가두고... 항상 꽃잔듸 길보다는 어려운 길을 택하는 자식을 50살 먹도록 바라보고 있는 칠순노모의 마음이야 오직 안타깝겠습니까? 이렇게 우리가정 깊숙이 묻어 있는 상흔 속에서 어머님 가슴 속 오열이었습니다. ‘야 이놈들아 ... 무슨 죄가 있다고 ...’

 

재판장님! 80년 5월 이후 저의 삶은 살아남은 자로서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시대적 진실과 일치 시켜왔습니다. 그래서 5월 항쟁 동지들이 그 시대를 살았던 양심적인 사람들이 이 재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하여 저는 재판에 보다 큰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겠습니다. 이제부터 공소내용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3. 공소장 첫머리 전과부분은 민주화운동으로 보상받아야 할 부분이지 누범임을 증명할 내용은 아닙니다.

 

저는 86년 ‘전라북도 민주화운동협의회’라는 운동단체에서 집행부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86년 4월말 전주교육청 큰 사거리에서 살인마 전두환을 규탄하는 시위를 주동하였습니다. 그 결과 지금 이 자리 방청석에 와계신 박종훈 참여연대 상임대표님과 이광철 의원 그리고 저까지 3명이 현상금 천만원에 일계급 특진을 걸고 전국에 지명수배를 당했습니다. 경찰들이 혈안이 되어 날뛴 것은 물론이고, 애꿎은 저의 부모님들은 또 한바탕 기관원들에 의해 닦달을 당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때 도피 중에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재판의 내용이 공소장 첫머리에 올라와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 말기 야만적 폭력이 횡행하던 때 그 때 저항을 하며 항거를 했고,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1987년의 재판 결과 내용이 공소장 첫 줄부터 적혀있다는 사실에 제가 깊은 한숨이 나옵니다. 아마 검찰 측에서 재판부가 어떤 판단을 유도하도록 적어놓은 작위라고 생각하면 너무 슬퍼서 차라리 몰랐던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저의 이런 전과는 이미 국회에서 6월 항쟁 관련 민주화운동보상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에 저에게 또 다시 보상을 신청을 해야 하는지 갈등을 준 국가유공의 내용이지 범죄 사실의 모두에 적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정의 그리고 자유를 위해 군부독재정권과 목숨을 건 싸움이 진행된 내용, 그 역사적인 과정을 놓고 누범의 징표로 삼는 것은 손톱만큼도 역사의식을 갖지 못한 자들의 집단적 죄악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죄목이 된다면 전국의 6월 항쟁 등지들의 자존심과 명예를 뒤집어 놓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초법적 폭력이 판을 치던 시절, 여기에 저항해서 맞서 싸운 것이 민주시민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로서 후세에 귀한 모범으로 남을 내용이지 탄압과 구속의 방편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검찰에서 국가보안법은 앞서 말한 고귀한 피 흘림과 숱한 희생 속에서 이뤄진 가치조차도 무차별적으로 그 혐의의 대상으로 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하나 자료와 증인들을 모셔다가 사실관계를 다루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당시 사무국장이셨던 박종훈 참여연대 상임대표를 비롯한 다수의 관계자들이 방청하고 계십니다. 원하신다면 즉석에서 증인을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모르고 집어넣었다면 지금 당장 공소내용에서 이 부분을 빼주십시오.

 

4.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은 더 이상 이적단체로 될 수가 없습니다.

 

‘조국통일민족연합’이란 단체는 남측 재야운동단체에서 공동으로 먼저 제안하고 북측과 해외가 이를 받아들여서 결성한 남, 북, 해외 우리 민족 3자 연대의 민간급 통일운동 기구입니다. 이 단체는 일방적인 북의 이념이 아니라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7.4남북공동선언에서 합의한 내용을 자기강령으로 삼고 있습니다. 비록 연방제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고 하나 그것이 적화통일로 등치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남북 양체제를 그대로 두고 통일을 하는 방안으로 평화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통일방안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범민련의 통일방안은 ‘연합제와 낮은 단계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지향하는 제2항과 똑같이 바꾼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도 범민련 남측본부의 구성은 특별히 이적성을 띤 결사조직이 아니라 남한 내 각 운동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체계를 갖춘 통일운동 조직입니다. 현재 남측 본부 의장이신 이규제 의장님도 전국빈민운동연합 대표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입장과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범민련 남측본부입니다. 다만 초기에 이 단체가 정부와 마찰이 있었고, 이 마찰 과정에서 ‘이적단체’라는 레테르를 부여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내용은 단순합니다. 범민련은 해마다 8월15일 범민족대회를 치르는데 남, 북, 해외의 3자 연대조직이기 때문에 의장단 공동선언서 등이 나오기 위해서는 해외를 통한 팩시밀리 전송의 방법으로 회의를 해야 했고, 이것이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죄에 해당한다는 정부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6.15시대입니다. 범민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는 전제는 북이 ‘반국가단체’여야 하는데, 6.15시대에는 북이 평화통일의 동반자이자 공동 주체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범민련은 이적단체로 될 수가 없습니다. 남과 북이 각각 법체계를 가지고 있고, UN에 국가로 각각 가입해있으며, 국제법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이란 명칭으로 독립국가 형태로 인정받고 있는 점을 생각한다면 북이 남한법의 효력이 미치는 반국가단체가 될 수 없음은 명확합니다. 또 7.4공동선언에서부터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6.15공동선언, 10.4선언 등 남과 북이 공동으로 합의한 규범들도 더 이상 북을 반국가단체로 보지 않습니다.

 

현실 또한 범민련 남측본부는 서울 한복판에 버젓이 사무실을 내고 있고, 범민련 남측본부 이름으로 정부 민간이 함께 주도하는 통일행사에 참여를 하고, 합법적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며, 남측 통일운동의 지도구심으로 공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 대학교 학생회장 등 대표들로 이루어진 한총련과 마찬가지로 각 운동 단체의 대표들로 중심이 꾸려진 범민련 남측본부 또한 이적단체로 될 수 없습니다. 설령 범민련 남측본부에 대한 그런 규정성은 이전 판단이기 때문에 재판부에서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범민련 남측본부의 활동이 모두 이적활동이란 근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저는 1995년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당시 전북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9월 말경 구속이 되어 생업의 터전이 파괴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 재판이 미루어져 96년 초에 심리가 열렸는데 저는 심리과정에서 저의 고통스러운 처지와 격무에 시달리는 판사님을 깊이 배려하여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인정을 못하지만 범민련 남측본부 가입부분은 인정할테니 선처를 바란다’고 부탁을 했습니다. 재판부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저는 집행유예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속기록에 다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후 저는 사면이 되어 교사로 임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공소장에서 검찰이 그 대의 공소장 앞부분을 그대로 베껴놓음으로서(p4 위 8줄 ~ p5 위 6줄) ‘반성하지 않고’ 증거로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한 번 처벌받은 내용을 그것도 완전히 사면되어 회복된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그대로 공소사실에 다시 베껴놓아 그릇된 판단이 유도된다면 이 재판의 공명정대함과 객관성은 심각하게 훼손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검찰에서는 범민련에 대한 판단 부분과 저의 옛 공소장을 베낀 부분을 빼주시길 정식으로 부탁합니다.

 

5. 6.15민족공동위원회 역시 그 누가 훼손할 수 없는 남과 북의 민관합동 통일기구입니다.

 

남과 북이 6.15공동선언을 하고 해마다 기념행사를 하는데 주최가 필요했고 그것이 6.15남북공동행사 준비위원회 성격으로 있다가 6.15민족공동위원회로 정식 명칭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초기에 정부에서 나서서 준비위원회를 결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민관합동의 전 민족적 통일연대기구로서 6.15남북공동선언을 잘 실천해나가자는 취지의 상설적 단체입니다. 얼마 전에는 아주 낮은 형태의 공동규약까지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임대표로 백낙청씨가 선임되어 있는 이 분은 서울대 교수였던 분으로 창작과 비평사 사장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북의 대남전략의 일환 어쩌고 해버리면 어떡합니까? 북에서 이를 확대 강화하자고 했다고 해서 6.15민족공동위원회가 대남적화통일의 통일전선 전술의 일환으로 매도될 수는 없습니다. 남측에서도 통일부를 중심으로 관에서 지원하고 있었고, 각 계 각 층의 운동단체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를 확대 강화하자고 했습니다. 6.15공동선언의 내용으로 보아도 통일을 위한 민족기구가 형성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6.15남북공동선언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6.15민족공동위원회를 강화하자는 말을 할 수가 있고 저 또한 그 방향의 입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거지로 북에 추종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실의 심각한 왜곡입니다.

 

제가 통일산악회나 통일교사모임 등 단체가 잘 꾸려지면, 장기적으로 6.15민족공동위원회 산하로 할 필요가 있다고 교육청 제출 자료 등에 문건으로 명시한 것은 북 선전에 동조한 것이 아니고 그 쪽 의도와 상관없이 주장한 내용입니다. 실제에 있어서도 6.15민족공동위원회 남측본부, 그것도 전북본부를 염두에 두고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저의 생활 영역이 전북이고 소속된 회원들도 모두 전북사람들이기에 쉽게 전북본부 산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은 6.15민족공동위원회 전북본부 상임대표인 이강실 목사와 누차에 걸쳐 상의한 내용입니다.

 

그래도 검찰 측에서 6.15민족공동위원회에 대해서 편협한 생각으로만 머물러 있다면 6.15민족공동위원회 남측본부 여러 관계자분들을 모셔와서 증인으로 세우겠습니다. 만약 정확히 이해가 되었다면 이 부분(p3 밑8줄 ~ p4 위2줄)도 공소장 모두 부분에서 제외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6. 이외에도 공소장 모두부분에서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는 경우 모두 삭제해 주시거나 아니면 구체적 공소항목으로 바꾸어 하나씩 진위여부를 가려야 합니다.

 

공소장에서 이하(p5 위9줄 ~ p12 위5줄) 모두 부분은 제가 경찰과 검찰에게 집중적으로 조사를 받았던 부분이었고, 영장실질심사나 구속적부심 때 구체적 범죄사실로 항목이 잡혀 있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소항목이 아니라 모두 부분이 싸잡아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바뀐 부분을 놓고 교묘하게 조작을 하고 있다거나 살짝 피해가려는 의도라고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지난번 검찰의 기소요지 발표에도 이 부분은 빠지고 공소항목 1번부터 제기한 사실이 있음을 볼 때 범죄사실을 다루지는 않되 범죄의 일부분으로 간주되며 저에게 불리한 채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까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는 바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공소사실로 전환해서 질의응답을 하도록 바랍니다.

 

싸잡아서 들어간 부분은 모두 12개 항목으로 그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통일과 반미 자주화에 대한 저의 인식부분(p5 위9줄 ~ 13줄) ②학생들을 의식화 조직화 했다는 부분(~p6 위8줄) ③인터넷 카페에서 활동을 했다는 부분(~ p7 위3줄) ④수업이나 시험 등으로 학생들을 친북반미 의식화 했다는 점(~ p7 위11줄) ⑤미국의 이라크 침략시 학생들이 반전버튼운동을 하게 했다는 점(~ p8 위2줄) ⑥북한 학생들에게 편지 쓰기를 하게 했다는 점(~ p8 밑3줄) ⑦학생들에게 6.15공동선언을 외우게 하고 한자시간에 조국통일, 민족공조를 가르쳤다는 점(~ p9 위6줄) ⑧학생회 표어로 등장한 국가보안법폐지와 미국반대 그리고 우리 민족끼리 이념을 전파시켰다는 부분(~ p9 밑5줄) ⑨일일이성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 p10 위2줄) ⑩통일산악회를 결성하고 활동한 사실(~ p10 밑5줄) ⑪고등학교 학생들의 통일화랑대 건설(~ p11 위2줄) ⑫교사들이 통일교사모임을 결성, 의식화 시켜 친북반미적 통일운동의 확산을 도모했다는 내용 등입니다.

 

쓰지 않았다면 몰라도 공소사실 모두 부분에 기재되었기 때문에 하나씩 진위를 가릴 수 있도록 이 부분을 공소항목에 넣어 낱낱의 사실을 질문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저는 이에 대한 자료나 개개의 항목마다 증인을 신청할 것인 바, 그냥 넘어가지 말고 하나씩 범죄 사실을 확인하는 검찰의 명확한 태도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부분이 범죄가 아니라면, 전체를 공소사실에서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7. 가상공간(Cyber Space)마저 국가보안법으로 막아나서려 하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가상공간은 컴퓨터의 디지털 부호인 ‘0’과 ‘1’의 체계로 구성된 시뮬레이션 세계입니다. 이 공간에서는 지역적 인종적 구별이나 나이, 성별, 지위고하를 뛰어넘어 서로 대등하고 자유로운 형태로 참여가 가능한 놀이 형식의 만남이 주를 이룬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간 인위적 경계가 허물어진 유목민 같이 자유로운 이 영역에서 낡은 냉전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어 제한하고자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합니다. 이미 광범위하게 자리를 잡은 이 가상공간은 무한한 발상과 창의력에 의해 끊임없이 확대되기는 하되, 비실제적 영역입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성인용 음란사이트처럼 바로 이 영역이 갖는 몇 가지 특성, 누구든 쉽게 접속이 가능하고, 정보를 이전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한 특성, 놀이적 특성들 때문입니다.

 

국가보안법이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고 처벌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악법이라고 할지라도, 그 목적 판단의 주체가 임의적이어서 인간의 최소 기본권인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짓밟는 반인권적 악법이라 할지라도 그 적용에서 판단의 근거들은 객관적 실제에서 확보되어야 절차적 형식알도 충족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실제적 영역, 컴퓨터 카페 등 가상의 세계에서 그 증거를 찾아 국가보안법 위반의 객과 자료로 삼겠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교육자인 저야 현실세계에서는 시공제한으로 불가능했던 영역에 새로운 맥락적 수업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장치를 생성하기도 해야 하는데, 학생들이 스스로 현실의 절망과 좌절들을 인터넷을 통해 문제해결을 하려했고, 또 이곳에서 학생들은 창의력을 보이며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를 매개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을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질 높은 발전 수준을 보이고 있는데야, 교사로서 이런 조건을 방치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카페라는 공간에서 단지 교육적 관찰과 지나치지 않도록 자제시키는 등 배려만을 해왔습니다. 물론 대화의 참여자 역할도 해왔습니다. 학생들에게 카페는 자유로운 놀이 공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토해지는 학생들의 글은 쉽게 생겼다가 꺼지기도 하는 즉자적인 글이 있는가 하면 어른들에게도 성찰의 기회를 주는 글도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학부모들도 참가해서 함께 만들어 가는 이런 사이버공간에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며 먹이를 낚고 있었다면, 그것 또 분단시대 못난 어른들의 자화상입니다.

 

이상으로 저의 과거 편린과 공소장 모두부분에 은폐되어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외에도 본 공소장은 억지로 맞추다 보니 해성해져서 다대한 문제점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런 문제는 즉각 제기를 하겠습니다.

 

지난 1차 공판은 관련 자료가 16,000쪽이나 되어 검찰 측에서 변호인 측에게 다 제출하지도 못한 상태여서 빨리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자료의 방대함을 보면서 저는 ‘죄가 없으니까 숨 쉬는 것 까지 혐의를 잡으려고 그렇게 많은 것 같다’며 면회 온 지인에게 씁쓸히 웃은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는 자료만 보아도 질리겠지만, 그 내용들은 별거 아닙니다. 그 대부분은 쉽게 사이트에서 취득한 것이나 제 생각을 어떤 목적성으로 판단하고 단죄하기 위하여 북의 자료를 그대로 카피해서 제출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제 하나씩 밝히다보면 검찰이 이번 사건에서 얼마나 무리수를 두고 있는지 쉽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대로 필요하다면 차곡차곡 반미의 문제, 장기수를 보는 관점, 국가보안법의 문제 등 하나씩 집중적으로 저의 입장과 진실을 밝혀 드리겠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비록 이렇게 억측과 무리로 제가 구속된 상태에서 시작한 재판이지만, 6.15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통일의 역사적 성과물들, 즉 분단 역사 속에서 피 흘리며 하나씩 성취되어온 통일 노력들과 민족의 내일 겨레의 운명 문제가 이 재판에서도 치열하게 걸려 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고, 본건의 국가보안법 위반 여부를 공정한 눈으로 냉정하게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부디 이번 재판이 지금까지 갖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한생을 정의의 길로만 올곧게 살아온 저에게 무슨 사상가로 몰아세우는 억지가 통하지 않게 하시고, 또 저 하나 희생시키기위해 어린 학생들의 작은 눈물꽃 같은 활동마저 빨갛게 색을 칠해버린 어처구니 없는 반공 메카시즘의 현실을 바로잡는데 중대한 기여를 할수 있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3월 28일

상기진술자:피고인 김형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필통(http://blog.hani.co.kr/chongani/)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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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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