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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사로 들어가는  전나무길. 길 왼쪽 빨갛게 보이는 건물이 의병승장비(충남 문화재자료  제23호)가 있는 의선각이다.
 보석사로 들어가는 전나무길. 길 왼쪽 빨갛게 보이는 건물이 의병승장비(충남 문화재자료 제23호)가 있는 의선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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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걸 싫어한다

충남 금산은 1963년 이전에는 전라북도에 속했던 곳이다. 지금도 풍물 가락은 전라좌도 농악을 친다. 이중환은 <택리지> 팔도총론 편에서 금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간에 조계·진락 두 산이 있으며, 또 큰 내가 많아 물대기가 쉬워 전답이 제법 기름지다. 게다가 수석(水石)의 훌륭한 경치가 있어 10개 고을 중 가장 살만한 곳이다."

그러니 금산이 어찌 인삼의 고장뿐이겠는가. 진악산(732m) 자락엔 이 땅 민중의 비원을 들어주며 천 년 세월을 내려온 고찰 보석사가 있다. 통일신라시대 조구(祖丘)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절이다. 속으로 짚어보니, 거의 8, 9년 만에 금산을 찾는 것 같다.

그러나 차창 밖으로 보이는 읍내 풍경은 예나 크게 다르지 않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린다. 보석사까지 걸어갈 예정이다. 시오릿길이 넘는 길이다. 길은 평지가 아니라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한다. 한 시간 반이나 걸어왔을까. 마침내 보석사 입구, 석동리 마을에 닿는다.

마을이 끝나는 곳엔 단청도 칠하지 않은 무채색의 일주문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자 쭉 뻗은 전나무 길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오대산 월정사나  능가산 내소사 입구에 펼쳐진 전나무 숲보다 길이 좁아서인지 훨씬 아늑하게 느껴지는 길이다. 시원한 눈맛과 더불어 향긋한 솔잎 냄새까지 풍기는 길이 얼마나 상쾌한지 모르겠다.

조금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임진왜란 때 승병장이 되어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영규대사의 충혼을 기리고자 세운 의병승장(義兵僧將) 비각이 나타난다. 숙종 5년(1839) 5월 금산군수 조취영이 세운 비로 영규대사의 생애와 활동상이 적혀 있다.1940년, 일제가 비각을 부수고 비를 땅에 묻어버린 것을, 해방 후에 찾아서 다시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세상의 모든 길은 나그네가 자신에게 익숙해지는 걸 싫어한다. 내게 정들지 마라. 그것은 네 의식의 무덤이란다. 나는 이쯤에서 그만 너와 동행을 접겠다. 이제까지 다정히 함께 걸어오던 전나무 길이 황급히 사라지더니, 눈앞에 홀연히 천 년 고찰 보석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당나라 유학파 조구대사가 창건한 절 보석사

보석사 경내에 버티고 선 범종루.
 보석사 경내에 버티고 선 범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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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루에 걸려 있는 '보석사' 현판.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범종루에 걸려 있는 '보석사' 현판. 해강 김규진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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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가면 커다란 2층 누각이 길손을 맞는다. 단청을 칠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보아 근래에 지은 건물 같다. 누각 2층 처마 아래 걸린 '보석사'라는 현판 글씨는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서체다. 근대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1868~1933)의 글씨가 분명하다. 새집에 구닥다리 현판이라, 마치 구두 신고 헌 망건 쓴 것 같은 느낌이 드누나.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1년(885) 조구대사(祖丘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이능화가 쓴 <조선불교통사>에 따르면 조구대사는 전남 담양 사람으로 원각, 원순 스님과 중국유학을 떠나 중국 종남산의 지공화상에게 수학한 후 귀국해서 이곳에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조구대사는 보석사뿐 아니라 금산 지방 사찰 건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처음 세울 당시 절 앞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 했다 한다. 임진왜란(1592) 때 불타버린 것을 조선 고종 때 다시 세웠는데, 명성왕후의 원당 사찰이었다는 얘기도 전한다.

누하를 통과한 후 돌계단을 밟고 오르니 곧바로 절 마당이다. 맞바라기에 등운선원이라는 현판을 단 선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건물이다. 통상적으로 보면 2층 누각 아래를 통과한 후 가장 먼저 맞게 되는 전각은 대웅전이다. 그런데 왜 이곳에선 대웅전 우측으로 한참 비켜선 곳에다 이렇게 출입문을 겸한 누각을 세운 것일까.

절 마당에 서서, 다시 누각을 바라보니 '범종루'란 현판이 걸려 있다. 누각 중앙엔 꽤 큰 범종이 걸려 있다. 이곳 골짜기가 좁아서 종을 치면 메아리가 아주 크고 오래갈 것 같다.

영규대사가 머물었다는 의선각(충남 문화재자료 제29호).
 영규대사가 머물었다는 의선각(충남 문화재자료 제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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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운선원 맞은 편엔 의선각이 있다. 이곳은 영규대사가 머물던 전각이라고 한다. 의선각은 본래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한 칸 크기의 전각이다. 언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옆으로 3칸 정도를 더 달아내 지금은 'ㄴ' 자형 건물이 돼 있다.

공주 계룡면 출신인 영규대사(?∼1592)는 계룡산 갑사와 보석사를 내왕하면서 수도생활을 했던 스님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집하여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으나 이어 벌어진 금산전투에서 순절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승병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사명대사에 버금갈만한 승려라 할 만하다.

현재 의선각은 종무소로 쓰고 있다. 사람의 손때를 타긴 했으나 아직도 고졸한 맛을 잃지 않았다. 특히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영규대사의 영정을 보신 기허당과 대웅전(충남유형문화재 제143호).
 영규대사의 영정을 보신 기허당과 대웅전(충남유형문화재 제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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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시를 연상시키는 대웅전 벽화.
 한산시를 연상시키는 대웅전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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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선각 측면을 돌아들면 곧바로 대웅전 등이 있는 법당 영역이다. 보석사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문수보살을 모셨다. 목조 석가여래좌상은 결가부좌를 한 채 항마촉지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조각 수법이 매우 섬세하며 표정이 자비롭다. 대웅전 외벽에는 군데군데 벽화가 그려져 있다. 마치 한산시 한 수를 형상한 듯한 평화로운 풍경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그윽하게 한다.

대웅전 좌측에 있는 건물은 기허당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인 기허당 안에는 영규대사의 진영이 봉안돼 있다. 대사는 후덕하게 생긴 얼굴에 약간 웃음을 띤 모습이다.

영정 아래엔 허주당 덕진, 응허당 포문, 덕암당 영휘, 기허당 무경 대선사, 보봉 대선사, 순화 대선사, 대응당 대선사, 등운당 대선사, 진속쌍융 보명거사 유천혁 등 보석사에서 수도 정진했던 열 분 선사들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영역을 바꾸거나 동선을 변경하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범종루 쪽에서 바라본 승방(좌)과 옛 천왕문(중앙).
 범종루 쪽에서 바라본 승방(좌)과 옛 천왕문(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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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본 승방과 옛 천왕문.
 대웅전 마당에서 바라본 승방과 옛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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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기단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비로소 아까 지나온 누각의 비밀이 드러난다. 대웅전 정면 마당에는 끝에 서 있는 작은 맞배지붕 건물. 그곳이 바로 원래 보석사의 출입문이 있었던 곳이었던 것이다. 아래로 내려가서 구석구석 살펴본다.

이 맞배지붕 건물은 구조로 보아 천왕문 건물이 틀림없었다. 이 건물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면 바로 정면에 대웅전이 바라다보이게 돼 있었던 것이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한참 떨어진 곳에 새로 범종루를 지으면서 이 출입문을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범종루를 이곳에다 짓지 않고 멀찌감치 자리를 옮긴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천왕문 뒤에 자리 잡은 승방을 외부와 철저히 차단하기 위한 조처가 아닌가 싶다.

절의 영역을 바꾸거나 함부로 동선을 변경하는 일은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절의 전체적인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다른 절집에 비해 손댄 곳이 적어 소박한 전각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보석사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 있다면 바로 이 대목이다, 굳이 범종루 쪽으로 출입문을 옮기지 않았다면 한결 짜임새 있고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보석사 앞 천연기념물 제365호 은행나무.
 보석사 앞 천연기념물 제365호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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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에 서서 개울 건너편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보석사 은행나무를 바라본다. 보석사 창건할 무렵 조구대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다.

높이가 무려 50m에 가깝고 나이도 1000년이 넘었을 거라고 한다. 그렇게 오래되다 보니, 위로 뻗었던 가지가 다시 땅으로 뻗었고, 그곳에서 다시 가지가 자라 오르고 있다.

이 은행나무에 정성을 다해 빌면 아이를 얻는다고 하며, 머리 둔한 아이를 밤중에 나무 아래 한 시간 정도 세워두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재미있는 속설이 있다.

왜 머리가 좋아지지 않겠는가. 아이를 밤중에 저런 곳에 세워 놓으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한밤중에 저곳에 홀로 서 있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릴 게 틀림없다. 내가 보기엔 아동잔혹사가 분명하건만 사람들은 이것마저 나무의 영험함으로 받아들이나 보다.

이 은행나무는 또 마을에 변고가 있거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에는 소리 내 운다고 한다. 마을의 수호신 노릇은 좋다만, 우리나라엔 왜 이리 민방위용(?) 나무가 많을까. 외세의 침입이 유달리 많은 약소국가는 전설조차 이렇게 비애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것인가.

가을에 은행나무 잎이 무성할 때 와서 보면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수형으로만 보면 영국사 은행나무보다 약간 못 생긴 것 같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으면서 살아온 나의 삶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산신각.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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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에서 바라본 보석사 전경.
 산신각에서 바라본 보석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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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허당 왼쪽으로 난 나무 계단을 오르면 보석사에서 가장 높은 전각인 산신각에 이른다.  산신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산신각 안에는 소나무 아래 두 마리의 호랑이를 거느린 산신이 앉아 있는 산신탱화가 걸려 있다.

이곳에선 보석사의 전각들이 고스란히 내려다보인다. 들어오는 길에 줄지어 선 전나무들도 그렇고 크지 않은 전각들도 그렇고 보석사는 촌색시처럼 소박하면서 아름다운 절집이다. 꽤 먼 길을 걸어 와서 그런지 피곤하다. 잠시 잔디에 앉아 숨을 고르면서 며칠 전에 산 신경림 시인의 시집 속에 든 '나의 신발은'이란 시를 생각한다.

늘 떠나면서 살았다,
집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면서,

늘 잊으면서 살았다 싸리꽃 하얀 언덕을 잊고
느티나무에 소복하던 별들을 잊으면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
낯선 것에 신명을 내고
처음 보는 것에 힘을 얻으면서,

나의 신발은

어느 때부턴가는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떠난 것을 그리워하고 잊은 것을 그리워하면서
마침내 되찾아 나서면서 살았다.
두엄더미 퀴퀴한 냄새를 되찾아 나서면서

- 신경림 시 ' 나의 신발은' 일부

시인처럼 나 역시 늘 무언가를 찾으면서 살았다. 그래서 "늘 찾으면서 살았다"라는 말 속엔 사서 고생했다는 뜻이 들어 있다는 걸 이심전심으로 안다. 자극이 없는 편한 길에는 아무런 깨달음도 찾아오지 않는다. 흙냄새를 맡으면서 걸어야만 국토에 대한 깨달음, 그 국토에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저절로 가슴에 와 콕 박히는 것이다. 조금은 피곤할지라도. 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그 순간까지 느긋한 소통을 즐길 것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 내 나름의 보폭으로 생을 걸어간다는 것. 내가 뛰거나 걷거나 상관 없이 시간은 일정한 걸음으로 걸어갈 뿐인 것을. 산신각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이 불어오는 바람에 뎅그렁, 소리를 내며 운다. 이것은 또 무슨 뜨거운 공명인가. 이제 또다시 길을 떠날 시간이다. 땅바닥에 잠들어 있는 길들도 새로이 움트는 봄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일 다녀왔습니다.



태그:#충남 금산 , #진악산 , #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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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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