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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엊저녁 어느 모임자리에 나아가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가 어느 만큼 되고 밥을 먹는 자리. 골치 아픈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답답하기도 하여 술 한 병을 꺼내어 밥과 곁들여 마시려고 합니다. 이때, 옆에 앉은 분이 “회의중에는 술 마시지 마세요!” 하고 한소리 합니다. ‘회의? 지금은 회의가 아닌 밥 먹는 때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지만, 말로는 꺼내지 않습니다. 그 뒤로 내내 입을 다뭅니다. 제 생각대로, 밥 먹는 동안 ‘모임자리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오지 않고, 밥을 다 먹고 나서도 모임자리 이야기는 두 마디도 없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 두 시간 가까이 다른 이야기를 하느라 모두들 불꽃이 튑니다.

뒤로 물러나 앉습니다. 멀거니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가 딴 짓을 하기로 합니다. 괜한 말다툼에는 끼어들고 싶지 않고, 자리에 없는 사람 뒷이야기를 주고받는 마당에 끼고 싶지 않습니다. 종이를 꺼내어 제가 사는 집 둘레 길을 그려 봅니다. 우리 집 둘레에 어떤 골목길이 있고, 어떤 구멍가게가 있고, 어떤 밥집이 있고, 어떤 놀이자리가 있고, 어떤 볼거리가 있는지를 점으로 콕콕 찍으면서 그립니다. 처음에는 무슨 길그림이 될까 싶었으나, 조금씩 그리는 동안 ‘동네 길그림’이 넓어지고, 인천시나 인천 동구청에서 만든 ‘문화지도’와는 사뭇 다르면서, 여태껏 어느 누구도 그리지 않은 우리 동네 ‘골목길 그림판’이 만들어집니다.

동네 미술관에서 한동안 전시하고 있던 로봇 모형이, 골목길 한쪽에 덩그러니 놓입니다. 로봇 모형 만드신 분이 이 모형을 이곳에 그대로 둘 생각인 듯하군요. 오며가며 재미난 볼거리가 되어 줍니다.
▲ 길에 선 로봇 동네 미술관에서 한동안 전시하고 있던 로봇 모형이, 골목길 한쪽에 덩그러니 놓입니다. 로봇 모형 만드신 분이 이 모형을 이곳에 그대로 둘 생각인 듯하군요. 오며가며 재미난 볼거리가 되어 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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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자리가 마무리됩니다. 그예 오늘 하루도 알뜰한 생각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미리 어떤 틀을 마련해 놓고, 이 틀에 맞추도록 생각을 뽑아내려고 한다면, 자유로운 생각은 어디로든 뻗어나가지 못합니다. 들새나 멧새를 쇠우리에 가두어 놓고서 삣쫑삣쫑 아름다이 노래를 부르라고 한다면, 어느 들새와 멧새가 즐거이 노래를 부를까요. 쇠우리에 가두어 놓고 맛난 먹이를 갖다 바친다고 하여 들새와 멧새가 신나게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어두운 골목을 걷습니다. 어디로 갈지 생각하지 않으면서 걷습니다. 동네 막걸리집을 옆을 스치고, 동네 문화공방 옆을 지납니다. 세무서 옆을 지나고 옛 선교사 별장 옆을 지납니다. ‘황금’이라는 이름이 붙은 구멍가게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야트막한 언덕마루에 깃든 고등학교 앞에 서 봅니다. 저 멀리 새로 올려세우는 아파트가 보이는 모습을 한 장 담습니다. 일찌감치 문을 닫은 구멍가게 옆을 지나가다가, 고 앞으로 7미터 거리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가 봅니다. 맥주 한 병과 마실거리 한 통을 삽니다.

슬금슬금 걸어서 동사무소 앞을 지납니다. 조용합니다. 순찰을 도는 의무경찰 둘을 봅니다. 나다니는 차도 없고 거니는 사람도 없습니다. 골목집은 모두들 1층짜리 집. 이곳은 재개발 대상지역이라 오래지 않아 죄다 헐리고 아파트로 바뀔 지 모릅니다. 지금 이대로 조용하고 한갓진 골목집으로 두는 일이 어떻게 얄궂거나 나쁘다고 느끼기에 여기까지 삽날을 들이대려고 하는지. 지금은 한 평에 백만 원이 조금 넘지만, 이 땅에 아파트를 40층이나 50층으로 올려세우면 한 평에 천만 원도 받고 이천만 원도 받을 수 있어서 땅장사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할매 구멍가게 옆을 지납니다. 할매가 가게 문을 닫을 참입니다. 꾸벅 인사를 합니다. 버스도 지나가지 않는 골목길을 조금 더 걷다가 집으로 돌아옵니다. 발을 씻고 빨래를 석 점 합니다. 봄이지만 아직 물이 찹니다. 손가락이 얼어붙습니다. 가랑이 사이에, 또 엉덩이 밑에 손을 넣고 녹입니다.

밤 골목길을 하느작하느작 걷다가는 사진 한 장 찍곤 합니다. 지나쳐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골목길이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대문이며 담벽이며 창문과 창살이며, 집앞 꽃그릇이며 지붕이며 빨랫줄이며... 하나하나 물끄러미 살펴보면, 골목사람으로 온삶을 지내신 분들 손끝과 손때를 느낄 수 있어서 싱긋 웃음이 나옵니다. 책에서도 배우지만, 책 바깥에서도 배우는 골목길 나들이라고 느낍니다.
▲ 밤 골목길 밤 골목길을 하느작하느작 걷다가는 사진 한 장 찍곤 합니다. 지나쳐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골목길이지만, 발걸음을 멈추고, 대문이며 담벽이며 창문과 창살이며, 집앞 꽃그릇이며 지붕이며 빨랫줄이며... 하나하나 물끄러미 살펴보면, 골목사람으로 온삶을 지내신 분들 손끝과 손때를 느낄 수 있어서 싱긋 웃음이 나옵니다. 책에서도 배우지만, 책 바깥에서도 배우는 골목길 나들이라고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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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으로 <탐정 몽크>라고 하는 연속극을 봅니다. 연속극을 보면서 오늘저녁 일을 돌이켜봅니다. 아까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괜히 말을 꺼내 보았자 거두어들일 건덕지는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덧붙여, 내가 그분들 나이가 되었을 때, 지금 내 나이쯤 될 후배한테 어떻게 마주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이 따져 봅니다. 지금 제가 만나는 후배들 앞에서 보여주는 매무새는, 제가 그 후배들 나이였을 때 ‘지금 제 나이쯤 되는 선배가 저한테 보여준 모습’이 더없이 싫었기에 그런 모습을 나는 떨쳐내거나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면서 몸에 익힌 매무새입니다.

손윗사람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나한테 어떻게 다가오는가를. 이분들이 나한테 다가오는 모습 가운데 어떤 매무새가 나로서도 반갑고 고마운가를 헤아립니다. 이분들 매무새 가운데 어떤 모습이 영 딱해 보이거나 안쓰럽거나 못마땅한가를 돌아봅니다. 책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매무새와 책을 아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매무새를 견주어 봅니다. 헌책방을 모르는 사람들 매무새와 헌책방을 아는 사람들 매무새를 대어 봅니다. 돈이 넉넉한 분들 매무새와 돈에 쪼들리는 분들 매무새를 맞대어 봅니다. 사회에 이름값 높은 분들 매무새와 여느 가난한 서민들 매무새를 함께 놓고 봅니다. 슬그머니 웃음이 나옵니다. 1600들이 병맥주는 금세 바닥이 납니다. 아쉽지만, 없는 벌이에는 하루나 이틀에 딱 한 병이 알맞습니다. 눈이 스르르 감깁니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책+헌책방+우리말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태그:#책이 있는 삶, #골목길,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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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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