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은 항상 누군가 한 사람을 자기들의 선두에 세워 그를 육성하고 크게 성장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
17대 총선에 이어 18대 총선에도 많은 장애인들이 비례대표로, 지역구 대표로 국회로 진출했다. 17대에서는 심재철(한나라당·안양동안을)·이상민(당시 열린우리당 대전유성)·장향숙(열린우리당 비례대표)·정화원(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 등 4명뿐이었는데 이번에는 2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 당선자는 한나라당 윤석용(서울강동을)·심재철(안양동안을) 후보, 자유선진당 이상민(대전유성) 후보이며, 비례대표 당선자는 한나라당 임두성·이정선 후보, 통합민주당 박은수 후보, 민주노동당 곽정숙 후보, 친박연대 정하균 후보 등 4명이다. 진보신당 박영희 후보는 비례대표 의석이 주어지는 3%를 넘지 못해 고배를 마셨다.
이외에도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상징성 측면에서 비례대표 후보들을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헬기조종사였던 피우진 중령(진보신당 비례대표 3번·낙선), 한센인 당사자로 인권보장과 복지 향상을 위해 일해온 임두성(한나라당 비례2번)씨 정도가 주목할 만하다. 임두성씨는 국내 최초의 한센인 국회의원이 됐다.
장애인 의원 늘었긴 한데... 정치세력화 맞나그러나 2배로 늘어난 머릿수가 사회적·정치적 소수자들이 늘 주장하는 '정치세력화'의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정치를 하려는 장애인의 수'가 늘어났을 뿐이다.
(심재철·이상민 의원은 '장애인'이기 이전에 '정치인'으로 인지도를 획득했으며, 간간히 장애인 관련 행사에 참석하여 '공감대'를 표시했을 뿐이어서 '장애인 정치세력화'에 대한 논의에서는 제외한다.)
장애인 정치세력화를 '장애인 문제를 정치를 통해 풀어나갈 수 있는 자생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서울 강동을에 출마했던 윤석용 한나라당 중앙장애인위원장만이 유일하게 눈에 띄는 사람이다.
윤 후보는 지난 17대에도 서울 강동을에 출마했다가 1000여 표 차이로 낙선했지만 이번에는 54.5%의 표를 얻어 39.4%에 그친 통합민주당 심재권 후보를 가볍게 눌렀다. 그는 보수 정당 안에서 장애인 중앙조직을 운영했고, 공식적 공천을 통해 후보가 되었으며, 결국 지역구에서 당선이 된 것이다.
진보신당은 장애여성을 공동대표로 내세웠고, 민주노동당은 장애인위원회를 갖추고 있었지만, 결국 지역구 의원을 원내 진출시키지는 못했다.
장애인 지역구 의원은 한나라당에서... 왜?장애인 비례대표 의원들이 늘어난 17대 국회는 장애인 정치세력화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사회적 소수자의 국회 입성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17대 초기까지만 해도, 이들의 원내 진출은 독자적인 세력과 정치력이 아니라 일방적인 하향식 공천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국회 새내기 의원들은 원내 경험의 부족과 전문성의 결여를 시급하게 보완해야만 했고, 오랫동안 실전경험을 쌓아온 보좌관 및 비서관에게 의정활동을 의존했다.
국회의원은 많은 보좌관·수행비서를 통해 법을 만들고 기관들을 감시하는 활동을 하는데 이렇게 초기부터 기존 시스템에 의존하는 것은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상당히 위축시킨다.
결과적으로 17대 국회에서도 장애인 의원들의 활동을 비장애인 보좌진들이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국 독자적인 정체세력화의 실패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들은 당내에서 기반을 만들지 못했고 발언권도 크지 않았다.
이를 놓고 "정치적 기반이 약한 소수자나 직능을 대표하는 비례대표들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17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국회로 진출한 장애인계는 분명 상황이 다르다.
이미 13대에 사상 첫 장애인 국회의원(이철용 평민당 의원)이 나왔고, 이성재 국민회의 의원이 본격적으로 장애인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장애인 의원들은 왜 장애인 보좌진을 고용하지 않나역사적으로 진보진영에서 꾸준히 장애인 후보와 국회위원을 배출해왔지만, 본격적인 지역구 의원의 등장은 18대에 들어서서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이루어졌다. 세계 정치사적으로 볼 때, 오히려 보수정당이나 정권이 반대 급부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치적 인프라를 구축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17대에 괄목할만한 숫자가 장애인 비례대표로 진출했지만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을 제외하고는 지역구 의원 배출을 하지 못 한 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장기간 훈련을 통해 숙련된 장애인 정치인을 길러내는 국회진출 시스템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국회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아온 장애인 보좌관·비서, 국회에서 인턴생활을 하는 장애인을 본 적이 있는가? 17대에 진출한 장애인 의원들은 단 한 명이라도 중증 장애인을 보좌관으로 임명하거나 시청각 감각장애인을 비서관으로 고용한 적이 있었던가? 하물며 시의원이나 정당인으로 꾸준히 정치 활동을 하고 장애인은 몇이나 되었던가?
사실 이 분야에서도 한나라당의 이정선 당선자(비례대표 5번)가 눈길을 끈다. 장애인 방송인으로 널리 알려진 이 당선자는 지난 2002년 제6대 서울시의원에 비례대표로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한나라당 최초의 장애여성 국회의원이 됐다.
'장애인들의 정치세력화'는 얼마나 건강하고 준비된 장애인 정치 신인들을 길러 내느냐와 당내에서 결정권을 가지는 당무위원·중앙위원·대의원에 장애인이 얼마나 진출하느냐도 아주 중요하다.
또한 국회에서도 늘상 배정되는 보건복지위원회·교육위원회가 아니라 법사위 등에도 진출할 수 있어야 한다.
투표소 가기 힘든 장애인들... 배지만이 세력화는 아니다
한편으로 진정한 장애인들의 정치세력화는 단순히 얼마나 많은 수의 장애인 국회의원을 배출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이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국회의원 배지를 가슴에 다는 것은 수많은 정치참여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다.
여전히 투표소의 편의시설도 없어서 기본적인 투표권도 행사하지 못하고 시청각 감각장애인이나 정신지체 장애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자료나 시스템도 부족하다.
또한 이미 진출한 장애인의원들이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법을 많이 발의하기도 하지만 장애인의원의 계층과 이들이 대변하는 장애인의 목소리도 다양해진 만큼. 그들을 감시·견제하는 눈과 귀도 당연히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인단체와 시민단체들도 이들을 위한 눈과 귀를 더욱 날카롭게 해야 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