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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또다시 낯빛을 바꿨다. 집권 여당이 의회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민의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오발탄'을 쏘아 올렸다.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빼고 총선을 치른 한나라당의 과반수 의석 확보가 확실시되던 4월9일 저녁, <서울신문>은 '단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청와대발 기사를 인터넷에 올렸다. 그 기사의 머리는 다음과 같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9일 '한반도 대운하 논의를 이끌 위원회를 이달 중 대통령 직속 기구로 설치하기로 내부 논의를 끝냈다'고 전하고 '대통령 직속기구로 하되 청와대 밖에 독립적인 형태의 위원회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브레이크 없는 질주 시작됐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대운하특위 위원장은 총리급 또는 부총리급으로 하고, 국토해양부·환경부·문화체육관광부 등 관련부처와 민간연구소 전문가, 교수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주 구체적 구상이다. '불도저 운하' 조직과 위상까지도 확정됐다. 누가 보아도 운하 추진은 사실로 굳어졌다. 이로써 총선 투표용지의 인주가 마르기도 전인데 '국민여론 수렴'에 대한 공언은 사실상 물 건너 갔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만 하겠다는 뜻이다.

 

이 관계자는 "일단 특위를 구성한 뒤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 국회에서 대운하건설특별법을 제정하고 특위를 한반도대운하 건설청으로 승격하게 될 것"이라면서 "여론수렴과 입법작업 등 관련 절차를 신속히 추진한다면 당초 목표한 2009년 2월 대운하 착공도 가능할 전망"이라고 말했다고 <서울>은 전했다.

 

이쯤 되면 정치적 수사도 거의 '사기' 수준이다. 삽질할 날짜까지 정해놓고 무슨 여론을 수렴하겠다는 것인가. 잠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시계바늘을 총선 전으로 되돌려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운하 문제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할 수는 없다. 정부의 예산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할 여건이 안 된다. 이는 100% 민자사업이다…(중략)…민간사업이기 때문에 정부는 스케줄이 없다. 정부 자체 스케줄은 전혀 없다. 원칙적으로 국민적 납득, 합의를 매우 중요시한다. 청계천을 할 때도 4000번을 만나 설득했다. 앞으로도 민자사업으로서 충분하게 검토하면서 해 나간다는 것으로 이해해 달라."

 

 

삽질 날짜 정해놓고 여론수렴?

 

이 대통령의 말과 이번에 보도된 청와대 관계자의 말과 비교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대통령 직속기구까지 띄우면서 '혈세 한 푼 들이지 않겠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또 정부가 자체 스케줄을 버젓이 내놓은 상태인데, 이 대통령이 밝힌 '스케줄이 없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여론수렴'은 단골 메뉴처럼 등장시키지만 그야말로 스케줄이 없는 것은 운하에 대한 검증과 여론수렴의 절차와 방식이다. 청계천 사업 때 4000번을 만나 설득한 것이 사실이라면 운하 반대론자들과는 어떤 방식으로 만나서 대화할 것인지 '스케줄'을 내놔야 할 것 아닌가.

 

이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최근 국토해양부는 지난달 27일 한반도 대운하의 추진 전략과 계획이 적혀 있는 내부 문건이 폭로됐을 때 "실무자가 한반도 대운하 사업 관련 민간제안에 대비해 준비 차원에서 검토된 자료의 하나"라면서 "확정된 정부의 정책은 아니다"라고 부인한 바 있다.

 

30일 청와대의 한 관계자도 "여론 수렴을 하다보면 대운하의 장단점이 나올 것"이라며 "국민 뜻을 충분히 수렴하고 존중해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자마자 청와대 쪽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거의 막가파 수준이다. 국민을 장기판의 '졸'로 보는 게 아니라 아예 안중에 두지도 않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브레이크 없는 오만한 권력이 완성됐다는 것이다.    

 

수상한 사찰기관의 동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한나라당은 대운하를 공약에서 뺀 채 이번 총선을 치렀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대운하에 대해서는 오해를 빚거나 불완전한 부분을 잘 다듬어 국민을 설득하는 게 더 중요하지, 보완도 안 된 것을 공약에 덜렁 넣어 괜스레 이슈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강재섭 대표는 한발 더 나아가 "운하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서 이런 태도를 '꼼수정치'로 규정하고 비난했지만, 한나라당은 "정략적 공격"이라고 일축했다. 청와대도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지금까지 청와대와 정부가 보여준 태도를 보면, 한나라당의 입장도 언제 바뀔지 모를 일이다.

 

이번 선거에서 이재오-박승환-윤건영 의원 등 소위 '운하 3총사'가 낙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처럼 하루아침에 낯빛을 바꾸고 '총선 민심=대운하 동의'라고 우길지도 모를 일이다.

 

사찰기관의 동태도 수상하다. 총선 직전 국정원과 경찰은 '한반도대운하를 반대하는 전국교수모임' 소속 교수들을 상대로 성향파악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두 사찰기관은 "통상적인 정보수집활동", "친분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 차 물은 것"이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사찰을 당한 교수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고 한다. 이젠 오만한 권력이 드러내놓고 '5공의 정치사찰' 망령을 불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왜 이리 비겁한가

 

사실 이번에 청와대의 한 관계자가 일간지에 흘린 멘트는 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것과 다를 바 없다.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에서 과반수 이상의 의석을 확보했지만, 총선 직전에 했던 여론조사에 나타난 민심은 반대 63.9%, 찬성 20.9%(<문화일보> 여론조사)였다. 이를 정면으로 거스르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 익명의 관계자에게 감히 말하건대, 비굴하게 얼굴을 가리지 마라. 국토를 개조하고, 국민을 4만불 시대로 진입시키는 자랑스러운 계획을, 그런 식으로 뒷구멍에서 발표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대대적인 '관제홍보' 방안이 아니라 국민 여론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도 내놔야 한다.

 

마지막으로, 내년 2월에 삽을 뜨겠다는 경부운하는 단군 이래의 최대 역사이다.

 

한강과 낙동강 연결구간을 터널로 뚫을 것인지, 아니면 산 위에 배를 띄울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이라도 내놔라.

 

폭죽 터지는 화려한 조감도만 보여주면서 국민을 현혹할 게 아니라 5000톤급의 배가 다니려면 다리 몇 개를 부셔야 하고, 강바닥을 몇 m 팔 것인지에 대한 설계도면을 보여달라.

 

또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불도저를 동원해 3200만명의 식수원인 한강과 낙동강의 바닥을 4년 동안 판다면, 그 기간에 국민들은 무슨 물을 먹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내놔라. 그래야만 국민도 의견을 내놓을 게 아닌가. 

 

천하의 권력을 가진 자들이 왜 이리 비겁한가.


태그:#경부운하, #이명박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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