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떠날까?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봄비라 맞아도 괜찮을 정도로 부슬부슬 내린다. 전날 애들과 기차 타고 곡성에 가자고 했는데, 바람도 많이 분다.
"그냥 차 타고 갈까?""기차 타고 가요." 애들은 막무가내로 기차를 타고 가야 한다고 한다. 기타를 탄 지도 오래다. 과자 몇 봉지 사고, 기차 안에서 읽을 책 한 권을 챙기고 여천역으로 향했다. 역에는 서울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풍경이다.
기차는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맞으며 미끄러져 올라간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즐긴다. 차를 운전하면 느끼지 못하는 즐거움이다. 높은 철로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순천을 지나고, 구례구(求禮口)를 지나간다. 큰애가 왜 이름이 구례구냐고 묻는다.
"이름을 잘 봐봐. 입구 자를 쓰잖아. 여기는 행정구역이 순천인데, 구례를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으로 구례구라는 이름이 붙여졌지 않을까?"
산빛이 변해가는 섬진강변을 따라가는 기차는 여천역을 출발한 지 1시간 10분 정도 지나 곡성역에 도착했다. 곡성역은 성곽 형태로 새로 지은 멋있는 역이다. 곡성역의 유래를 알려주는 표지석에는 곡성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설명해 놓았다.
곡성역에 내려서 도림사로
백제시대(百濟時代)에는 욕천군(浴川郡) 혹은 욕내군(欲乃郡)으로 불리다 지세(地勢)에 따라 산맥과 하천의 흐름을 본떠서 곡성(曲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와서 시골장을 떠돌아다니는 장꾼들이 교통이 불편하여 통행에 어려움을 느낀 나머지 곡성(哭城)이라 한때 불렀고 그 후 곡성(穀城)으로 되었으나, 국가에서 지명만을 생각하고 조세를 부과한다는 주민여론에 따라 이를 곡성(谷城)으로 개칭,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쓰여 있다.
이름의 유래만큼 곡성은 넓은 들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섬진강이 산을 따라 흐르다 넓은 들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바로 도림사로 향했다. 동악산을 올라가려고 했는데 비가 내려 계획을 바꿨다. 청류동 계곡을 따라 도림사까지 갔다 오기로 했다.
큰길에서 바로 들어서니 벚꽃이 한창이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벚꽃이 가지마다 한가득이다. 검은 도로에 노란 개나리와 대비되면서 더욱 환하게 보인다. 언제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팔을 감아도 감싸지 못할 만큼 큰 고목도 있다.
청류동 계곡을 따라매표소를 지나고 조각품을 설치해 놓은 상가 맞은편으로 계곡이 이어지고 있다. 청류동(淸流洞)계곡이다. 파란 철다리 건너에 思無邪(사무사)라는 글씨를 새겨 놓은 바위가 보인다. 바로 옆으로 커다란 벚나무 한그루가 한여름 북적거릴 평상을 지키고 있다. 계곡으로 내려섰다. 작은 폭포가 시원한 물소리를 낸다. 바위에 한자로 된 글귀가 새겨져 있다.
'二曲(이곡) 盈科後進(영과후진) 放乎四海(방호사해)' - 구덩이가 있으면 그곳을 다 채운 후에 넘쳐흘러 끝내 사해에 이르게 된다는 말로 <맹자(孟子)> 진심장구(盡心章句) 상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계곡의 암반에는 구한말 조병순(曺秉順)이 一曲(일곡) 二曲(이곡)하며 구곡까지 새겨 놓았는데, 더러는 깨지고 더러는 도로확장으로 훼손되었다고 한다.
봄비가 흘러내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얕게 흘러내리는 계곡은 이리저리 물길을 피해 걸어갈 수가 있다. 청량감이 스미듯 몸을 감싼다. 잘게 흘러내리는 물들은 바위를 만나 작은 폭포를 만들고, 넓은 바위를 가득 덮었다가 큰 웅덩이를 만들어낸다.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서 '三曲(삼곡) 神山九折溪(신산구절계) 沿沂此中半(연기차중반)'라는 朱夫子(주부자)의 시(詩)를 만나며, '兩崖交翠陰(양애교취음) 一水自淸瀉(일수자청사) 俯仰契幽情(부앙계유정) 神襟頓飄漉(신금돈표록)'라는 오언절구(五言絶句)도 만난다.
나라를 찾으려는 염원을 돌에 새기다계곡 전체를 채우는 커다란 웅덩이 위로 '淸流水石動樂風景(청류수석동악풍경)'이라는 커다란 글씨를 새겼다. 여기가 청류동계곡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 위로 올라서니 '奇蘆沙 松沙 兩先生杖屨處(기로사 송사 양선생 장구처)'라는 작은 글씨아래 '西山講論(서산강론)'이라 큰 글씨로 새기고 아래 아홉명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언듯 보기에는 강론장소를 알려주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구한말에 나라를 찿으려는 의지를 새긴 비밀서약이라고도 한다. 그 옆으로 넓은 바위 위 단심대(丹心臺)라는 이름이 마음을 파고든다.
丹心客上丹心臺 - 단심(丹心)을 품은 나그네 단심대에 올랐네. 縱有丹心有孰知 - 단심이 있다한들 누구에게 이 마음을 줄 것인가 莫道丹心知者少 - 단심을 아는 이 적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丹心只恐死如灰 - 단심이 죽어 재가 될까 다만 두려울 뿐이라네. '우구산시(右臼山詩)' - 구산은 간재 전우(艮齋 田愚/1841-1922)선생의 별호이며, 구한말 애국지사로 나라 잃은 설움을 시로 읊은 것을 새겨놓은 거라고 한다.
커다란 바위 계곡이 끝날 무렵 '五曲(오곡) 樂樂臺(낙락대)'라 새겨진 동그란 바위를 만난다. 대(臺)라고 명칭 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바위인데, 한 사람 올라가기에 족할 바위에 낙락대라고 명한 여유가 느껴진다.
한적하고 아름다운 도림사
계곡 위로 높은 담장이 보인다. 담장 아래로 반질반질 반짝이는 길을 따라 절로 들어간다. 최근에 정비했음 직한 돌계단 위에는 오래된 벚나무 아래 하얀 바탕에 파란 글씨로 쓴 도림사(道林寺) 현판이 보인다. 너무나 깔끔한 현판에 가까이 가서 보니 근대 남종화(南宗畵)의 대가인 의제 허백련(毅齊 許百鍊)이 쓴 글씨이다. 벚꽃으로 단장한 일주문을 들어가니 오도문(悟道門)이라는 이름을 또 달고 있다. 돌아 나갈 때는 진리를 깨우치고 나가라는 의미일까?
동악산(動樂山) 기슭에 자리 잡은 도림사는 신라 무열왕 7년(660)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헌강왕 2년(876)에 도선국사가 중창을 하였는데 이때 도인(道人)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여 절 이름을 도림사라 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들은 17세기 중엽에 건축이 된 건물들이다.
절집은 한적하고 아담하다. 작은 돌멩이를 깐 마당 위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주불전인 보광전(寶光殿)이 작지만 반듯하게 서 있다. 보광전은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같이 모셨다. 양옆으로 응진전(應眞殿)과 명부전(冥府殿)이 자리 잡고 있으며, 뒤로는 칠성각(七星閣)이 배치되어 있다. 보광전에 들어서서는 보물로 지정된 괘불(掛佛)은 못보고 괘불함만 보고 나온다. 문밖으로 내려다본 오도문이 벚꽃에 쌓여 있다.
마당 옆으로 있는 요사채 마루가 앉았다 가라 한다. 오랜만에 기와를 타고 떨어지는 낙숫물을 바라본다. 그 너머로 비에 젖은 절집이 고즈넉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가끔 큰 웃음소리라도 날라치면 손으로 말리면서 조용조용하라고 한다. 오도문(悟道門) 위로 벚꽃이 웃음소리를 대신하는 듯 크게 웃고 있다.
도림사 - 전재형 조심스레 계곡가로 갔다가 만난 건 도림사 봄이라 벚꽃이 활짝 피고 절의 멋진 모습과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보광전 안에 불상들이 앞에 핀 벚꽃을 바라보고 우리도 벚꽃을 바라보며 봄을 즐긴다.여행을 갔다 온후 초등학교 6학년인 큰 애가 쓴 자작시
덧붙이는 글 | 지난 3월 9일에 다녀왔습니다. 비가 와서 동악산을 오르지 못했지만 덕분에 비에 젖은 청류동 계곡과 도림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주 운치있는 곳입니다. 애들과 계곡을 뛰어다니며 보림사까지 다녀오셔도 아주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