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5월 임시국회 소집을 거듭 요구했다. 13일 기자회견에서 국회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출자총액제한제 폐지를 뼈대로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 미성년자 피해방지처벌법, 식품안전기본법 등 30여 개 법안을 5월 안에 처리해달라고 요청했다.
지난 11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언급 이후 두 번째이다. 통합민주당 등 야권은 이미 이 대통령의 요구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오히려 대통령의 '의도'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정가 주위에서 '당위성' 문제를 떠나, 5월 임시국회 소집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헌정 사상 총선이 끝난 뒤 다음 원 구성까지 임시국회가 소집된 예는 아직까지 한 번도 없었다.
여권 내에서조차 부정적 기류가 강하다. 물러나는 17대 국회의원들에게 중요 법안을 처리하라는 요구는 '현실적으로 무리'이며, '책임정치'의 원리에 비춰봐도 옳지 않다는 견해가 많다.
그럼에도 이 대통령은 여야에 5월 임시국회를 거듭 요구했다. 무슨 속셈일까? 처음 언급은 '원론'을 짚어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반복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야권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고, 정치쟁점화가 불가피하다.
18대 총선 결과로 만들어진 여대야소 정국에서 여야 관계를 가늠할 첫 시험대가 5월 임시국회 소집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커졌다.
이 대통령 "17대 국회 임기 중 한미FTA 비준안, 출총제 폐지 등 처리돼야"
이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국회를 향해 "5월 중에 임시국회를 열어주기를 요청한다"면서 "이미 여야 간에 처리하기로 합의된 법안은 18대 국회의 개원까지 기다릴 것 없이 17대 국회 임기 중에 마무리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이 빠른 처리를 요청한 법안은 한미FTA 비준안, 공정거래법 개정안, 미성년자 피해방지처벌법, 식품안전기본법, 군사시설 인근 개발법안, 낙후지역 개발촉진법, 특정 성폭력범죄자 전자팔찌 의무화법, 국립대학 국고회계 자율화법 등 30여 개다.
정치 평론가나 학자들은 이 대통령의 요구가 '책임정치'의 원리에 어긋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시사평론가 김종배씨는 이 대통령의 주장을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는 "한미FTA 비준안이나 공정거래법개정안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올 사안들"이라며 "낙선자가 부지기수인 17대 국회에서 처리를 한다면 표결 이후 책임은 누가 지느냐"고 꼬집었다.
또 김씨는 "5월 임시국회가 열린다고 해서 낙선한 의원들이 얼마나 참여할지도 의문"이라며 "물리적으로 국회 소집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책임정치의 측면에서도 옳지 않은 일"이라고 비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도 "어떤 의원이 어떤 법안에 찬반을 했는지는 다음 선거에서도 유권자들에게 중요한 선택의 근거가 된다"며 "중요 법안들은 17대 국회가 끝난 이후 새 국회에서 제대로 처리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미FTA 비준안이나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여야, 특히 진보정당에서는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사안"이라며 "국회가 소집된다고 해도 쉽게 처리될 사안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시민사회에서는 졸속 처리를 우려했다. 김민영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한미FTA 비준안이나 재벌 규제 관련 법안은 17대 국회에서 여야 간에 제대로 합의됐다고 보기 어렵다"며 "18대 국회에서 제대로 처리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야당들 "처리기간 한두 달 늦어져도 충분한 검토 거쳐야" 소집 반대
야당들은 5월 임시국회 소집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임채정 국회의장부터 '과거 국회의 전례'와 '낙선한 17대 의원들의 개인사정' 등'현실적 이유'를 내세워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임 의장은 특히 "한미FTA 비준안의 경우 각 정당과 의원별로 의견이 제각각이고 국론도 아직 어느 한 방향으로 정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미국의 정치 상황도 감안해야하는 만큼 5월 임시국회에서 성급히 처리할 사안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김효석 통합민주당 원내대표도 지난 11일 "이번 총선에서 우리 당 현역의원의 절반 이상이 낙선했는데, 과연 이들을 국회로 끌어낼 수 있겠느냐"며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 그는 "어차피 6월에 국회가 예정돼 있고, 5월에 국회를 소집해도 법안은 5월 말이나 돼야 통과되는데, 그 작은 차이를 갖고 한나라당이 국민에게 자꾸 '쇼'를 하면 안 된다"고 불쾌함을 표시했다.
그는 이어 "6월 임시국회 전에 여야 협상을 통해 18대 원 구성 준비를 차질없이 하는 게 우선"이라고 덧붙였다.
유종필 대변인도 이날 논평을 내어 "5월 임시국회 소집 여부는 국회의 문제인 만큼 대통령이 직접 나서지 말고 여야 정당에 맡겨주기 바란다"고 주장했다.
박현하 자유선진당 부대변인도 "여야를 초월해서 민생을 살피고, 경제를 살리자는 대통령의 발언에는 공감하지만 민생법안은 세밀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다"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박 부대변인은 "상당수의 의원이 낙선한 17대 국회에서 상임위원회와 본회의에서 법안처리가 제대로 세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며 "중대한 민생관련 법안을 임기 말 국회에서 졸속으로 처리할 수는 없다, 설혹 처리기간이 한두 달 늦어지더라도 충분한 검토와 보완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노동당도 국회 소집에 응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강형구 수석부대변인은 이날 "한미FTA 비준과 기업규제완화를 중심으로 한 이 대통령의 민생경제는 90% 서민이 아닌 10% 재벌만을 위한 민생"이라며 "10% 재벌만을 위한 5월 임시국회에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나라당 "5월 임시국회 가능하게 만들 것"... 낙선 의원 "떨어진 이들이 뭘 하나"
반면, 이미 5월 임시국회 추진 의사를 밝혔던 한나라당 지도부는 강행 의지를 밝혔다. 이한구 정책위의장은 이날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청와대와 당 지도부 간에 이미 사전 교감이 있었다"며 "양당(민주당·한나라당) 정책위의장 간 합의는 됐으나 처리하지 못한 30여 개 법안을 이번에 처리하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 의장은 "한미FTA 비준안이나 출총제 폐지는 양당이 합의한 것은 아니지만, 한미FTA 비준안의 경우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지지 의사를 밝히지 않았느냐"며 "총선도 끝난 만큼 국회를 열어 처리를 해야한다"고 밝혔다.
과연 낙선자들이 국회에 출석할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낙선한 의원들은 기분이 내키지 않겠지만 17대 국회에 대한 평가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나쁜 만큼 마지막까지 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권 내에서조차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5선에 도전했다가 떨어진 이규택 의원은 "그게(국회 소집이) 지금 가능하겠느냐. 떨어진 의원들이 뭘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이 의원은 "막판에 처리를 해야 할 정도로 급박한 사안이었으면 3, 4월에 해야지 왜 이제 와서 하려고 하느냐"며 "(내 기억으로 새 국회 시작 직전) 국회가 소집돼 법안을 처리한 적은 없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농촌 출신인 이 의원은 또 "여당이고 야당이고 한미FTA 비준에 대해 반대 의견이 많은 상태"라며 "서비스 분야나 농민과 관련해 나온 대책도 없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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