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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방송국에서는 나를 기록하고 나는 카메라를 사진에 담고.
▲ 촬영 중. 방송국에서는 나를 기록하고 나는 카메라를 사진에 담고.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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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촬영을 당했습니다. 총선 끝난 다음 날인 4월 10일부터 13일까지 3박4일 일정이었습니다. 처음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나 같은 사람 뭐 찍을 게 있다고 먼 정선까지 와요" 했습니다. 그랬더니 방송국에서 "전화 받으면 다들 그러십니다" 합니다.

시민기자 '강기희' 방송에 출연하다

더 이상 거절할 명분도 없고 해서 촬영을 허락했습니다. 그러나 3박4일이라는 촬영 기일이 걱정이었습니다. 잠시 하는 인터뷰도 아니고 며칠 간이나 카메라에 내 고단한 삶이 노출되는 것도 부담이었습니다. 사실 작년 가을쯤에도 어느 방송에서 전화가 왔는데, 촬영기간이 길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이번엔 KBS 춘천총국에서 왔습니다. 프로그램 제목은 <강원 에세이 유(you)>라고 합니다. 허락이 있고 나서 방송 작가에게 전화가 또 왔습니다. 이것 저것 묻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쓴 기사를 거의 읽은 수준의 질문입니다. 확인이 끝나자 "촬영은 낼 모래부터 할 겁니다" 합니다. 번개불에 콩 볶아 먹습니다.

방송국에서 나를 선택한 이유를 들어보니 대략 몇 가지 됩니다. 첫째가 시민기자로서의 삶과, 소설가로서의 삶. 둘째가 시민운동가로서의 삶과 천하태평 농법으로 농사짓는 농사꾼의 모습. 셋째가 일흔 여섯인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시골살이 모습을 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내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야 하는 컨셉인 셈입니다.

물론 방송 출연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런저런 활동으로 가끔은 얼굴을 내밉니다. 문화면에 얼굴을 내밀기 보다 부당한 세상과 싸우는 장면이 더 많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향 사람들은 나를 소설가로 알기 보다 데모꾼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저 놈 고향와서 군의원이라도 하려고 하는 거여 뭐여"라고 눈총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자리 시켜 줘도 하기 싫어 하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 말 들을 때면 "난 허리를 구십도로 숙여가며 하는 인사성이 없고, 무엇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명토 박아 둡니다.

장날 열차를 타고 온 여행객들을 환영하는 공무원들. 그 틈에도 카메라는 돌아가고.
▲ 환영합니다. 장날 열차를 타고 온 여행객들을 환영하는 공무원들. 그 틈에도 카메라는 돌아가고.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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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중순 GTB강원민방에서 2박3일간 나를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휴먼 다큐 프로그램이었는데요. '한 줄의 글로 세상을 바꾸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3월 초에 방송이 나갔습니다. 방송 시간이 30분 분량이라 담을 것도 많았습니다.

1인 4역도 넘는 인생을 살아가는 소설가의 삶

무엇보다 촬영을 할 때 밀려온 막바지 추위로 촬영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 프로를 본 사람들이 제법 많았는데요. 식당을 가거나 담배가게를 가면 "어, 방송에 나온 그 사람이네?"하고 알아 봅니다. 방송이 나오고야 사람들이 그제야 이런 말들을 합니다.

"소설가인 줄은 정말 몰랐네요."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씨익 웃고 맙니다. 돈 되는 일이라고는 어찌 그렇게 잘 피하면서 사느냐고 핀잔만 듣는 요즘이라 그 말도 어색합니다. 인터뷰 중에 피디가 "시민기자 활동을 하는 이유가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종이신문의 한계를 넘을 수 있는 매체가 인터넷 신문입니다. 고향의 아름다움과 환경문제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그랬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올해로 3년 째를 맞았습니다. 소설가입네 하고 폼 잡을 일 없는 고장이라 늘 세상과 싸우는 모습만 고향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소설 쓰는 일이야 잠시 미루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장편소설은 엄두도 못내고 그저 단편소설만 가끔 씁니다. 그러니 소설가라는 말도 요즘은 민망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올해는 작심하고 장편소설 한 편 쓰려고 준비했지만 또 어려울 듯 싶습니다. 한 번 시작하면 최소 1년은 다른 일에 정신을 팔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작년에 그러더니 올해도 세상은 나를 자꾸만 집 밖으로 불러냅니다. 올해 나를 불러내는 화두는 '한반도 대운하'이지요.

대운하가 건설되면 동강에 댐이 만들어질 확률이 100%나 됩니다. 정선아라리를 낳은 정선 지역이 물 위에 뜬 마을로 변하는 것입니다. 시절이 그렇게 수상하니 집에서 글만 쓰고 있을 순 없는 노릇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소설 쓰는 일 잠시 미루고 대운하로 맞짱 뜨자고 하니 어쩌겠는지요.

촬영팀이 정선에 도착한 것은 10일 점심 무렵입니다. 집으로 찾아 온 촬영팀 중에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방송 피디인데요. 작년 도암댐 문제로 동강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촬영팀과 인사를 했습니다. 함께 온 이들은 모두 4명. 많기도 합니다.

지난 번 GTB에서는 피디 한 사람이 6m 카메라를 달랑 들고 왔는데, 이번엔 ENG 카메라를 메고 왔습니다. 아시겠지만 카메라는 작을 수록 행동이 자유스러운 법이거든요. 짧은 인터뷰도 아니고 3박4일 촬영을 포신 보다 큰 카메라로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앞 날이 캄캄합니다.

카메라는 내가 어딜 가도 찾아낸다.
▲ 노란 옷의 사나이. 카메라는 내가 어딜 가도 찾아낸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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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날 촬영은 바람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마나 강하던지요. 결국 첫날은 그냥 쉬기로 했습니다. 촬영은 다음 날부터 이어졌습니다. 다행히 바람은 잦았고 날씨도 쾌청했습니다. 그날 촬영은 동강의 봄 풍경을 취재하고 있는 나를 취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동강을 취재하고 방송팀은 나를 촬영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정선의 풍경을 취재하고, 방송은 그런 내 모습을 영상에 담고

6m 카메라와 달리 ENG 카메라는 NG도 자주 납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촬영하듯 같은 장면을 몇 번이고 찍기도 합니다. 인터뷰 도중 차가 지나가도 다시 합니다. 6m 카메라는 그런 것 가리지 않고 즉석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편이라 설렁설렁 잘 넘어갔는데, 이번은 쉽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낮동안엔 동강에 있다가 어두워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제부터는 시민기자의 일상을 찍어야 하는 순서입니다. 낮동안 취재한 것을 오마이뉴스에 기사로 올리는 모습을 담는 것입니다. 카메라는 숨죽이고 돌아가지요. 조명까지 설치한 작업실은 글쓰는 공간이 아니라 얼핏 느끼기에 술집 분위기까지 납니다. 그런 공간에서 기사를 쓰려니 죽을 맛입니다.

어떻게든 기사는 써야 했습니다. 기사에 몰입을 해야 하는데 그 또한 쉽지 않습니다. 보도기사가 아닌 탓이지요. 억지로라도 기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다 쓰고 나니 내용이 엉성합니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이 넷이나 되니 어쩌겠는지요. 수정할 여유도 없이 편집부로 송고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사가 '동강 '미녀들의 수다' 들어보실래요?'입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리고 나서는 소설 작업하는 장면을 촬영합니다. 마침 청탁받은 단편소설을 마무리 해야 하기에 그 작품으로 집필 촬영을 마쳤습니다. 촬영이 끝나니 시간은 밤 10시를 훌쩍 넘기고 있습니다.

다음 날인 12일은 정선 장날이고 어머니께서 장터에 나가셔야 하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촬영팀이 집으로 오기로 한 시간은 새벽 5시. 장터에 나가는 어머니와 내 모습을 영상에 담기 위해선 촬영팀도 새벽잠을 설쳐야 합니다.

내 모습을 담기 위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닌 이다. 주변 스케치를 하고 있다.
▲ 이 사람. 내 모습을 담기 위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닌 이다. 주변 스케치를 하고 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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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낳은 날에도 어머니는 장터에 나오셨다. 올해는 어머니께 고맙다며 미역국을 끓여드리지 못했다. 아들 셋을 다 음력 3월에 낳은 어머니는 봄만 되면 더 아프시다고 한다.
▲ 장터에 나온 어머니. 나를 낳은 날에도 어머니는 장터에 나오셨다. 올해는 어머니께 고맙다며 미역국을 끓여드리지 못했다. 아들 셋을 다 음력 3월에 낳은 어머니는 봄만 되면 더 아프시다고 한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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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가 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 "왜 갔던 길을 또 가냐?

새벽 시간 어머니가 방을 열며 장터에 나가자고 깨웁니다. 눈을 뜨며 시계를 보니 새벽 5시 30분. 그 시간 촬영팀은 조명을 밝혀놓고 어머니의 뒤를 쫒고 있습니다. 장터에 가지고 나갈 냉이며 달래가 든 보따리를 들고 나가는 장면에서 NG가 납니다. 다시 찍어야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바쁜데 뭔 일인지 원."

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장터에 가 있습니다. 마음 바쁜 어머니를 붙잡고 보따리를 들고 걸었던 길을 한 번 더 걸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영문을 몰라합니다. TV에 나오는 연속극이 사실인양 생각하고 살아가는 어머니라 촬영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도, 그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힘듭니다.

"어머이, 영화 촬영은 원래 이런 거여. 한 번에 마음에 드는 장면을 만들지 못하거든."

이렇게 얘길 해도 이해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입니다. 답답한 스탭이 어느 지점까지 보따리를 들어다 줍니다. 어머니와 무슨 이야긴가를 하면서 걸어야 하는데, 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언짢은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러니 어머니와 무슨 이야길 하겠는지요.

장터는 이른 새벽임에도 술렁입니다. 서울에서 오는 장날 열차가 첫 운행을 하는 날이라서 그렇습니다. 난전을 펼치고 나니 안개가 걷히기 시작합니다. 이른 시간이라 달리 할 일도 없습니다. 집에 돌아와 잠시 쉬다가 오전 11시 다시 읍내로 나갔습니다. 장날 열차가 도착하는 모습을 취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선역에 도착하여 기차를 기다립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여행객들을 따라 장터로 옵니다. 촬영팀들은 내가 움직이는 동선을 빼놓지 않고 영상으로 기록합니다. 하루 내내 정선 장터를 둘러보며 취재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올린 기사가 '올해 첫 정선오일장, 이게 바로 '산나물 사태''입니다.

장날 저녁엔 지역의 환경단체인 '동강살리기운동본부' 회의가 있습니다. 대운하 문제로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촬영팀은 회의 자리까지 따라옵니다. 조명이 설치되고 사람들을 기다립니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 갑작스런 조명과 카메라로 어리둥절 합니다.

동강변을 따라 꽃상여가 길을 떠났다.
▲ 꽃상여가 나간다. 동강변을 따라 꽃상여가 길을 떠났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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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 기록된 영상 돌아가고 있다 생각하면 함부로 살지 못해

단체의 대표를 맡고 있는 처지라 회의를 주재합니다. 정선에도 '대운하 반대 정선행동'을 만들기로 하고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어진 행사는 생일 축하자리. 그날은 공교롭게도 조명담당 스탭과 내가 생일을 맞은 날입니다. 아침에 미역국도 먹지 못한 터라 술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아따, 강 선생 생일이라고 방송 카메라까지 왔구먼."

누군가 보탠 그 소리에 한바탕 웃었지만 생일날을 그렇게 바쁘게 보낸 것은 난생처음입니다. 촬영 마지막 날은 다시 동강으로 갔습니다. 동강할미꽃 행사 중에서 꽃상여놀이가 있다고 하여 그 모습을 담기 위한 걸음입니다.

전날 밤부터 내린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그쳤습니다. 비가 그치자 꽃상여를 멘 마을 주민들이 "나무여~"를 외치며 길을 떠납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풍경이라 흥미롭습니다. 아름다운 동강변을 따라 떠나는 상여는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그림입니다. 펄럭이는 만장에는 고인의 생전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다지가 끝나는 것으로 방송 촬영도 끝이 났습니다. 동강할미꽃이 아름답게 피어난 동강변에서 촬영팀들과 헤어졌습니다. 그들과 함께 3박4일의 시간이 훌쩍 가버린 것입니다. 언제 마지막 날을 맞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습니다. 다행스런 일입니다.

세상 어디엔가 내 삶이 기록된 영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함부로 살아갈 일도 아닌 듯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몇 가지 일을 벌여 놓았지만 어느 일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습니다. 혼자 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끝장을 볼 텐데, 세상과 싸우는 일은 결론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언행일치'를 가슴에 담고 살지만 그런 일로 가끔은 실언을 하기도 합니다.

1994년인가요. 북한산에 있는 어느 절에서 2년 정도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해 초 봄, 막 출판한 책을 소재로 지금은 영화배우가 된 이영애씨와 남자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요.

방송을 끝내고 절에 돌아오니 옆 방에서 묶고 있던 할아버지께서 "방금 전에 강씨 비슷한 사람이 테레비에 나오던데 봤는가?"하고 묻더군요. 그냥 웃고 말았던 기억이 새로운 건 왜인지요. 환장하게 아름다운 봄날을 덧없이 보내고 있기 때문일까요.

상주가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다.
▲ 상주의 눈물. 상주가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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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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