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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은 이랜드 노조의 파업 300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지난해 여름 뜨거웠던 이들의 투쟁은 어느덧 언론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이랜드 사태도, 비정규직 문제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이 이랜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글을 보내와 게재합니다. <편집자주>

넬슨 만델라는 아프리카의 희망의 상징이 되었지만, 이전의 그는 고난의 상징이었다.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를 27년이나 감옥에 가둔 것은 법이었다. 촉망받던 젊은 변호사가 감옥에 가면서까지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아파르트헤이트도 법이었다.

 

법은 국가를 위한 것이었으며, 국민을 위한 것이었고(그러나 국민의 자격은 백인들에게만 주어졌다),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나아가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만델라는 범법자였다.

 

결국 영국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지만, 세계적 인권단체 앰네스티마저 만델라가 '양심수'가 아니라고 했던 것도 그가 법을 어겼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누구나 인정하듯 지금에 와서 아파르트헤이트나 나치의 인종청소는 '범죄'라고 기억되지만, 당시에 이는 준엄한 법이었다. 한국의 군인들처럼 '최고회의'니 '국보위'니 하는, 이름도 거창한 기구를 통해 최소한의 형식요건도 갖추지 못한 채 얼렁뚱땅 만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절차를 거쳐 다수결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제정된 법률이었다.

 

비정규직 법으로 엉망이 된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삶

 

우리는 어려서부터 세계 4대 성인 중 한 분(이런 건 도대체 누가 정하는 것일까?)이라는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말, "악법도 법이다"를 금과옥조처럼 여기고 살아왔다.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말은 한국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는데, 없는 말을 기억할 수 있는 신묘한 재주는 영화 <식코>에서 지적된 것처럼 '국가가 국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가를 두려워하는 나라'에서나 통하는 일이다.

 

그래서일 게다. 새로운 대통령이 '법 질서' 운운하고, 노동법을 전공했다는 노동부 장관이 "법은 지키라고 만든 것"이라고 하면 우린 왠지 오금이 저린다.

 

일단 대통령과 장관이 말하는 법이 도대체 어떤 법인지, 법률에 적힌 어려운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악법인지도 잘 모르겠다. 포이어바흐는 "법률이 없으면 범죄가 없고, 법률이 없으면 형벌이 없다"는 멋진 말로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을 천명했지만, 정작 내가 지켜야 할 법이 무언지 제대로 아는 시민은 거의 없다.

 

먹고 살 게 없어 생업 종사자의 3할쯤이 자영업자로 살아가야 하지만, 그래서 매일 큰 소리로 손님을 끌어 모으고 있지만, 정작 그런 일상조차 '경범죄처벌법'의 '청객행위'로 형사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평소엔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법이 어떤 순간엔 갑자기 나의 목을 옥죌 수도 있다. 손님을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고 형사 처벌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형사 처벌될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두 경찰관, 곧 국가의 처분에 달려 있다.

 

진보정당 국회의원들이 그토록 막으려 했던 '비정규직 보호법'도 마찬가지다. 그 법의 적용대상이 되는 800만명이나 되는 주권자들은 그 법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런 법이 만들어지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 다만, "'비정규직 보호법'이 제정되면 비정규직의 인권이 크게 신장된다"는 노무현 정부 노동부 장관의 입바른 소리만을, 그것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들었을 뿐이다. 그게 전부였다.

 

평생 법을 공부하였고, 법률 실무자로 살아온 사람들이 법 제정이 끼칠 영향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시행착오'라는 네 글자로 '비정규직 보호법'의 문제점을 에둘러 갔지만, 오늘도 길거리 투쟁을 거듭해야 하는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삶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렸다.

 

'다른 마트'에 가는 것으로 당신은 인권운동가가 될 수 있다

 

이랜드의 박성수 회장은 부도덕하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는 사람이지만, 그만 탓할 일도 아니다. '이랜드 사태'가 단지 법의 맹점을 파고든 사악한 자본의 비도덕성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민이 입법 활동에 대한 통제권을 갖지 못할 때 생기는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비록 '실패'했지만, 이랜드 노조의 이남신 부위원장이 진보신당의 비례대표로 국회입성을 노렸던 것은 이런 면에서 적절한 것이며, 본질에 훨씬 더 가깝게 가는 제대로 된 투쟁이었다.

 

우리가 아는 모든 참혹한 국가폭력은, 국가 자체가 거대한 범죄 집단이었던 과거와 현재의 여러 폭력들은 모두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죄 없는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죽인 것도, 심지어 광주에서 양민을 학살했던 것도, 또 다른 범죄들도, 당시엔 범죄가 아니었다. 법 집행이었을 뿐이다.

 

비록 저임금과 고된 노동 강도에 시달려야 했지만, 그래도 몇 푼의 벌이는 보장해주었던 직장에서 시민들이 쫓겨났다. 법 제정, 그리고 법 집행, 곧 법의 이름으로 생업에 종사하던 주권자들이 쫓겨난 것이다. 물론 합법이다.

 

거의 40년 전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법을 준수하라!"고 외쳤지만, 여전히 지금 있는 법을 준수하는 것도 많은 의미가 있지만, 그 법이란 것이 나의 삶, 나의 가정, 나의 미래를 파괴하는 한, 법은 그저 극복의 대상일 뿐이다.

 

이랜드 투쟁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났다. 이랜드 노동자들은 당장 박성수 회장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이 싸움은 결국 법이란 무엇인지,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투쟁이기도 하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라는 상식이 모든 이의 상식이 되기 위해, 대통령이 법 질서 운운하면 "도대체 무슨 법을, 누구를 위해, 왜 지키라는 말이냐"고 당당하게 묻는 시민들이 늘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따라만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똑똑한, 생각할 줄 아는 시민들이 늘어나는 계기 말이다. 이랜드 투쟁은 그저 평범하기만 한 시민들이 지금보다 똑똑해지지 않으면 최소한의 무엇도 지킬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지금껏 투쟁하는 이랜드 노동자들은 거리의 선생님이 되었다.

 

우리 모두 똑똑해지기 위해, 그들에게 "왜?"라고 묻기 위해, 우리의 질문에 답이 없으면 답을 요구하고,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저항을 멈추면 안 된다. 이건 인권의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이랜드 투쟁이 단지 한 사업장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이 필요한 모든 시민이 함께해야 할 중요한 싸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마틴 루터 킹을 기억할 만한 인물로 만들어준 사건은, 흑인인데도 퇴근길에 탄 버스에서 백인 전용석에 앉아있기를 고집했던 로자 팍스의 작은 저항에서 시작되었다. 로자 팍스의 저항 이후 흑인들은 무려 1년 2개월이나 버스 타기를 거부하고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였다.

 

자가용도 없는 흑인들이 두세 시간을 꼬박 걸어서 일터를 오가는 일을 하루이틀이 아니라, 1년 2개월이나 진행하였다. 일상적 인종차별을 하던 버스 회사 시티라인즈가 두 손을 들게 된 것은 갑작스러운 '회개' 때문이 아니라, 경영 압박 때문이었다.

 

박성수 회장 역시 '회개'가 아니라 구체적인 경영 압박이 있어야 변할 것이다. 이랜드·홈에버·뉴코아 불매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시민들이 마땅히 해야 할 책무이기도 하다. 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 타기를 포기해야 했던 흑인들에 비하면 얼마나 쉬운가. 그저 이랜드 계열만 아니면, 다른 마트에 가거나 시장에 가는 것으로도 당신은 훌륭한 인권운동가가 될 수 있다.

 

"괴물들이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프리모 레비(<거짓된 진실>(데릭 젠슨 지음)에서 재인용)


태그:#이랜드, #이랜드 사태, #이랜드 투쟁,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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