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남구 대연동 모 신경정신과에 입원해 있는 큰 누님(76세)을 만나고 왔습니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3년 가까이 고생해오다 지난 3월 14일 입원한 누님의 목이 부어, 내과진료를 받으러 가는데 보호자로 동행한 것입니다.
파주에 사는 조카에게, “어머님 목이 부었다고 연락이 왔는데, 옛날에 다니던 병원만 찾는다고 하니 내일(18일) 삼촌이 모시고 다녀오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누님이 보고 싶은 마음에 흔쾌히 대답했습니다.
아침 11시쯤 집을 나섰습니다. 제가 부산으로 이사 왔던 2002년 초여름 어느 날, 아파트에 오겠다는 누님 전화를 받고 마중 나가 전철역 입구에서 반갑게 포옹하던 그때가 떠올라 눈물이 맺히더군요.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만약 누님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니까 “어쩐 일로 이렇게 왔댜!”라며 반가워하더군요. 기쁘고 다행이라는 생각에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해서 참느라 혼났습니다.
누님과 함께 했던 4시간
입원한 지 한 달 조금 넘는 동안 병원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있다는 간호사의 말에 조금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외출을 위한 절차를 간단히 마치고 누님의 손을 꼬옥 잡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버스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님을 모시고 다닐 때나 아내와도 그렇게 다정스럽게 손잡고 다닌 적이 없었거든요.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야 하는 다대포 병원까지는 왕복 3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하지만, 누님과 제가 차 타는 것을 좋아하고,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오랜만이어서 멀다고 생각되거나 피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님은 환자임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이게 누구 차냐?”라고 묻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이상한 질문을 하거나 같은 내용의 질문을 쉴 새 없이 반복했습니다.
“멀리서 오느라 돈이 솔찬히 들어갔겠다”, “와줘서 고맙기는 헌디 미안허게 여기까지 왔어”, “돈이라고는 지금 천 원짜리 한 장도 없다”
묻지도 않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누님은 큰아들과 큰동생, 그리고 둘째와 셋째 동생을 혼동하는가 하면 제가 멀리 떨어진 군산에 사는 것으로 아는 것 같았습니다. 환자가 하는 말로 이해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피붙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반갑게 맞이하며 진찰을 한 뒤 웃으며 괜찮다는 다대포 내과병원 여의사의 소견을 듣고 나니, 누님의 진료보다 저와의 데이트 의미가 더 큰 것 같은 생각이 들더군요.
진료를 마치고 오며 쟁반짜장을 먹었는데, “오늘 짜장도 먹고 별간디 다 댕겨봤네”라며 만족해하는 누님을 보며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이어 ”오랜만에 니가 와서 함께 돌아댕깅게 얼마나 존지 모르겠다“는 말에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말이 보호자이지, 어머니 같고, 친구 같았으며 애인 같기도 했던 누님을 오랜만에 만나 데이트를 즐긴 하루였습니다.
사랑하는 누님!!
영화배우보다 더 늘씬하고 예뻤던 누님을 생각하면 세월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용돈이나 옷도 어머니보다 잘 사주었고, 친한 친구처럼 대해주었으며 등산을 갈 때도 애인처럼 함께 다녔던 누님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님! 4년 전 가을을 기억하시나요? 갑자기 집에 오셔서 형님 생일이니 군산에 가자는 제의를 하셨지요. 제가 갈 형편이 못된다고 하니까 “살었을 때 잘혀야지 제삿날 백번 찾아가믄 머하냐. 비용은 내가 댈 팅게 댕겨오자”라며 보채듯 졸랐지요.
제가 가겠다고 하자 기뻐하며 환하게 웃던 누님을 기억합니다. 군산에 가는 날도 추석에 먹다 남은 송편까지 비닐봉지에 담아와 먹어보라며 권했지요. 커피도 빼주고, 두유를 사 와서는 몸에 좋다며 귀찮을 정도로 권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누님이 베풀어준 마지막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님! ‘가족나들이’란 말조차 생소하던 1960년대 중반, 누님은 매형과 조카들 그리고 저를 데리고 공원이나 가까운 명승지에 다녀오곤 했습니다. 먹고살기 바빴던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가족나들이가 어색하게 보일 때였지요. 하지만, 저는 누님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보름 전에는 강운이 딸 결혼식에 참석하러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누님이 좋아하는 종인이와 봉우, 범식이, 종섭이도 만나고 왔습니다. 참! 누님이 예뻐했던 종섭이 딸 ‘신애’는 결혼을 해서 아이 엄마가 됐더라고요.
친구들이 누님 안부를 묻는데 결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가슴 아파할 얘기를 하기가 그렇더라고요. 해서 그냥 잘 있다고만 했습니다.
친구들은 제가 누님에게 잘한다며 칭찬하고 누님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저에게 누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거든요. 등산을 갈 때도 혼자 가기가 외롭고 해서 누님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집안에 무슨 일만 있으면 ‘자, 축, 인, 묘’부터 꼽던 누님이 어느 날 ‘마리아’라는 세례명으로 나타나셨지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성당 신부님이 잘해주시고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도 다녀왔다며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던 누님이었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끝까지 반대하고 일찍 시집보냈다며 어머니를 탓하다 막상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가장 슬프게 울었던 누님. 제삿날마다 어머니를 구박한 죄인이라며 비통해했던 누님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누님! 병원에서 헤어질 때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뜬 누님을 보고 계단을 내려오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지금 가면 언제 올 거여?”라고 묻기에 며칠 후에 틀림없이 온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 누님 표정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첫딸을 낳고 안나엄마 몸이 좋지 않아 하나만 낳아 기르겠다고 하니까, 딸 하나라도 잘만 기르면 아들 못지않다며 위로해주던 누님이, 버스 안에서 “애들은 지금 몇이냐?”라고 묻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눈물이 쏟아지려고 하더군요.
‘간호사들이 밤을 먹여주는 것만으로 고맙게 생각한다.’라는 말은, 누님이 병원에 입원해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누님! 그래도 누님은 행복한 편입니다. 근심 걱정 하나쯤 없는 사람 없고, 한두 군데 안 아픈 사람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효자인 아들이 둘이나 되고, 손자 손녀도 있잖습니까. 누님이 조금만 이상하다고 해도 멀리서 쫓아오는 동생들도 있고요.
5월 초에는 군산에서 형님과 형수님도 오시고 파주에서 흥배도 온다고 합니다. 손님들이 온다니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저도 누님이 하루빨리 완쾌되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겠습니다.
누님을 사랑하는 동생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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