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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예년과 다름 없이 대전광역시 민속자료 제2호 송용억 가옥의 영산홍은 흐드러지게 피어났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요.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꽃은 더욱 조용히 피어나니까요. 마치 떠들썩함과 부산함 속에는 취할 만한 아름다움이 드물다는 듯이 말입니다.

아시겠지만, 영산홍은 진달래과에 속하는 상록관목이지요. 해마다 4~5월이 되면, 꽃 피우는 법을 잊지 않은 가지들은 촘촘히 홍자색 꽃을 피워올립니다. 요즘 길거리에 조성한 화단에서도 영산홍이 한창이더군요. 그러나 그건 일본에서 품종을 개량한 '사스키'라는 철쭉 종류가 대부분이랍니다. 이 영산홍은 키가 아주 작습니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했다는 영산홍은 키가 훌쩍 큽니다. 딱히 자생지가 없으니 우리나라 꽃이라 주장할 만한 근거가 희박하다는 게 유감일 따름이지요. 어느 기관에선가 유전자 분석을 해보았는데 철쭉에 가장 가깝더라는 결론을 얻긴 했다더군요. 어쨌든 송용억 가의 영산홍들은 키가 크고 색깔도 더 고와 보입니다.

 "내게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여심과 찍사 본능은 있다." 한 스님이 아직 지지 않은 자목련을 사진 찍고 있다.
"내게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여심과 찍사 본능은 있다." 한 스님이 아직 지지 않은 자목련을 사진 찍고 있다. ⓒ 안병기

 "나? '찍삿갓'이라고 알랑가 몰러!"
"나? '찍삿갓'이라고 알랑가 몰러!" ⓒ 안병기

 "난 활짝 핀 꽃보다 아직 피지 않은 모란의  미완성 봉오리가 더 좋아."
"난 활짝 핀 꽃보다 아직 피지 않은 모란의 미완성 봉오리가 더 좋아." ⓒ 안병기

영산홍은 종류가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주색 꽃이 피는 것을 일러 특별히 영산자(映山紫), 혹은 자산홍이라 부르지요. 송용억 가 여기저기에는 자산홍이 무더기로 피어 있습니다. 저는 이 꽃 무더기를 일러 '꽃뫼'라 부릅니다.

꽃산이라는 뜻이지요.  세상에서 눈으로만 올라야 하는 유일한 산인 셈입니다. 원근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오르면 되고, 꽃의 체취를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싶은 사람은 가까이 가서 오르면 되는 산입니다.

전 송용억 가의 영산홍·자산홍에서 오래된 지병을 얻었습니다. 작년 봄, 꽃들의 아름다움 때문에 앓았던 병을 올해에도 또 앓습니다. 자산홍 속에는 제아무리 철판 같은 가슴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끝내 앓을 수밖에 없는 사무치는 아름다움이 숨어 있습니다.

영산홍·자산홍을 바라보면서 전 때때로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잔인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소싯적 누군가의 가슴 속에서 저 영산홍처럼 잔인하게 피어났던 적이 있는 그대라면 제 말뜻을 쉽사리 이해할 듯 합니다.

 "새까맣니까 블랙죠지."
"새까맣니까 블랙죠지." ⓒ 안병기

송용억 가에는 사랑채가 두 채나 있습니다. 큰 사랑채인 '소대헌'과 작은 사랑채인 '오숙재'. 아마도 예전에 이 집주인의 인심이 넉넉하고 좋았던가 봅니다. 큰 사랑채인 '소대헌' 뒤안으로 돌아가면 거기 아주 커다란 고려영산홍 한 그루가 있습니다.

고려영산홍은 선명한 주홍색 꽃이랍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지요. '잎은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은 잎을 만나지 못한다'라는 상사화가 가진 의미에 천착하는 그대라면 이 꽃 또한 상사화라고 여길 법 하군요.

아쉽게도 아직 뒤안의 고려영산홍은 활짝 피지 않았습니다. 수령 250년을 헤아리는 늙은 나무라서 그럴까요? 이 고려영산홍은 뜰 앞의 자산홍 꽃뫼가 완전히 허물어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활짝 피어납니다. "아, 늙으니 꽃 피우는 짓도 차마 못할 짓이야."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입니다.

 숨은 벌레를 찾아서.
숨은 벌레를 찾아서. ⓒ 안병기

 "꼼짝마, 너 나한테 찍혔어!"
"꼼짝마, 너 나한테 찍혔어!" ⓒ 안병기

오늘(4.18) 오후엔 사진을 찍거나 그냥 꽃구경을 하려고 아주 많은 분이 이 집을 찾아왔습니다. 특히 대전 한밭대학교 사회교육원 학생들이 단체로 오셨더군요. 이 학생들은 소위 '쉰 나이'에 다다른 분들이었습니다. 50대 후반에서 70대에 이르는.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이 보여주는 아주 작은 풍경조차 기어이 가슴에 담아두는 일이라는 걸 알 만큼 세상을 사신 분들이지요. 그 풍경 속에 깃든 알싸한 아픔까지도 묵묵히 담아둘 만큼 세상을 견디신 분들이지요.

 "잠깐. 꼬마야, 너 이참에 모델로 데뷔해줘야겠다."
"잠깐. 꼬마야, 너 이참에 모델로 데뷔해줘야겠다." ⓒ 안병기

 미안하지만, 스님 어째 자세가….
미안하지만, 스님 어째 자세가…. ⓒ 안병기

 "스님, 인제서 자세 나오시네."
"스님, 인제서 자세 나오시네." ⓒ 안병기

한참 사진을 찍던 '늙은 학생'들이 뭔가 부족함을 느꼈나 봅니다. 도대체 이 분들은 무엇이 부족하다고 느낀 것일까요? 짐작건대, 아마도 마지막에 풍경을 완성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모양입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은 마침내 발견한 것은 대문을 들어서던 아이와 엄마였습니다. 두 사람은 하릴없이 모델이 되고 말았습니다. 엄마와 아이가 놓여나자,  이번엔 스님이 모델이 되어 돌 위에 앉습니다. 보아하니, 이 스님 역시 '학생'인 듯 합니다.

사진기라는 물건은 주인이 가진 욕망을 여과 없이 그대로 뱉어내는 건방진 물건이지요.  피사체에 대한 가없는 욕심. 아름다움에 대한 줄기찬 집착. 취미라는 당의정에 싸인 집착이라는 말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요즘의 저 역시 이렇게 집착에 빠져 있으니까요. 이렇게 나가다간 대상을 직접 바라보는 눈을 영영 잃게 될는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을 때도 없지 않습니다. 점점 인공의 눈에 의지해야 하는 습성에 길들어 가는 제 자신을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요?

 "역시 내 딸이 꽃보다 아름다워!"
"역시 내 딸이 꽃보다 아름다워!" ⓒ 안병기

이 집안에서는 피사체가 따로 없습니다. 자신이 사진작가이면서 또한 피사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피사체 속에 있지만, 결국 마지막에 확인하는 건 역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당위성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영영 봄이 가고 말 겁니다. 그때까지 송용억 가의 영산홍은 자신을 태양을 닮은 붉은 색으로 물들이겠지요. 맨 마지막 꽃 이파리 하나까지 물들이고나서야 영산홍 나무는 비로소 깨닫게 될는지 모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밖이 아닌 내면을 치장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직 못다 한 기쁨이 숱하게 많건만, 봄날은 짐짓 모르는 척 무심히 저물어 갑니다. 그 옛날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그대에게도 이 봄날이 다 가기 전,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송용억 가의 영산홍이 설하는 빛나는 화경(花經) 몇 구절을.


#대전 #송촌동 #송용억가 #자산홍 #영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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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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