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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최경준 기자] 이명박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각)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영접을 받으며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 '입성'했다. 부시 대통령은 "한국과 미국이 새로운 동맹관계를 만들어 나가자"며 이 대통령의 방문에 화답했다. 청와대측은 "캠프데이비드에서 정상회담을 한다는 것 자체로 한미동맹 강화 등의 목표를 절반 이상 달성했다"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 대통령과 같은 날 워싱턴을 방문한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공식 영빈관인 백악관 앞 블레어 하우스를 한국 대통령에게 내준 채 영국 대사관저에서 묵었다. 브라운 총리는 17일(현지시각) 부시 대통령과의 백악관 정상회담에 앞서 3명의 미 대선후보를 만나 영국과 미국이 '특별한 관계'를 유지할 것을 다짐했다. '우선 순위'에서 밀려난 부시 대통령과 브라운 총리의 정상회담에서도 양국 관계에 대해 '특별한(special)'이라는 단어가 9번이나 사용됐다.

 

'살인적' 방미 일정... 현지 언론은 '썰렁'

 

지난 15일 미국에 도착한 이 대통령은 빡빡한 방미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외교안보,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 걸친 30여 개의 공식 일정 외에도 비행기 안이나 호텔 숙소에서 이뤄지는 보이지 않는 일정까지 감안하면 숨돌릴 틈이 없다.

  

'불도저', '일명박'으로 불리는 이 대통령조차 출국 전 순방 일정을 받아보고 "너무 했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일하는 대통령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행사가 연이어 잡혀있을 경우에는 로비에서부터 뛰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내심 걱정했던 참모들은 이 대통령의 강행군에 혀를 내두르고 있다. 김중수 청와대 경제수석은 "일정을 보면 거의 살인적"이라며 "(이 대통령은) 2시간 정도(밖에) 주무시지 못했는데 얼굴에는 아무 표정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이 상당한 두려움을 준다"고 농담 반, 놀라움 반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지 언론의 반응은 썰렁했다. 신문이건 방송이건 이 대통령의 행보는 '큰 뉴스'가 되지 못했다.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역사적인' 방미에 미국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이 대통령이 언론에 등장할 기회는 더 줄었다. 그나마 한국에서 함께 날아온 80여 명의 국내 기자들이 이 대통령의 세세한 동정까지 보도해 주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했다.

 

청와대측은 18일부터(현지시각) 1박2일로 진행되는 캠프데이비드 일정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앞선 일정은 캠프데이비드에 비하면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 부부와의 만찬은 물론 한미 정상회담과 공공기자회견은 이번 미국 방문의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에 현지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부시도 관례적으로 자신이 몰던 카트의 운전을 이 대통령에게 양보하거나 조깅코스를 안내해주는 등 파격적인 영접으로 이 대통령을 환대했다. 부시 부부의 초청 만찬에서도 에너지 위기와 고령화 사회를 주제로 대화가 오갔고, 최근 미국 대선 동향에 대해서도 대화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동관 청와대 대변인은 "이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19일(현지시각) 양국 정상의 기자회견은 CNN에서 생중계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날 교황이 UN에서 연설을 할 예정이어서, 언론의 관심이 또 다시 분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청와대측은 "언론에 몇 번 보도됐으냐 보다, 내용에 있어서 실질적으로 얼만큼의 성과를 냈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니냐"고 말했다.

 

부시 앞서 차기 대통령 불러들인 브라운

 

교황에 밀려 언론으로부터 외면 당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 만이 아니다. 브라운 영국 총리도 현지 언론으로부터 홀대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관심을 가진 <뉴욕타임스>의 17일자 기사 제목은 "교황의 그림자에 묻힌 영국 총리의 방미"였다.

 

게다가 브라운 총리는 이 대통령과 달리 '우군'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의 신문·방송들은 브라운 총리의 방미 일정을 '외교적 굴욕'이라며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브라운 총리가 미국을 방문하던 날 <가디언>은 "미국은 세계적 지도자를 위한 열광적 환영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브라운 총리도 그 '옆에' 있었다"고 보도했고, <인디펜던트>는 "교황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 가운데 혼자 남은 브라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BBC 방송의 한 진행자는 미국 ABC 방송에 출연해 "미국을 사랑한다"고 말한 브라운 총리를 두고 "하지만 미국이 더 사랑하는 사람은 (부시의 푸들이라고 불렸던) 블레어 총리였던 것 같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의 '외면'과 영국 언론의 '냉소' 속에서 브라운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오바마, 힐러리, 매케인 등 민주 공화 양당의 대선후보들을 잇달아 영국 대사관저로 불러들였다. 한창 분초를 다퉈야할 대선후보들이 유세까지 중단한 채 한 시간 간격으로 줄줄이 영국 대사관저를 찾아가 45분씩 브라운 총리를 만난 것이다.

 

 

브라운 총리는 대선후보들과 양국 현안은 물론 이라크 전쟁 등에 대해 논의했고, 이는 곧바로 <뉴욕타임스> 등 미국 현지 언론들에 의해 일제히 보도됐다. 영국의 <인디펜던트>도 "브라운 총리가 미 대선주자들을 평가하기 위해 정치적 스피드데이트를 가졌다"며 "브라운 총리는 오래 전부터 오바마 의원과의 만남에 가장 큰 비중을 둬 왔다"고 상세히 전했다.

 

후순위로 밀리기는 했지만, 부시 대통령은 브라운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우리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고 미래의 대통령들도 이런 관계를 계속 유지하리라 믿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순서에서만 밀린 게 아니다. 브라운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앞서 대선후보들과 논의했던 이라크 전쟁에 대한 두 나라의 입장 차이는 언급하지 않고 이란 핵문제 등의 공동 관심사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운 총리는 미 대선후보자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답변을 거부한 채 "난 이들 후보와 얘기를 나눈 후 미국과 영국의 관계가 더욱 공고해 질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고 말했다. 브라운 총리는 블레어 전 총리에게 따라붙었던 '부시의 푸들'이란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차기 대통령과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는 모양세를 취한 셈이다.

 

힐러리 후보는 브라운 총리와 회동 직후 성명을 내고 "(양국 관계는) 계속 깊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후보도 "그와 몇 달 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동안 미영 양국의 특별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일을 같이 하길 고대한다"고 성명을 냈다.

 

이 대통령과 브라운 총리의 닮은 점 그리고 다른 점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가장 신경을 쓰는 핵심 현안은 '한·미FTA(자유무역협정)' 비준안 처리 문제다. 이 대통령은 지난 18일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들이 한·미 FTA에 모두 반대하고 있다"는 질문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며 "누가 당선되든 미국 소비자와 경제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할 것으로 믿는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정말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바란다면 오히려 민주당 대선후보들을 만나 설득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부시 대통령이 얘기한 "새로운 동맹관계" 역시 미국의 차기 대통령과 만들어가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과 브라운 총리는 똑같이 미국을 뒤덮은 '교황 신드롬'으로 인해 현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브라운 총리는 향후 4~8년을 준비하고 있는 '뜨는' 미국을 선택한 반면, 이 대통령은 6개월이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지는' 미국을 선택했다. 양국 국민들은 두 지도자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조공외교#고든 브라운 총리#부시 대통령#이명박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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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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