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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제(22일) 정오 뉴스 날씨정보 시간에, 저녁 늦게부터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나왔습니다. 해서, 장날인 오늘 장에 가려던 생각을 바꿔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옷을 갈아입고 장을 보러 갔지요.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나갔는데, 봄의 마지막을 알리는 절기인 곡우(穀雨)가 지나서인지, 날씨가 무척 덥더라고요. 그래도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거리는 희망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집을 나서려니까, 지난번 도망간 밥맛을 잡는데 도움을 주신 상추장수 할머니가 생각나더라고요. 해서 평소 할머니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여쭤보려고 메모할 노트와 연필을 챙겼습니다. 노트를 들고 가려니까 제가 무슨 대단한 기자가 된 것 같아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오만 잡동사니들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재래시장은,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대화와 타협으로 흥정을 이루어내는 민중의 삶터입니다. 그런 장면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자주 찾습니다. 

 

노점상들은 적은 수입과 무리한 단속을 원망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다하고 있는데요. 온갖 권모술수로 대화를 거부하고 숫자로 누르려는 정치인들과 권력자들이 노점상들에게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손들어 반기는 할머니, "아제는 만날 상치만 묵나?"

 

오늘은 상추만 사고 할머니와 몇 마디 나누고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해서 다른 가게에 들르지 않고 곧장 상추장수 할머니가 있는 시장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먼저 저를 알아보시고 손을 흔들더라고요.

 

저도 손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가니까, 할머니는 길가에 널려진 부추와 양파를 정리하다 말고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할머니와 첫 거래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 동안 만난 횟수는 얼추 20여 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서로 반가워 할만도 하지요.

 

인사를 나누고 할머니 옆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갑자기 "고것들 오면 뭐하노"라면서 혼잣말을 하시더라고요. 구청의 무리한 노점상 단속에 대해 불만을 말하는 것 같았은데 자세히는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우선 상추부터 사야겠기에 "할머니! 상추 천원어치만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는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아제는 만날 상치만 먹노? 하긴 내 상치가 꼬십고 맛은 있제"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허물없이 대하다 보니 반가운 인사도 투정으로 바뀌는 모양입니다.

 

"할머니! 할머니가 아무리 많이 담아주셔도 상추 1천원어치로는 이틀도 먹지 못합니다. 또 여기에서만 사가니까 매일 먹는 것 같지요. 그리고 할머니 상추가 싱싱하고 맛이 좋기도 하지만, 제가 아는 분과 너무 닮으셔서 찾아오는 것입니다." 

 

할머니에게 자주 찾아오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상추와 쑥갓을 덤으로 한주먹 집어주며, 활짝 웃는 할머니 표정에서 또 다른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모진 풍상도 견뎌냈을 할머니 이야기

 

 

집을 나서기 전부터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금방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해서 거리에서 채소장수를 하면서 살아가느라 고생하신다는 인사부터 건네며 고향을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쉰 목소리로 '의령'이라고 하시더니, 제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함안이요, 함안'이라고 강조하시더라고요. 해서 저도 의령에 다녀온 적이 있어 조금은 알고 있다며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할머니! 의령에 있는 자굴산 아시지요? 그 자굴산 중턱에서 아내 친구가 카페를 하는데요. 그곳에 다녀오다 정암루도 보고 남강도 봤습니다. 경치가 그만이더라고요. 충의문과 열녀문 그리고 그들을 기리는 조선식 기와로 된 사당도 봤고요. 아늑하고 살기 좋은 고장이던데 지금이니까 그렇지 할머니도 어렸을 때는 부자로 잘사셨을 것 같아요."  

 

고수가 장단을 맞추듯 의령에 대해 아는 선에서 한껏 자랑했더니, 할머니는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그래! 그라제!'를 연발하면서 만족해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튕기는 것 같더니 말이 트이니까 흐르는 냇물처럼 살아온 이야기를 말씀하시더라고요.  

 

왜 채소장수를 하게 되었으며, 몇 년을 하셨는지도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무엇을 하시는지, 자녀는 몇이며 결혼은 했는지, 어머니가 거리에서 채소장수 하는 걸 말리지는 않는지 등을 여쭤봤습니다. 

    

할머니는 구포시장에서만 13년간 채소를 팔았다며, 그전에는 식모살이와 식당을 전전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무엇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는데, 헤어진 남편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할머니는 "남편이 바람나 쫓겨나다시피 40년 전에 이혼해 자식이 없다"며 억울해했던 당시 상황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놈의 강새이 같은 놈패이(남편)가 깨나 멋재이였는디 바람이 나가꼬 나를 비려뻐리는 바람에 채였다아이가. 그라서 단디 돈을 한바리 벌어 원수를 갚을라꼬 했디만 맘대로 안되드라꼬···."

 

할머니의 한탄 아닌 한탄에 이해할 수 없는 대목도 있었지만, 시간이 가도 풀릴 수 없는 한이 서려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포기하고 함께 사는 동생과 잘 지내는 게 목적이라는 말에 안심이 되더라고요.

 

할머니는 담배가 생각났는지 허리춤을 뒤지더라고요. 해서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며칠 전 병원에 입원해있는 누님을 만나고 온 얘기를 하며 건강이 최고라는 말을 했습니다. 

 

"할머니! 건강이 최고입니다. 돈, 그거 많이 벌어봐야 이제는 할머니가 원수를 갚을 수도 없고 또 다 쓰지 못하고 돌아가십니다. 동생과 함께 지내신다고 했는데, 두 분이 먹고 살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지요. 저희 누님은 착한 아들과 며느리들이 있어도 몸이 아프니까 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병원에 있잖아요···."

 

할머니는 제 얘기에 수긍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그러면서 빨간 모자를 머리에 쓰고 노점상을 단속하러 다니는 구청단속반을 향해 "할마이들이 먹고 살라카니 언가이 해야제~"라며 욕을 해댔습니다. 구청 단속반에게 욕을 할 수 있는 것도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1천원어치 상추를 사면서 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태그:#상추장수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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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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