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증기기관차의 역사를 간직한 급수탑
 
지난 20일, 충남 연산지역의 유적을 찾아가는 내 여정은 연산역에서 첫발을 내딛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급수탑은 연산역사 왼쪽에 있다. 홀로 동그마니 서 있다가 나그네를 반긴다.
 
화강석을 마치 벽돌처럼 다듬어 쌓았는데 첨성대를 비슷하게 생겼다. 아치형 출입구가 제법 멋스럽다. 높이 16.2m, 바닥면적 16.6㎡이며 저수 용량은 30t이라 한다. 호남선을 달리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고자 1911년 2월에 건축한 것으로 1970년대까지 약 60여 년 동안 사용했다 한다.
 
어려서 비둘기호를 타고 연산역을 지나면서 저 급수탑을 본 기억이 뚜렷이 떠오른다. 씩씩거리면서 하얀 연기를 뿜으면서 달리던 증기기관차. 어쩌면 내 역마살은 그 시절의 증기기관차에게서 물려받은 건지 모른다. 증기기관차가 가진 비밀 한 가지를 이제야 엿보는 감회가 새롭다.
 
안에는 어떻게 생겼을까.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출입문은 닫혀 있다. 흘러간 유행가에 나온 '금순이'를 닮았다. 굳센 건 삶을 헤쳐가는 힘이기도 하지만 사랑받을 수 없는 게 결정적 흠이다.
 
아무튼 이 급수탑은 현재 남아있는 급수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증기기관차를 알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에겐 무척 신기한 건물일 것이다. 아이들 교육용으로 활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 그만 갈게"라고 말해도 급수탑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하기야 이 급수탑처럼 이별에 이골난 녀석도 없을 것이다. 연산아문을 거쳐 연산향교로 가기로 여정을 잡고 연산아문이 있는 연산리를 향해 간다
.
소박한 마을 정경 때문에 더욱 돋보이는 연산아문의 아름다움
 
연산리 관창로 중간쯤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자, 연산아문이 요염한 자태를 뽐내면서 나그네를 맞는다. 읍내리라고도 하는 연산리는 옛날 연산현의 소재지였다.
 
'연산'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초였다. 조선 태종 때는 현감을 설치할 정도로 큰 고을이었던 모양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연산군으로 불리다가 1914년 일제가 단행한 행정구역 폐합 때 논산군에 편입되어 연산면이 되었다.
 
연산아문은 옛 연산현 건물을 지키던 정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팔작지붕 건물로 18세기에 세운 것이다. 직사각형 돌기둥으로 된 초석 위에 둥근 목재 기둥을 세우고 나서 2층에 누마루를 깔았다. 우측에 있는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다.
 
누마루 나무가 많이 삭았다. 2층 사방을 빙 둘러 설치한 계자난간이 무척 아름답다. 이 건물이 간직한 아름다움은 주변 건물들이 바쳐주는 것이다. 변변찮은 2층 건물조차 없는 소박한 촌마을 정경이 이 건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연산천을 건너 관동리 향교를 향해서 간다.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향리 주민들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들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간 끝에 도착한 향교는 관동리 마을이 끝나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높은 곳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며 남향한 채 앉아 있다.
 
잠깐 머물렀는데도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향교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왼쪽 암반 위에 세워진 '대소인원하마비'라 쓰인 하마비다. 옛날에는 향교에 모신 성현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야 했던 것이다.
 
홍살문 앞에서 바라보는 향교는 매우 아담하고 정겨운 모습이다. 솟을대문 앞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이 집에도 '굳센 금순이'가 사는가? 담장 너머로 안을 기웃거리다가 오른쪽 담장 옆으로 간다.
 
담장 옆에는 명자나무가 한창 붉게 꽃을 피우는 중이다. 그 뒤에는 문 없는 기와집 한 채가 있다. 건물 뒤로 돌아가자 담장 중간에 달린 중문이 보인다. 얼른 문을 살펴보니 다행히 문이 열려 있다.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칠석날 견우가 직녀 만난 듯이 몹시 반갑다.
 
문을 밀치고 향교 안으로 들어간다. 맨 아래쪽에는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서재가 있고, 맨 위에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연산향교는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었는데. 그 뒤 여러 차례 보수를 거쳐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다. 향교는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제사만 지낼 뿐이다. 이곳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안자·증자·자사·맹자 등 다섯 분 성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한다.
 
연산향교는 내가 근래에 보았던 향교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다. 건물마다 절제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오래된 은행나무 세 그루가 헛기침을 하는 늙은 선비처럼 서 있어 더욱 정겨운 풍경을 연출한다. 가을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일 적에 여기 오면 꽤 운치가 있을 것 같다. 건물 사이의 공간이 넓은 탓인지 아주 잠깐 머물렀을 뿐인데도 마음이 제법 여유롭고 한가해진다.
 
허리가 갈라져 안쓰러운 마애삼존불
 
황산성을 올라갔다 내려와 찾아간 곳은 송정리 마애삼존불이었다. 송정리란 지명으로 미루어 소나무 숲에다 정자가 있는 마을 이름인가 보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어르신께 마애불의 위치를 여쭈니, "범골로 가라"고 하면서 길을 자세히 일러준다. 연산천을 쭉 따라가되, 왼쪽 산에 있다고 한다. 개태사 앞쪽쯤 되나 보다.
 
얼마나 걸었을까. 왼쪽으로 꺾어지는 길이 나온다. 아까 어르신이 설명하던 그 길인가? 길을 따라서 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서당이 있는 마을이다. 마당에서 일하는 분께 다가가 마애불의 위치를 물었더니, 맞은 산 뒤쪽이라면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일러준다.
 
그 길로 산길을 타고 올라가서 한참이나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한 채 그만 산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다리가 몹시 아프다. "다음 기회로 답사를 미룰까?"라고 내 안의 '나'가 자꾸만 꼬드긴다. 그러나 기회란 자주 오는 게 아닌 것을….
 
둑길에 서서 산자락을 유심히 살핀다. 공터로 보이는 곳에 바위같이 하얀 물체가 아른거린다. 아, 바로 저곳인가 보다.
 
다시 기운을 내서 산을 오른다. 임도 부근엔 길을 내느라 여기저기 마구 파헤친 흔적이 있다. 그래서 길이 갈라져 더욱 찾기 어렵다. 마애불은 찾지 못한 채 다시 산꼭대기에 올라서고 만다. 산 아래서 눈대중으로 봐둔 위치를 헤아리면서 재차 산속으로 들어간다.
 
어느 한 순간 마치 꿈이런듯 마애불이 나타나서 나그네를 맞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마애삼존불이 새겨진 바위 허리가 갈라졌지 않은가 말이다. 본존불은 가슴 부위, 우협시불은 두상 부분이 갈라져 있다.
 
본존불은 키가 크다. 그러나 좌·우협시불은 본존불보다 키가 반절밖에 되지 않는다. 갈라진 바위에 맞춰 새기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본존불은 양손을 앞으로 가슴까지 올려 합장한 형태로, 머리엔 굵은 육계가 새겨져 있고, 코가 큰 편이며,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좌·우협시불은 가슴께에서 두 손을 공손히 합장하고 있다. 이 마애삼존불은 누가, 언제, 왜 새겼는지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고려시대에 조성된 불상이 아닌가 싶다.
 
터덕터덕 산길을 내려온다.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마애불을 찾았다는 기쁨을 음미하기엔 두 다리가 너무 아프다. 연산천엔 버드나무가 물 가까이로 푸른 가지를 드리운 채 바람에 흐느적거리고 있다. 다음 세상엔 다시 태어나게 되면 버드나무로 태어나도 좋을 것 같다. 버드나무가 가진 유연함과 부드러움이 몹시 부러운 봄날이다.

태그:#충남 , #논산 , #연산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