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는 어떤 곳일까? 한 마디로 입시 훈련장이다.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대학 서열화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하는 곳이 되었다. 이것은 불문률처럼 되어버린지 오래다.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대학을 위한 준비는 사교육과 공교육을 막론하고 '어떻게 하면 좋은 점수를 내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학부모들은 영어교육, 논술 교육, 대학입시에 유리한 초중고학력을 마련하기 위해 학원을 찾고 과외교사를 찾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아이 일생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는 대부분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그들에게 다른 권한까지도 부여한다. 예컨대, 공부잘하는 학생은 학교를 대표하여 좋은 학교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홍보맨으로 활용된다. 더 많은 인정과 칭찬, 보상이 이뤄진다. 대부분의 학교는 학생들에게 서열을 통하여 자신의 위치를 인지하도록 한다.
대학서열의 윗자리를 차지한 학생수가 많은 학교가 우수한 학교로 인정받고 있는 현실에서 현 정부의 교육 자율화는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넓혀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맥락에서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생만들기' 전략의 하나다.
대학은 학생들을 선발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지, 그 학생이 어떤 성품과 어떤 능력을 가지고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냐는 데는 그리 관심 갖지 않는다. 예컨대 대부분의 대학들이 어느 대기업에 몇 명을 취업시켰는가로 판가름되는 사회, 참으로 아연실색하게 된다.
최근의 대구 초등학생들의 성폭행사건이나 교육 자율화는 학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한 총체적인 안목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대구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을 살펴보자. 이 사건은 학교에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사건이다. 학교는 이제 정보 전달기능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사에게서 배우는 지식보다 인터넷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알게되는 지식이 더 높아졌기 때문에 학교는 이제 가르쳐야 할 것들에 변화를 줘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학교는 교과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대학 역시 교수들의 연구실적이 무척 저조하다.
학교 자율화의 문제를 살펴보자. 학교 교장의 자율권과 학생들의 학습권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면도 보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학습은 곧 점수로 환산되어야 하고, 그 점수는 상위 학교의 진학률과 취업률에 잣대로 이용된다. 학교 자율화는 교육관련 기관들과의 연계 구조를 기초로 만들어가야 한다. 학교가 중심이 되어 지역의 도서관과 박물관, 기업들과 협력하는 체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 두 사건을 보면서 교육에 대한 전략이 부재하다는 것을 느꼈다. 초등학생들이 인터넷 음란물에 노출되어도 어떻게 대책을 세워야 할지 방안을 내 놓지도 못하는 교육청도 문제다. 보이지 않는 관료사회 자율성의 허실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은 이제 다양한 정보를 어떻게 활용하고 사람들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으며, 문제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다.
최근 자주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도 학교 내 교육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에서는 성교육을 한다하여도 음란물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때문에 전반적으로 잘 다루지 않는다. 또 성폭행과 성추행의 행동은 어떤 것이며 그것은 다른 사람 에게 어떻게 피해를 주는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성교육 시간엔 성의 차이와 생식기의 차이 정도만 언급할 뿐 적극적으로 피임, 임신, 포르노 물과 관계된 범죄 등에 대해서는 잘 알려주지 않는다.
학생들은 교과에 있는 내용만 배워야 하고, 그것에 맞는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어서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이 생각한 어떤 세계에 대해 논의할 만한 부분은 전무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학원에서도, 학교에서도 그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교과에만 전념(?)하면 되는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말고 공부만 하면 되는 곳이 학교인 것이다.
감정을 다루는 법, 갈등을 다루는 법, 문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장, 작품을 나름대로 해석하는 법, 교과를 벗어난 인기 작품에 대해서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 등등. 이런 것들에서 제외된 채로 살아가는 오늘날 학교는 자율화를 내세우고, 세계화를 언급한다하여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교육은 다 함께 어려움을 해결하고 도와주며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어야 한다. 선생님은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고 안내하고 촉진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교장은 학교밖 기관들과 협력하여 이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도록 전력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가야할 교육의 방향이자 지향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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