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뒤에는 포도밭이 있었다. 가을이면 포도가 주렁주렁 열리고 그 열매는 한없이 달았다. 주류 포도들이 다 들어갈 때쯤, 늦은 가을이면 이곳의 머루포도는 그 진가를 발휘했었다. 포도알 한 알갱이를 입안에 넣으면 터지는 신맛과 단맛,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17년이 지나 다시 이곳에 와 살면서 잡풀만 무성한 포도밭 아닌 포도밭을 지난 겨울 맞닥뜨렸을 때 마음이 아렸다. 그러던 중 새 봄 어느 날 중방비가 들어서더니 층층이로 이뤄진 옛 밭 세 뙈기를 묶어 널찍한 다른 밭 한 뙈기를 꾸몄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농사를 짓지 않던 옛 주인이 농사를 지을 새 주인에게 밭을 팔았다고 했다.
나는 새 주인과 인사를 나눴다. 무엇을 심을 거냐고 물었더니 새 주인은 수박을 심을 거란다. 인사가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널찍한 밭에 우분(牛糞)이 한 꺼풀 입혀졌다. 그러고는 사나흘. 언제나 갈아 엎으려나 학수고대했지만 그리 쉬 갈아엎질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 집은 이전에는 없던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파리 떼다. 파리 떼 때문에 우리 식구들의 드나듦에 얼마나 많은 지장이 초래되는지 모른다. 문밖으로 시커멓게 앉은 파리 떼를 손으로 이리저리 쫒고 문을 열지만 들어와 보면 어김없이 파리가 서너 마리는 족히 따라 들어온다. 한두 번 드나드는 것도 아니니 하루에도 몇 번씩 파리채를 들고 야단을 떨어야 파리 떼의 극성이 좀 수그러든다.
그러나 이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듯, 파리와의 전쟁은 끝없음의 연장이다. 한도 끝도 없는 전쟁을 새삼스레 치르면서 심사가 고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쩌랴. 새 주인은 인사를 건네는 내게 수박이 익으면 따먹으란다. 이리 고운 심성을 가진 이에게 파리 떼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앰한 파리채만 작살이 난다.
파리채를 휘두르며 내가 한 말.
"이 놈들이 죽을 줄 모르고 이리 들어와 아까운 목숨 사르고 있네 그려."
아내가 받은 말.
"그 놈들이 죽을 줄을 알면 들어왔겠어요."
허, 정말 그렇다. 그냥 밖에서, 자기들의 음식이 지천인 그곳에서 놀면 파리채를 얻어맞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일 따윈 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그런데 난 왜 이게 파리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을 줄 모르고 앰한 데 덤벼들고 있는지 모른다. 하긴 사람도 그게 죽을 길인지 알고 덤벼드는 이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파리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다.
파리가 우리 집 문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는 죽을 자리를 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장 그의 눈앞에는 밭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음식들이 있다. 비린내, 누린내, 온갖 먹이의 냄새가 집안에 있다. 그리고 잠간은, 파리채의 세례를 받기 전에는, 그들을 맘대로 핥을 수 있다. 결국은 죽게 되지만, 그 순간은 행복할 수도 있다.
성경 잠언 14장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
그렇다. 성가시게 구는 파리를 파리채로 사정없이 두들겨대며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죽음의 길이 아니라 진정한 삶의 길이기를. 순간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위한 길이기를.
덧붙이는 글 | 갓피플 칼럼에도 같이 올라오는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