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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톱>겉그림
 <손톱>겉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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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일의 <손톱>을 읽기시작하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공포가 떠올랐다.   5학년 여름, 땀을 닦으려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었다. 불과 5분 전까지 멀쩡하던 내 오른손 등을 수많은 물집들이 가득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만 대면 금방이라도 터져 진물이 흐를 것 같은 괴물들. 순간, 모든 것들이 의심스럽고 아득해졌다.   '5분 전까지 아무렇지 않았었는데? 아닌가? 시간이 한참 흘렀나? 여기가 어디지?….'   그 순간, 며칠 전에 짝이 장난삼아 제 손의 사마귀를 뜯어 내손에 문질렀었던 기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무서웠다. '흉물스러운 파충류로 변해버리면 어떡해'하며 혼자 끙끙 앓았다.   어린 시절의 이런 소스라치는 기억을 들춰내며 읽은 <손톱>. 이미 내안에 사마귀 바이러스와 같은 어떤 바이러스가 스며들어 있어 잠자는 동안 뽑혀나가는 고통도 없이 내 손톱이 하나씩 뽑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만다면?   악몽을 꿀 때마다 손톱이 빠진다, 고통스럽게...   여섯 살 희수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범인을 잡지 못한 채 수사는 종결되었고, 아이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우울증까지 앓던 네일아티스트 홍지인은 결국 남편과 이혼한다. 홍지인은 악몽에 시달린다. 그리고 손톱 하나가 감쪽같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조금의 가책도 없이 단지 호기심만으로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는 사이코패스, 인간백정이라 불리는 청부살인업자, 고문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어가는 사람을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고문수사관, 기분 나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따돌림 하다가 친구를 죽이는 가출 소녀들, 집에서는 평범한 가장이지만 밖에서는 아무 여자나 거리낌 없이 즐기다가 살인까지 하게 되는 파렴치한.   홍지인은 매일 밤 이런 살인자들이 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놈'에게 살인 당한다. 악몽을 꿀 때마다 사라져버리는 손톱들과 이제 남은 손톱은 겨우 2개.   깎은 손톱과 발톱이 적에게 들어가 감염주술에 이용당하는 것을 막고자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은 추장의 손톱과 발톱을 묘지 속에 숨겼으며, 파타고니아의 원주민들은 흔적 없이 태워버렸단다. 영혼이 부활할 때 손톱이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페루의 잉카족과 아르메니아 족들은 집과 교회의 벽에 손톱과 발톱을 붙여 보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풍습과 관련, 마다가스카르섬의 베스텔레로족에게는 라만고(ramango)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왕의 손톱을 먹어치움으로써 안전하게 처리하고자 기용된 사람들이었다.   악몽을 꾼 후 손톱을 잃어버린 홍지인은 우연히 이 '라만고'의 실체를 알게 된다.   책을 읽기시작하면서 처음에는 이 라만고의 다소 의도적인 실체가 어색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이런 어색함은 잠시, 팽팽하게 긴장되는 공포에 빠져 들어가며 홍지인의 손톱이 하나씩 빠질 때마다 내 손톱들이 무사한지 몇 번이나 확인해야만 했다.   한치 앞도 추측할 수 없는 살인의 실체, 오감을 자극하는 치밀한 묘사들, 가장 아픈 것을 망각하면서 상처를 치유하려는 인간의 본능, 동전의 양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간의 선과 악 들이 팽팽하게 당겼다 놓았다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치밀하게!   '라만고'가 실제 하진 않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마귀 바이러스가 웅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내 손등을 덮어버렸던 것처럼, 이미 보이지 않는 어떤 바이러스가 내 몸 어디를 떠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손톱을 하나씩 뽑아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김종일 작가는?
어린 시절, 사소한 것으로 쉽게 상처 받을 만큼 여린 감정의 소유자였던 김종일은 상처를 받을 때마다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음으로써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어린 시절에 이미 터득, 9세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이런 그는 2001년부터 인터넷에 연재한 단편소설을 묶은 <몸>으로 '제3회 황금드래곤문학상' 대상을 수상, 한국장르문학계의 무서운 신인으로 떠올랐다.

2005년에 한국공포문학의 대표작가인 이종호('분신사바', '이프'의 저자)와 공포문학 창작집단 '매드클럽'을 결성, 아무래도 발전이 더딘 한국공포문학의 활성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일환으로 공포문학 신인작가들을 발굴, 그들의 작품을 모아 <한국 공포문학 단편선> 1,2권을 출간, 작가의 '일방통행'과 '벽'이 각각 실렸다. 이들의 책은 불황에도 제법 많이 팔릴 만큼 각계각층과 독자들의 기대와 주목을 많이 받고 있다.


오랜만에 기억해낸 어린 시절과 다소 엉뚱하달 수 있는 상상력, 이런 적당한 긴장감들은 일상을 훨씬 더 파닥거리게 한다. 이래서 공포소설을 좋아하는 마니아들이 있나보다.    홍지인의 악몽은 우리사회 우리들의 공통된 악몽들이었다.    아마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 중에 최근 우리 사회를 공포에 떨게 한 수많은 살인사건들을 떠올리며 경악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다분히 논란이 있을 수 있는 소설을 흔쾌히 출간해 준"이란 작가의 표현이 실감날 만큼,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런 끔찍한 악몽들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사회 일어나서는 안 될, 하지만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이 악몽들을, 악몽을 품고 있는 손톱을 먹어 치울 라만고가 더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세상에 광명과 삶과 사랑과 희망과 선만 존재하여 그에 대해서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어둠과 죽음과 증오와 절망과 악도 세상의 요소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이면을 들춘다 하여 그를 색안경 끼고 보며 손가락질하는 것은 위선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그것들을 외면할 수 없다.
공포소설이야말로 우리네 삶의 그늘을 비추는 거울이다."- 작가의 말 中  

덧붙이는 글 | <손톱>(김종일 장편소설/랜덤하우스코리아/2007년 1월 31일/10500원)



손톱

김종일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2008)


#공포소설#한국공포문학#김종일#이종호#매드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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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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